"당시 고문이 있었고 피해자들은 간첩으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 선고를 한 법원이 이 사건을 결론 내릴 수 있는 자격이…. 법원이 당시 인권의 최후의 보루임에도 제 역할을 다 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에 이 사건을 믿고 맡겨준 데 대해 감사를 전합니다. 제가 과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결론을 내보겠습니다."
30일 오전 열린 '고문 수사관' 고병천 전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수사관에 대한 결심공판.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이성은 판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코끝이 빨개진 채 휴지로 눈물을 훔치던 그는 몇 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과거 간첩 조작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던 고문 피해자들의 진술을 다 듣고 난 이 판사는 법원의 '자격'과 '역할'을 되뇌었다.
고문 피해자들은 마지막 심리였던 이날까지도 고 씨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지 못했다. 대신 통렬하게 자기반성하는 이 판사의 모습에 위로를 받았다.
<고병천 재판 기사>
① "고문 안 했다" 간첩 조작 수사관, 뻔뻔함 언제까지?
② 34년 만에 법정서 '간첩 조작' 잘못 시인한 수사관
"죄송하다"더니 왜 피해자 아닌 재판부에만 사과문 보냈나
고 씨는 1980년대 재일교포 간첩 사건을 '만든' 장본인 중 한 명이다. 재일교포 이종수 씨, 윤정헌 씨를 각각 1982년, 1984년 불법 연행한 뒤 구타, 물 고문, 엘리베이터 고문 등 가혹 행위를 해 간첩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이후 지난 2010년 열린 윤 씨의 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윤정헌에게 구타나 협박 등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는 취지로 허위 진술했다. 이에 위증 혐의로 지난해 12월 검찰에 기소당했다.
수차례 자신의 과오를 부인해오던 고 씨는 지난 3일 공판에서 "잘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또 여러 피해자 가운데 일부에 대한 가혹행위만 인정했다. 이 판사는 "사과에서는 '무엇'이 중요하다"며 그 '무엇' 부분을 잘 기억해내시라"며 법정 구속했다.
풀색 미결수 수의 차림으로 27일 만에 다시 법정에 선 고 씨의 태도는 종전과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고 씨는 '얼굴을 물수건으로 덮고 물을 붓는 고문', '손목을 묶고 막대기에 넣어 두 책상 사이에 걸쳐놓는 통닭구기 고문 욕설과 구타 등의 고문은 인정했다. 그러나 '윤 씨와 이 씨 외에 다른 기억나는 피해자가 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관행적으로 대부분이 그랬기 때문에 콕 집어 누구라고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며 "기억이...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줄곧 고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선후배나 동료들에 대해 누가 될 것이고 (책임이) 저한테 돌아올 것이 겁이 나서 잘못된 생각으로 그랬다"고 했다. 윤 씨 재심에서 허위 증언한 이유에 대해선 "(증인 출석) 통지서가 왔기 때문에 꼭 가야되는 줄 알고 갔던 것"이라고 했다.
또 "피해자들이 보기엔 사죄가 부족하다 느낄 수 있겠으나 그건 말재주 부족이지 않느냐"는 자신의 변호사의 물음에 "그렇다"고 했다.
검찰은 "피고인을 비롯한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한 가혹행위와 고문으로 피해자들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며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으면서도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재심 사건에서도 허위 진술을 함으로써 실체 발견을 어렵게 했다"며 징역 1년을 구형했다.
고 씨는 미리 준비해온 종이를 꺼내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점, 진심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며 "윤정헌 씨에게 사죄하고 다른 모든 분들에게도 사죄한다. (보안사의) 한 조직원으로서 죄송하다"고 했다. 이어 "부족해도 용서해주길 바란다"며 "염치없이 선처를 바란다"고 말했다.
피해자들도 재판부에 마지막 발언을 청했다.
윤정헌 씨는 "검사님께서 구형한 1년은 제가 보기엔 너무 가볍다. 고병천의 죄를 생각해서 100년, 200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울러 "이 사람(고씨)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수사관이 있고 그들 역시 똑같이 했다"며 "다른 수사관들은 안 나오고 피고인만 나와서 이렇게 재판받는데 보안사 전체의 대표라고 생각한다면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이날 처음 재판에 참석한 피해자 이종수 씨는 "수사관들을 일일이 찾아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지 밤이 되면 잠이 안 와서 6개월 정도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면서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시대상황이 있었고, 죄는 밉지만 인간은 밉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개인적으로 미움도 많이 있지만 아주 복잡한 마음"이라면서 "그보단 이번 재판 과정을 통해 과거의 잘못된 구조가 어떻게 바뀌면 좋을지 생각을 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박박 씨는 "1983년 결혼 4개월 만에 구속되었고, 1988년 출소 이후 일본에 돌아가 재심을 신청한 2010년까지 모국에 오지 않았다"며 "아직도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재판부가 잘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피해자 측 변호사들도 엄벌을 촉구했다. 신윤경 변호사는 "피고인은 당시 사회상황 구조 분위기 말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로 말하지만, 그 구조와 분위기를 형성하고 적극 협조한 자"라고 했다.
이어 "구치소에서 반성문을 쓰신 모양인데, 법원에만 제출했다. 피해자분들 아무도 서면으로 전해받은 사실이 없다. 피해자들에게 반성하고 싶었다면 저희 사무실로 보냈어도 됐는데 법원에만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며 "판사님한테만 잘 보여서 집행유예로 빠져나가고 싶은 전략 아니겠나. 실질적으로 반성과 사과하지 않은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판사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결론을 내보겠다"고 밝혔다.
고 씨 선고공판은 다음 달 28일 오후 2시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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