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살기로 하고 마주한 질문들
순창 동계면에는 니나의 밀밭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이하연 씨가 장기합숙 과정을 마치고 처음 정착해 살았던 주월리에 있는 산 아래쪽 밀밭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동리 버스정류장 앞 가게 자리에 만든 빵 체험교육장 '니나의 밀밭'이다.
이하연 씨는 2016년에 농촌생활학교 9기를 마치고, 그해에 순창으로 귀농하여 '흙건축연구소 살림'의 농촌형 청년공유주택 '더불어 사는 집'(이하 '더집')에서 1년 정도 살았다. 2017년에 독립하여 '니나의 밀밭'을 만들었다. 빵 체험교육을 진행하는 이하연 씨와 첫인사를 나누고, 빵이 발효되는 동안 체험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주월리에 있는 밀밭을 보고 왔다. 처음 정착해 살았던 공유주택 앞에 차를 세우고, 커다란 느티나무가 좋아서 구했다는 첫 번째 농지를 지나서 눈 이불을 덮고 있어 밀이 보이지 않는 밀밭까지 걸었다. 밭의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현재는 염소 방목장으로 쓰고 있는 아래쪽 땅을 포함해서 1000평쯤 된다고 했다.
주월리 밀밭 산책을 마치고, 이동리로 돌아와 조용하고 따듯한 방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역으로 내려가 산다고 했을 때, 누구나 받게 되는 세 가지 형태의 질문들이 있다. 그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고, 그럴 때 생각했던 그의 답변들은 이러하다.
누구나 받게 되는 질문
- 뭐 먹고살 거예요?
"처음에는 제대로 된 전망이 없었어요. '뭐 먹고살 거냐?'는 물음에는 일부러 고민을 안 했어요. 해보지 않고 미리 알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저보다 먼저 귀농·귀촌한 친구들이 있는데 도시에서처럼 직장 다니며 돈을 벌지 않고도 행복하게, 재미있게 살아요. 그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뭔가를 시작해 볼 수도 있겠다' 했죠. 아마 본격적으로 농사짓는 분들을 먼저 봤으면 못하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 친구들을 보면서는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게 아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있겠다, 난 술 빚는 걸 좋아하니까 소읍에서 술 파는 가게나 양조장을 할 수도 있겠다 했죠. 서울에서 공정무역 사회적 기업에서 일했기 때문에 농업이나 식품 관련 사회적 기업들에 대해서도 알았어요. 좋은 물건들이 많아서 상품으로 개발하고 싶다, 거꾸로 공정무역 상품으로 수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죠.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일을 기획하는 게 제 취미예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으니까, 이게 정말 하고 싶은 건지 여러 번 자신에게 묻는 시간을 갖곤 해요."
- 불안하지 않아요?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에서는 미래가 안 보였어요. 한 달에 버는 월급에서 겨우 몇십 만 원 아끼고 아껴서 적금을 들고는 있는데, 이런 식으로 앞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까? 서울에서 사는 건 직장을 빼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거의 단절되어 있어요. 그런데 시골에서 살면, 삶 자체가 다르잖아요. 경제적으로 더 안정적이라는 게 아니라,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그런 것 말고도, 뭔가 지금의 이 삶은 아닌 것 같다고 느꼈어요.귀농에 대한 관심은 그전부터 있었어요. 30대 중반에 장충동에서 했던 귀농운동본부의 도시농부학교 과정을 들었어요. 그 당시 농담으로 건실한 농촌 총각이 이상형이라고 했었죠. 그러던 것이 '더 이상은 도시에서 못 살겠다, 혼자라도 내려가야겠다'가 된 거죠.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올 때 제 나이가 39살이었죠. 몸은 일단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몇 년 뒤에 귀농을 선택하면 그만큼 더 힘이 들겠지. 그러면 차라리 빨리 가서 고생을 하더라도 빨리하자. 한 10년 정도 고생하면, 그 이후의 삶은 그래도 조금 안정적이지 않을까? 그런 일종의 희망과 기대감이 있었어요."
"원래는 내려갈 곳을 정해두지 않고, 한 1년 정도 돌아다니려고 했어요. 일단은 친구들 있는 지역에 머무르면서 염탐하듯이 있어 보기로 했죠. 친구들도 저에게 내려오라고 하면서, 같이 살자고 했지요. 그렇게 다녀 봐도 최종 결론을 못 내리겠더라고요. 그리고 친구 집에 사는 건 장기적으로는 서로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다 순창귀농귀촌센터의 농촌생활학교를 알게 되어 참여하게 된 거죠.
이 과정은 프로그램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거기에서 만난 귀농 선배, 동기들이 좋았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가 있어요. 동아리라던가 이런저런 모임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요. 그런 네트워크가 참 좋았어요. 이런 곳이라면,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자신감이 들었죠. 잘 모르는 다른 지역을 찾는 것보다, 더 고민하지 말고 순창으로 가야겠다. 마침 그때 순창 흙건축연구소 살림이 '더집'을 지었어요. 혼자 마을의 집을 구하기 쉽지 않으니까, 공유주택은 처음 진입하기에 좋은 조건이었죠. 연착륙을 안전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발판이랄까. 그렇게 1년 조금 넘게 거기서 살다가, 지금 이 집으로 독립했죠."
마을살이 2년의 시간
30대 후반의 도시생활자가 농촌지역으로 내려와 직장에 다니지 않고 살아가는 실제의 삶은 어떤 것일까? 삶의 큰 변화일 수 있는 지난 시간과 마을살이 경험에 대해 들어보았다.
- 마을에 깃들어 살기
"여기에서 집을 구한다는 개념은 서울과 달라요. 어떻게 보면 내가 구하는 게 아니라, 마을 분들이 살 집을 구해주시는 거죠. 제가 어떤 사람인가를 지켜보는 거예요. 처음 살았던 공유주택에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 '그 집 아이들'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어요. 마을에서 젊은이들이 내려와 지내는 모습을 좋게 봐주었어요. 회관에서 집들이도 하고, 풍물도 쳤죠. 마을에서도 화답 환영잔치를 열어주었어요. 이렇게 서로 인사를 잘 트니까, 새로 온 사람들에 대한 호감이 생기는 거죠. "이 땅 할래?" 하면서 적극적으로 밭 임대도 알아봐 주셔서, 나중에는 고사할 정도였어요. 아무튼 주월리 살 때는 마을회관에 혼자 가 있어도 마음이 편했어요. 그런데 지금 마을은 또 달라요. 저 혼자 이 마을에 들어온 셈이잖아요. 게다가 이 집은 마을과 동떨어져 있고요. 이사 와서 마을회관에도 두어 번 가봤는데 편하지 않았어요. 일을 돕기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있기도 모호한 거예요. 회관에서 부엌일 하는 나잇대도 아니더라고요. 보통 50, 60대가 젊은 축에 드니까.
지금은 일단 억지로 노력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형태를 생각해요. 재능나눔사업이라고, 재료비를 지원받고 참가자는 무료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때 주요 대상으로 마을 분들을 초청했지요. 부녀회장님, 이장님 사모님들 등. '단팥빵이나 케이크를 좋아하시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건강한 빵을 찾으시더라고요. 직접 빵을 만들면서 무척 행복해했어요."
- 밀밭이 아름다워지기까지
"처음에는 술빚을 누룩 만들 생각으로 밭에 밀을 심었어요. 방치되어 있던 밭이긴 하지만, 농약 피해도 없고, 볕도 좋은 땅이에요. 그 땅에서 비닐을 엄청 걷어냈죠. 고라니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칡이 더 문제였어요. 힘이 달려서 칡뿌리를 뽑아내는 건 불가능했고 칡순을 계속 거두었어요. 하루에 다 못하니까 영역을 정해놓고 했죠. 그렇게 3일 하고 나서 다시 또 시작하고요. 수확할 때까지 칡순 걷는 걸 계속했네요. 그걸로 칡순 차, 칡순 장아찌도 만들었어요. "너희들, 다 장아찌로 만들어주겠어!"
이렇게 매일 밭으로 다니며 일하는 것을 마을 어르신들도 다 보고 계셨죠. 저렇게 농사지어서 어떻게 하려나 혀를 차며 약을 쳐야 한다고 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지지해주는 분들도 있었어요. 원래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도 옛날에 그렇게 농사지었다고 하셨죠. 제가 밀을 키워서 수확하고 마을 회관 앞에서 말렸거든요. 그때 마을 분들이 밀 널어놓은 거 구경하러 오셨어요. 옛날에 젊었을 때 키우고, 안 키운 지 엄청 오래되었다고 하시면서 반가워했어요. 고추장 만들 때, 밀이 들어가니까 키웠는데 요즘은 그냥 사서 한 대요.
밀농사 시작할 때 트랙터가 안 들어가려고 해서 속상했어요. 칡이 많고 돌이 많은 밭이라 기계 망가질까 봐 꺼리신 거예요. 그땐 이해를 못 했어요. 그런데 진짜 기계가 망가질 뻔했어요. 순창에 워낙 돌이 많다는데 이 밭은 그동안 일궜던 땅이 아니라 더 힘들었던 거죠. 비닐 걷어내느라 고생을 엄청 했지만 한편으로는 비닐이 덮여있어서 풀씨가 안 떨어져 있었나 봐요. 덕분에 풀에 크게 치이지 않고 밀들이 잘 자라주었어요. 고생한 보람이 있었죠. 우리 밀밭이 정말 예뻐요. 밀이 자라는 것을 보면 칡을 안 걷어줄 수가 없죠."
- 네트워크가 주는 힘
"내려와서 '더집'에서 살던 첫해에는 일부러 할 일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즐겁게 살았어요. 농사도 시작했지만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죠. 그때 제가 '집 요정'이라고 불렸어요. 낮에 아무도 없는 집에 있으며 책도 보고 빵도 만들고 했죠. 요리해서 사람들 돌아오면 먹이고.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기에요. 긍정 에너지가 마구 넘쳐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 뒤로 좀 힘들었고, 지금은 균형 잡힌 안정기라고 할 수 있죠.
하고 싶은 일을 해볼 수 있었던 건,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있어서예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일단 다 말로 던져볼 수 있었어요. "나 보리밭에서 해금 연주하는 음악회 열고 싶어", "나 디제잉 파티 해 볼래", "마을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연극 공연을 불러와 볼까?" 이렇게 일을 벌이면, 표를 팔아준다든가, 행사에 필요한 일을 맡아준다든가 하면서 함께 일을 마무리해 나가요. 그러니 마음껏 이야기해볼 수 있는 거죠. "나 이거 해보고 싶어!" 이런 게 바로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느슨한 공동체. '비빌 언덕'도 그런 거고요.
그런데 내 공간이 생기기까지 힘이 들기도 했어요. 여성이자 가족 없이 혼자 온 제가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거예요. 농사일이라든가, 이사라든가, 기계를 쓰는 일들에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야 했어요. 자꾸 부탁하는 것도 쉽지 않죠. 그래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더 늘려보자고 했어요. 지금은 이 공간이 생겼고, 어쨌든 빵은 드릴 수 있으니까요. 내가 사서 주는 게 아니라 만들어서 줄 수 있는 게 생겼으니까. '모든 삶이 내 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힘든 거구나.'"
니나의 밀밭에서 꿈꾸기
보리밭 음악회를 했던 밭에서는 풀과의 전쟁으로 농사를 망쳤다고 했다. 망한 농사 외에도 힘든 일은 있었다. 공유주택에서 여럿이 사는 것도, 독립하고 싶을 때 살 집을 구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마침내 나온 집을, 집 내부도 보지 않고 덜컥 임대계약을 해놓고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리를 해야 할지 몰라 손 놓고 수개월을 그냥 있기도 했단다. '니나의 밀밭'은 현재 깨끗하게 페인트칠 된 벽과 큼직한 빵 반죽을 할 수 있는 작업대가 있고, 전문 빵가게에서 봤던 벽을 반절 채울 만큼 큰 오븐도 자리 잡고 있다. 이하연 씨의 현재이자 가까운 미래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았다.
- 체험과 문화
"워낙 내려오기 전에도 가양주 만들기나 천연 발효빵 만들기에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빵 만들기 체험교육을 하게 될 줄은 몰랐죠. 이 공간을 임대할 때 이곳이 건축법 상 식당이나 카페, 양조장, 빵집 등의 영업을 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다 수리를 위해 창업지원금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창업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농가주택에서 체험교육은 할 수 있더라고요. 내 작업을 하면서 체험 신청이 들어오면 그때만 하면 되고요.
이 일에 저는 참 만족해요. 제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알려주는 걸 좋아하고요, 또 이런 문화를 확장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집에서 빵도 만들고 술도 만드는 것이 집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면 해요. 제가 술 빚는 거 배울 때 보니까, 그 과정이 복잡했어요. 빚게 되는 술의 양도 혼자 사는 저에겐 너무 많았어요. 양에 맞춰 도구들도 다 새로 마련해야 했지요. 그래서 1인 가구에 맞게 자기 집에 있는 부엌 도구들로 술을 빚을 수는 없을까 고민했죠. 두물머리에서 1인 가구를 위한 술 빚기 워크숍도 한 번 해봤답니다.
올해는 체험교육이 중심이 되니까, 농사는 밀농사만 지어도 바쁠 것 같아요. 이 집에 딸린 텃밭에 집중하려고요. 허브랑 루꼴라. 갓, 상추 등을 심어서 빵과 함께 샐러드 만드는 것을 체험 프로그램에 포함했어요. 체험신청은, 아직까지 주변 사람들이 많아요. 또 제 개인 페이스북에서 홍보를 하고 있어요. 체험비는 최소 인건비를 정하고 인원에 따라 약간의 조정을 했어요. 반죽을 준비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사람들이 가고 난 후 정리도 해야 하니까 사실 체험 전후 24시간이 소요되지요."
- 확장의 유혹
"앞으로의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물론 언젠가 집도 짓고 싶고 밀농사도 더 크게 할 거예요. 작업장도 넓히고 싶지만, 사실 지금도 감당이 안 되거든요. 체험신청 인원이 많으면 정신이 없죠. 근데 여러 가지로 유혹이 많아요. 체험을 하려면 인원을 많이 하라는 거지요. 2명에서 7명 정도의 적은 수는 오히려 신청이 잘 들어오지 않아요. 차라리 20명 이상의 단체면, 신청도 잘 들어오고 체험비도 크게 늘어나는 거예요. '뭐가 좋은 거지?' 고민이 되어요.
어쩌면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규모를 키울 상황이 안 되니까. 참, 고용을 창출하고 싶기는 해요. 그런데 규모가 커지면 매일 빵 만드는데 내 시간을 다 보내야 하겠지요. 규모를 키우는 것을 도와주는 이런저런 창업 지원이 많은데, 그 눈먼 돈을 못 받는 게 바보라고도 해요. 맞아요. 뭔가를 크게 벌일수록 지원받을 가능성도 많아져요. 그런데 그렇게 규모를 키우고 나면, 내 삶은 어떻게 바뀔까요?"
- '1인 여성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힘들 게 분명해요. 그래도 괜찮다, 상관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힘은 필요하죠. 며칠 전 밤 12시에 누가 문을 두드렸어요. 얼굴만 아는 동네 형님인데, 그냥 얘기할 것이 있어서 왔다는 거예요. 당황했지만, 다음 날 다시 오시라고 하고 보냈어요. 이 집에서 혼자 살기로 했을 때, 다들 "무섭지 않아? 여자 혼자 사는데...", "괜찮겠어?" 했어요. 집 앞면이 유리문이고,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잖아요. 그렇다고 마을 안쪽에 살면 안전한가요? 저는 '조심'할 필요가 없어요. 자신의 행동을 조심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잖아요. 이 사건에 대해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제게 이런 이야기가 돌아오더라고요. '나는 네가 너무 걱정이 된다.' 그런데 이건 내가 위축되고 조심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대처하려면, 자존감이 굉장히 중요할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하연 씨와 나눈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혼자 지역에 내려가 사는 삶의 한 형태를 보여준 그에게서 배운 것은 '무엇을 할지 정하기보다 무엇이든 해볼 여유를 스스로에게 준 것'과 '누가 조심해야 할 사람인가'라는 질문이다.
순창에서 돌아온 이후, 임순례 감독의 새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일본 만화가 원작으로, 한 여성이 시골 외딴 고향집에 내려와 농사짓고, 요리해서 먹는 게 주요 내용인데, 일본에서도 영화로 제작되었다. 한국판에서는 주인공이 진돗개를 키우고, 집 가까이에 친척과 친구들이 사는 것으로 바꾸어야 했다. 감독은 '관객이 기본적으로 안고 있을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러한 한국적 현실을 반영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언제쯤일까? 그 변화는 어떻게 시작될까? 이런 질문이 밀려드는 것처럼, 새로운 흐름도 이미 생겨나고 있을 것이다. 올해도 주월리 밀밭에서는 황금빛 밀이 바람에 흔들리고, 이동리 밀밭에서는 구수한 빵 익는 냄새가 퍼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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