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인권 관련 공문이 오면, 그냥 싫어요.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공람하면 선생님들도 귀찮아서 대충 읽어요. 학생 인권은 학생들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거잖아요. 교권은 어디서 보호를 받나요? 어린데다 판단력도 없는 학생들이 제멋대로 하자는 게 '학생 인권' 아니에요?"
학생 인권과 관련해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때 언제나 듣게 되는 교사와 학교의 불만이다. '인권'은 불편한 주제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명제에는 공감할 수 있어도, 막상 '인권' 문제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연결되면 이런 저런 이유로 불편하다.
흑백 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대공황 시대 미국에서는, 흑인이 백인과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건 고사하고 마시는 물과 교통수단까지 차별 대우를 받았다. 유럽은 유대인에 대한 혐오로 인해 히틀러 정권이 등장했고, 끝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불러왔다. 군국주의 시대 일본은 우리 민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강제하며 어린 소녀를 일본군의 성 노예로 끌고 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은 모든 분야에서 흑백을 분리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악명을 떨쳤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인종차별과 혐오로 인해 무수히 많은 소수자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1987년 이전 군사독재시절, 길거리에서 다 큰 성인이 경찰에 붙잡혀 머리카락을 잘리거나, 출근하던 직장 여성이 치마가 짧다는 이유로 경찰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불량해 보인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박종철, 이한열, 노수석 등, 그 시대에 고문과 국가 폭력으로 희생당했던 젊은 청춘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는 적지 않은 인권의 사각지대가 있었다. 불명예스럽게도 학교 또한 그 사례의 하나로 꼽혀왔다. 학창시절 교사에게 맞은 얘기는 군대에서 축구하고 기합 받았다는 얘기만큼이나 흔한 '슬픈 무용담’이었다. 학생들은 아침에 교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무방비 상태로 생활부장과 선도부 등으로부터 몸수색과 가방수색을 당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지각했다고 추운 겨울에 '오리걸음'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교복이 흐트러졌거나, 머리가 길거나, 흰 양말에 무늬가 있거나, 이름표가 제 위치에 있지 않기만 해도, 귀싸대기를 맞거나 '엎드려뻗쳐’ 같은 군대식 얼차려를 당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학생이 수업 중에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교사로부터 빗자루나 출석부, 대걸레, 야구방망이 등 다양한 도구로 '매타작’을 당하는 곳이 학교였고, 그런 인권 유린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우리나라 학생 인권의 현실에 대해, 체벌이 허용되고 학교생활에서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자의적인 기본권 제한이 이루어지고 있다면서, 아동권 보장에 대한 권고를 1996년과 2003년 두 차례나 제기한 바 있다. 2007년에는 '초·중등교육법'에 학생인권 보장 의무 조항이 신설되기도 했다. 그리고 1월 26일은, 학생의 인권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있는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 여섯 돌이 되는 날이다.
2010년 진보교육감이 당선된 뒤, 시민들은 군사독재 시대에나 있을법한 억압적인 '학교규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아무리 학생의 신분이더라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인간의 기본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청구하였고, 서울시의회는 전국 시도 가운데 세 번째로 이를 통과시켰다. 학생에 대한 체벌과 차별을 금지하고, 개성의 실현을 보장하며, 양심과 종교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한 것이 '학생인권조례'의 주요한 내용이다.
'학생인권조례' 통과 이후 일부 학교에서는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교사의 권위를 무너뜨렸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당시 보수적인 교육부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학교규칙의 제정 과정에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무력화시키고 학교의 장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그럼에도 '학생인권조례'의 존재와 그 내용은 점차 학생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있고, 학교에도 정착해가고 있다. 이제는 학생들도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난 2016/2017년 겨울, 광화문 광장의 촛불 집회에 나온 어린 학생들의 발언을 들으면서, 나는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동료처럼,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해맑음과 주눅 들지 않은 건강한 비판은 너무도 대견했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는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일부 보수 단체는 최근 '학생인권조례' 무효 소송과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그들이 소를 제기한 이유는, △국회에서 제정한 법이 상위법이므로 지방의회에서 의결한 조례는 국가 사무를 다룰 수 없다는 주장과, △조례가 종교를 이념으로 설립한 미션스쿨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례는 행정관청의 명령과 달리, 주민의 대표기관인 지방의회의 의결을 통해 제정되는 지방자치단체의 자주법인 만큼, 법령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의 권리의무에 관한 사항을 얼마든지 조례로 제정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지금까지 침해당해오던 학생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므로 보수 단체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이런 사항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국가인권위원회는 26일 다음과 같은 결정을 보내왔다. 전문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회 결정: 학교생활에서의 학생인권 증진을 위한 정책 개선 권고
국가인권위원회는 학교생활에서의 학생인권 증진을 위해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1. 교육부장관은,
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시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학교규칙 구성의 기본원칙'을 참조하여 학교규칙 운영 매뉴얼을 마련하고, 이를 각 시·도 교육청에 배포하기 바람.
나. 학교규칙 제·개정 시 학생의 의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초・중등교육법' 제31조,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제4항, 제59조의4를 개정하기 바람.
2. 17개 시・도교육감은,
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시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학교규칙 구성의 기본원칙'을 참조하여 각급 학교의 학교규칙을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고, 모범 규칙을 발굴하여 각급학교에 시행하기 바람.
나. 학생인권 보호를 위해 교육청, 각급학교 등에 학생인권 침해 시 권리구제 기능을 전담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담당자나 학생인권기구 등을 설치하기 바람.
다. 학교구성원인 학생, 교원, 학부모에 대하여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에 기초한 학생인권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기 바람.
학생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학생인권조례'를 흔드는 일, 이제 그만들 하시라!
(1월 26일은 '서울학생인권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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