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는데, 여전히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내 혀가 그녀의 앞니를 건드렸고, 아직 입술에는 그녀의 입술에서 느껴졌던 맛이 남아 있었다. 왠지 붉어진 얼굴에 정신은 멍했고, 잠시 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그대로 나에게 안겼다. 그녀가 내 허리에 팔을 두르자 나는 그녀의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 '토끼의 아리아' (단편집 <토끼의 아리아>(곽재식 지음, 아작 펴냄)에 수록).
주인공은 맥주가 담긴 플라스틱 통을 늘 갖고 다니면서, 수시로 한 모금씩 마신다. 그게 의사의 처방이란다.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대학원을 마치고 대기업 연구소에 취업한 주인공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연구소는 회사가 세금을 피하는 방편이었다. 외부 이미지와 달리, 업무량은 살인적이었다. 그렇게 퇴근을 포기하고 일하다보니, 어느새 실적이 쌓였다. 일본 회사가 그를 눈여겨봤다. 스카우트 제안이 왔다. 바로 그날 저녁, 국가정보원 수사관이 집에 들이닥쳤다. '기술 유출' 혐의.
"하여간 배운 놈들이 더한다니까. 더러운 놈, 우리나라 기술을 외국에 빼돌려 네 뱃속만 채우려고 해?"
맙소사, 주인공은 그저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뿐이다. 함께 구속된 최 박사의 설명.
"연구소를 다른 회사에 M&A 형식으로 팔려고 하고 있나봐. 그런데 연구원들이 다른 데로 빠져나가면, 연구소가 값을 제대로 못 받잖아. 그래서 연구원들이 딴 데로 못 빠져나가게 하려고 일단 본보기로 우리부터 집어넣고 보나 봐."
결국 주인공과 최 박사는 한국 기술을 일본에 팔아넘기려던 '매국노'로 보도됐다. 관련 기사가 뜸해질 쯤, 그들의 회사 회장은 연구소를 일본 회사에 팔았다. 주인공을 스카우트 하려던 바로 그 회사다. 그러자 언론은 국내 기술력을 외국에서 인정받고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며, 회장을 찬양하는 기사를 쏟아낸다. 요컨대 돈을 받고 기술을 일본에 넘긴 건 회장이다. 그런데 회장은 영웅이 됐고, 기술을 개발한 이들은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소설 도입부의 키스 장면은 왜 나왔을까. 주인공은 왜 늘 맥주를 홀짝거릴까.
그건, 소설을 마저 읽으면 알 수 있다.
'산업 스파이'라더니, 전원 '무죄'
과학기술 연구자가 그저 스카우트 제안을 받거나, 헤드헌터를 만났을 뿐인데 범죄자로 몰리는 상황. 반면 그들에게 누명을 씌운 기업인은 찬사를 받는 장면. 꼭 소설 속 설정만이 아니다.
최근에도 중요한 판결이 있었다. 기소 이후 원심 확정까지, 7년 9개월이 걸린 사건이다. 대법원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술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코리아(AMK) 임직원 18명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지난해 11월 14일 확정했다. AMK는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생산업체 AMT의 한국지사다. 기소 이후 원심 확정까지, 7년 10개월이 걸렸다.
서울동부지방검찰청은 지난 2010년 2월 이들 18명을 기소하며, 95건의 자료가 불법 유출됐고 이 가운데 40건은 국가 핵심 기술이라고 밝혔다. 삼성 직원이 AMK를 거쳐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로 반도체 기술 자료를 넘겼다는 것.
당시 검찰은 간접 피해 규모가 수조 원대라고 했다.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고, 평범한 직장인이던 18명은 '범죄자', '산업 스파이'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반대쪽을 가리켰다. 이들이 유출했다는 자료는, 삼성 측이 비밀로 분류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관련 엔지니어라면 당연히 알만한 내용, 예컨대 공개 논문이나 강의 자료도 포함돼 있었다.
무죄 판결엔 조용한 언론, 그들의 7년 10개월은 누가 보상하나
지난 2010년 2월, 검찰 기소 당시엔 온갖 매체가 기사를 썼다. 검색하면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가 줄줄이 뜬다.
"[사건추적] 한국서 쫓겨난 '반도체 스파이'…미 본사 부사장 승진 왜" (2010년 2월 5일자 <중앙일보>), "삼성전자, 너 마저? : 삼성전자 기술유출의 전말" (2010년 2월 5일자 SBS뉴스), "'삼성 반도체 비밀' 6년간 넓고 깊게 빼갔다" (2010년 2월 3일자 <한겨레>)….
하지만 지난해 11월, 대법원의 무죄 확정 직후엔 기사가 아예 없었다.
약 한 달 뒤인 지난해 12월 11일에야, <매일경제신문>이 '단독' 기사를 냈다. "'삼성반도체 기술 유출' 다툼…하이닉스 7년 만에 무죄 확정"이라는 제목이다. 이 매체를 인용한 기사가 있지만, 고작 몇 건이다. 대부분 건조한 제목이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은 18명 입장에서, 사건을 돌아보자. 기소 당시 그들을 범죄자로 몰았던 보도는 대중에게 깊이 각인됐다. 하지만 무죄 판결 소식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들의 상처, 그들이 잃어버린 7년 10개월 세월은 누가 어떻게 보상하나.
유독 '억울한 기소'가 잦은 기술 유출 사건, 왜?
'무죄 추정 원칙'을 무시한 보도 행태로 상처 입은 사례, 어차피 많았다. 그런데 기술 유출 사건 관련 보도는 다른 특징이 있다. 윤건일 <전자신문> 기자가 쓴 <도난당한 열정>에 따르면, 2000~2009년 10년 동안의 기술 유출 사건에 대한 1심 무죄 선고 비율은 11.95%였다. 이는 같은 기간 전체 사건의 1심 무죄 선고 비율(0.19%)의 63배에 이른다.
기술 유출 사건은 유독 억울하게 기소되는 비율이 높다는 뜻이다. 기술이 유출돼 피해를 봤다는 기업의 주장을, 수사기관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과 맞물려 있다.
지난 2007년 5월, 15조 원대 와이브로 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려던 포스데이타 연구원들이 구속 기소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쓴 기사였다. 하지만 당시 보도는 기초적인 논리부터 어긋나 있었다. 당시 포스데이타의 한 해 매출은 3000억 원대였다. 자산 총계는 2701억3800만 원, 자본금은 407억 7600만 원 규모였다. 요컨대 이 회사에서 유출됐다는 기술의 가치가, 이 회사 전체 자산 가치보다 월등히 크다. 무려 55배 이상. 이게 말이 되나. 인터넷 검색 한두 번으로 잡아낼 수 있는 오류가 그대로 통했다.
포스데이타의 와이브로 기술은 결국 어떻게 됐나. 포스데이타는 2009년 9월 와이브로 사업을 중단했다. 2004년부터 그때까지 와이브로 사업으로 일으킨 매출은 약 200억 원이었다. 15조 원대 기술이 유출됐다는 검찰 측 발표는, 피해 규모를 부풀려야 유리한 기업 측 입장에 치우쳤다.
반도체 기술을 중국에 빼돌렸다고?
수사 및 재판, 그리고 언론 보도 과정에서 기술 유출 피해를 주장하는 기업의 입장을 검증 없이 수용하는 행태는, 지금도 비슷하다.
"삼성電 전무, 中에 반도체 기술 빼내다 퇴근길 발각" (2016년 9월 22일자 <머니투데이>)
"삼성 반도체 핵심기술 또 유출시도…철통보안 어떻게 뚫렸나" (2016년 9월 22일자 <조선비즈>)
"삼성전자 임원, 핵심기술 빼돌리려다 덜미" (2016년 9월 22일자 <경향신문>)
기사 내용은 천편일률적이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반도체 부문 품질담당 전무 이모 씨가 중요 기술 자료를 유출하다 적발돼 기소됐다는 내용이다. 이후 이 씨는 징계위원회 회부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눈에 띄는 건, 이들 기사 가운데 상당수가 이 전 전무가 '중국 업체'에 기술을 넘기려 했다고 단정한 점이다. 과연 그랬나. 검찰의 공소사실을 포함한 재판 기록을 살펴도, 이 전 전무가 '중국 업체'와 접촉했다는 내용은 없다. 중국에 반도체 기술을 빼돌렸다는 보도는 어떻게 나왔나?
헤드헌터는 왜 조사 안 하나
이 전 전무가 지난 2016년 3월 헤드헌터 김모 씨를 만난 적은 있다. 그러나 김 씨는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이 전 전무와 이직 관련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고 밝혔다. 또 김 씨는 이 전 전무와 점심 시간에 한 번 만났을 뿐, 그 뒤론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게다가 헤드헌터 김 씨는 "반도체 분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그 분야의 인재를 담당하는 헤드헌터도 아니"라고 밝혔다. 검찰은 이런 사실을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김 씨는 금융 분야를 주로 다룬다고 한다.
검찰은 헤드헌터 김 씨를 기술 유출의 핵심 고리로 지목했다. 이 전 전무가 김 씨로부터 소개받은 업체에 기술을 넘기려 했다는 게다. 그렇다면, 김 씨도 조사하는 게 자연스럽다. 게다가 이 전 전무 측 역시 김 씨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 그래야 이 전 전무에게 제기된 의심이 풀린다는 게다.
하지만 김 씨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전 전무를 기소한 검찰은 그가 '누구에게', '어떻게' 반도체 기술을 넘기려 했는지에 대해선 공백으로 남겼던 셈이다.
임원도 직원처럼 엄격한 보안 검색?
결국 1심 법원은 지난 12일 이 전 전무에게 적용된 기술 유출 관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삼성전자의 일반 직원들은 출퇴근할 때 차에서 내려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임원들은 차를 탄 채 사업장 안에 들어갔다. 외부 회의 참석이 잦은 임원들은 업무 자료를 차에 싣고 나가는 게 허용됐던 것. 하지만 삼성전자 측은 재판 과정에서 임원에게도 직원처럼 엄격한 보안 검색을 한다고 주장했다. 외부 회의에 참석하는 임원이 자료 없이 빈손으로 회사를 나간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선 전직 삼성 임원의 반박 증언이 있었다. 임원에 대해선 직원처럼 엄격하게 보안검색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법원은 이 같은 반박 증언의 손을 들어줬다. 삼성 측이 재판 과정에서 거짓 증언을 한 셈이다.
게다가 임원들은 24시간 업무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택용 노트북PC와 휴대폰, 타블렛 등을 지급받았다. 이들 기기를 통해 회사 밖에서도 회사 서버에 접속할 수 있었다. 이 전 전무가 정말 반도체 기술을 유출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이들 기기의 화면을 촬영해서 넘길 수도 있었다. 굳이 회사에서 자료를 출력할 필요가 없었다. 아울러 법원은 이 전 전무가 자료를 반출한 목적이 병가 이후 업무 복귀 준비를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인정했다.
'의심의 균형'이 깨진 수사, 왜 회사는 의심하지 않나?
수사기관이 던지는 의심은 균형을 갖춰야 한다. 임직원이 사익을 위해 회사 기술을 유출했을 가능성을 의심한 만큼, 회사에 대해서도 의심해야 한다. '의심의 균형'이 깨진 수사는 공정하지 않다.
회사도 때론 임직원에게 누명을 씌울 동기가 있다. '반도체 굴기'를 내세운 중국은 한국의 반도체 전문가 영입에 공을 들인다. 국내 엔지니어들이 이직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전 전무가 갑작스레 구속되고, 관련 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삼성전자 측은 엔지니어들을 단속하는 효과를 누렸다. 아울러 고위 임원에 대해선 느슨했던 보안 검색 역시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전 전무 사건은 기술 유출 말고 다른 쟁점도 있다. 향후 재판 결과는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1심 재판 과정에서 삼성 측이 거짓 증언을 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건 사실이다. 적어도 기술 유출 혐의에 대해선, 검찰 측 주장에 억지가 많았다. 삼성 측 입장을 기계적으로 수용한 탓으로 보인다.
앞서 소개한 여러 기술 유출 사건과 닮은꼴이다. '의심의 균형'이 깨진 수사, 회사 측 입장만 반영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 긴 재판 과정에서 '기술 유출' 누명이 벗겨지는 상황.
경제권력에 관대했던 법원과 검찰, 그 역시 '적폐'다
최근 법원과 검찰의 적폐를 씻어내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난 정부 시절, 법원행정처가 사실상의 '법관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사실도 드러났다. 아울러 정치적인 사건 판결을 앞두고 대법원과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긴밀하게 연락한 정황도 확인됐다. 사법부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는 관행은 깨져야 한다. 그 시동이 걸렸다.
그런데 법원과 검찰의 적폐가 고작 그뿐인가? 아니다. 경제권력 앞에선 균형이 깨졌던 역사도 있다.
적폐 청산 목소리가 높지만, 재벌 등 경제권력에 너무 관대했던 적폐에 대해선 말이 없다. 과연 이래도 되나.
언론에 대한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현 정부와 수구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보도에 대해선,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대체로 타당한 비난이다. 그러나 대기업과 개인 사이에서 공정성을 놓친 보도에 대해선 조용하다.
기자를 '기레기'라고 조롱하는 분위기, 받아들이겠다. 언론이 그간 잘못한 게 많다. 그러나 여기서도 균형은 지켜야 한다. 현 정부와 수구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보도를 비난하는 만큼, 대기업에 너무 치우친 보도 행태 역시 비난하는 게 옳다.
글머리에 소개한 소설 '토끼의 아리아'는 과학자이며 회사원인 곽재식 작가가 지난 2006년에 발표했다. 당시 드라마로도 각색돼 MBC <베스트극장>에서 방영됐다. 12년 전에 나온 소설 속 묘사가 오늘자 신문 기사 같다. 그 역시 적폐 탓일 테다. 기업의 입장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관행, 이젠 깨야 할 적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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