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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나를 중심으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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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나를 중심으로 출발한다

[이야기 聽] ② '이야기 듣는 길' 그리고 '이야기 담는 집'

화가 김정헌의 '이야기 청(聽)'을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김정헌은 '경청'을 통해 노인들의 삶과 이야기에 주목할 것을 사회적으로 제안합니다. 그는 '서사적 인격'의 맥락에서 노인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시대, 그리고 마을의 소중한 기록이자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그 경청의 주체로서 청년들을 등장시켜 세대 사이의 소통과 공감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화가 김정헌이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이야기 청' 프로젝트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

인류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소멸했다.

개인이나 가족에 얽힌 작은 이야기들-미시(微時) 서사부터 부족이나 국가 같은 큰 집단의 거대 서사들-신화, 전설 등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성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나를 중심으로 한 미시 서사로부터 출발한다.

예술의 기원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브라이언 보이드는 예술을 '이야기'와 동일 선상에 놓고 설명한다. 특히 만들어진 이야기인 픽션에는 예외 없이 가상의 세계와 상상력이 작동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나와 같은 시각예술 작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거대하고 스펙터클한 그림이 경탄을 자아낼 수도 있지만 관객은 작고 소소한 그림에서 더 큰 감동을 가질 수도 있다.

모든 노인들의 살아온 이야기는 기억을 소환하여 실제와 같이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은 현재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남은 생존에 맞추어 재가공 된다. 어떤 기억이 희미하거나 망실된 부분은 현저히 자신의 처지에 맞추어 가공된다. 그러나 대부분 노인들의 이야기는 그 자신만이 가지는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야기는 회한과 슬픔으로 가득 차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또 다른 노인들은 이야기 도중에 흥이나 노래와 춤을 추기도 한다. 이런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술가들이 자기의 작업으로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 청'에 젊은 예술가들의 참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이런 제안을 하게 된 데에는 작년에 내가 개인전을 했던 '아트스페이스 풀'이 연관되어 있다. '아트스페이스 풀'(이하 '풀')은 알려진 대로 대안공간이며 젊은 미술가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나처럼 늙은(?) 화가는 전시회를 잘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런 데서 내가 전시하기를 원한 것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기질 때문인데, 기존 화랑의 돈 냄새가 싫어서이기도 하지만,(기존 화랑에서 나에게 먼저 제안을 해 오지도 않아서였다가 맞을지도 모른다) 젊은 미술가들과의 어울림이 나의 그림에도 생기를 주기 때문이다.

'풀'은 매년 젊은 미술가들을 공모해 지원자 중 3~4명을 뽑아 1년 동안의 워크숍이나 숙의 과정을 거쳐 매년 말 전시회를 열어준다(이를 '풀랩' 공모전이라고 한다). 모든 예술 판이 다 그렇듯이 미술판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풀랩'에 한 해에 약 200여 명 정도가 지원한다고 하니, 미술판의 실정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래서 내가 이 공모 프로그램에 매년 1000만 원씩을 지원하고 있다. 젊은 미술가들에게서 얻는 생기와 영감을 이 자그마한 지원으로 보답하는 셈이다.

이 프로그램을 마친 젊은 작가들과 같이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이야기 청' 활동을 제안하게 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나의 설명을 듣고 '이야기 청'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 '풀랩' 1기 작가들을 중심으로 마침 성북동에 '선잠52'라는 자그마한 문화공간을 만든 황지원·이원재 부부의 합세로 이 노인이야기 구술과 젊은 작가들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가 성사되었다.(이원재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은 나와 함께 활동한 오랜 동지다. 그는 지금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에서 활동 중이고 일찍 성북구를 중심으로 지역 문화 활동을 해왔다)
이외에도 이 프로젝트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주로 성북구에서 활동하는 지역 작가들과 노인 구술을 전문적으로 시도하려는 젊은 민속학자 등이 합류하면서 6개월여 걸친 일정이 진행되어 지금 그 결과물들이 전시 중이다. 그들의 작업을 차례로 이 지면에 소개하고자 한다.

ⓒ김정헌

무진형제의 '태각'

'무진형제'는 정무진, 정효영, 정영돈 삼 남매로 이루어진 팀이다. 이들은 각각 문예창작, 조소, 사진을 전공했다. 이들은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낯설고 기이한 감각과 이미지를 포착해 우리 삶의 새롭고 낯선 지점을 조명한다. 우리 삶에 깊이 감춰져 있던 신화나 전설의 이야기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역사적 탐색, 고전 텍스트의 재해석 등을 영상 언어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이들은 이번에 노인 참여자들에게 각자의 '태몽'과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 후 태몽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예를 들면 동물, 과일 등)을 자유롭게 그리게 하고, 이를 성북동에서 오랫동안 도장집을 운영한 주인에게 부탁해 고무인장을 만든다, 참여 노인들은 각자의 태몽과 삶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인간의 삶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을 한다. 흔히 태몽 같은 노인들의 이야기를 다른 노인들과 젊은 예술가들이 이를 함께 소통하고 공유함으로써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적인 서사로 바꾸어 나간다.

ⓒ김정헌

신정균의 '은신술 특강'

신정균 작가는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개인과 사회가 맞닿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일상에 존재하는 상징과 그 안의 단서들을 찾아보고 있다. 그는 이번에 특수임무 유공자회 소속의 노인이 주체가 되는 강좌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소위 'HID'라 불리는 북파공작원은 이름이나 군번, 뚜렷한 부대 명칭 없이 비밀 활동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들은 국가로부터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 사회적 갈등을 겪어왔다.

이들이 과거에 경험한 특수 훈련의 상당 부분은 발자국이나 채취 등의 흔적 제거나 잠복과 같은 몸을 숨기는 활동이었다. 작가는 이들의 노하우 요령 등의 전수 활동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스스로를 감추고 가리는 행동 양식을 이야기함으로써 잊힌 과거의 경험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시간을 기대한다. 이를 통해 노인 스스로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동시에 젊은 세대에게는 분명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고찰해 볼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북파공작원과 관련된 대형사건으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실미도 사건'이 있다)

실제로 워크숍 때 이 북파공작원 출신 노인이 '선잠52'에 와서 은신술 특강을 직접 했다.

ⓒ김정헌

강기석의 '기념극 퍼포먼스'

강기석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자아의 탐구 과정을 작품의 중심주제로 놓고 여러 매체를 활용해 작업한다. 작가는 수개월 동안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 앞에서 노인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작가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들게 했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반복하기,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지만 어떤 이야기는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인'이라는 계층은 언젠가 나도 경험할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그 존재만으로 하나의 목소리이면서 인격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과정을 수개월에 거쳐 이야기를 듣고 알아가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들려주어야 할 당위를 갖게 되었다.

그는 워크숍 전에 개인전 형식으로 이 자기의 목소리 퍼포먼스를 가진 바 있고, 이를 이번 전시에서 영상으로 제출했다.

ⓒ김정헌

박건희의 '듣기 위한 거리'

박건희 작가는 마음의 상처와 치유의 과정에 집중하고 있는 상담사이며 임상심리사다. 그리고 미술작업을 동시에 하는 프리랜서 작가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행위다. 그러나 만약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한다는 데 주안점을 둔다면 그것은 특별한 '무엇'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특별한 무엇을 위해 어디쯤 서 있으면 좋을까?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적정한 거리란 얼마만큼일까? 그래서 누구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무수히 많은 요소에 따라 그 거리는 달라질 것이다. 작가에게 노인이란 부정하고 싶은 미래이며 그래서 거리 두기를 하는 대상이다. 그들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 나아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도전이며 실패를 감수한 모험이 된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이번 박건희 작가의 퍼포먼스는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를 두고 있던 대상과 그리고 낯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서로의 적절한 거리를 가늠하고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거리를 찾는 과정이 이번 퍼포먼스로 보여준 것이다. 가까워도 안 되고 멀어서도 안 되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이 이 '소통의 거리'에도 적용된 것이 아닐까?

ⓒ김정헌

이은희‧정혜원의 '내 이름은 ○○○입니다'

이은희 작가와 정혜원 작가는 각각 시각예술과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영상작가들이다. 이들은 여성 노인이 가진 이름과 그들의 사연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참여하신 여성 노인들과 함께 그들의 삶의 내력을 공유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들은 참여 노인네들과 다과상에 둘러앉아 그들의 이름, 별명, 호칭에 관한 일화를 통해 자신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다 현대무용 안무가 주혜영을 초대하여 오갔던 대화와 이야기를 몸으로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다. 워크숍을 통해 평소에 해보지 않았던 움직임을 해보고 일상 속 즐거움을 공유하게 했다. 타인의 추억과 기억을 함께 공감하는 시간을 갖고, 그들이 그린 그림을 두루마리 그림으로 인쇄해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짤막한 대목을 같이 프린트해 전시했다.

ⓒ김정헌

노오력탐방단의 '노인과 (긴장한) 우리 사이'

소준철, 이민재, 최혁규로 구성된 '노오력탐방단'은 사회학, 민속학, 문화연구를 하는 소장 학자 팀이다. 이들은 노인들의 노력(그들 방식으로는 '노오력'으로 표기한다)을 추적하고 탐방하여 주로 구술 채록을 하며 논다. 그들은 노인들을 찾아가 일하고 밥 먹고 수다 떨면서 노인의 생활양식을 기록한다.

이들은 성북구의 한 경로당에서 노인들을 만나며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소일거리를 하고 수다를 함께 떤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아 이 현장을 기록하고 정리한다. 이렇게 생산하고 수집한 연구 자료들을 모아 그들의 서로 간의 관계, 그들과 경로당과의 관계, 자기들과 그들의 관계를 여러 가지 사회적인 관계망으로 추적하고 분석한다.

전시에는 그동안 노인들의 추적 경로를 담은 자료들과 그들이 분석한 과정을 내보인다. 이들의 작업은 노인 구술의 정수가 될 것이다.

ⓒ김정헌

이 작가들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인들과의 접촉 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있었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50년을 붙박이로 살아온 이장재 선생의 정릉동 이야기를 '이야기 청'에 관계된 젊은 작가들이 집단으로 청취하였고, 이야기 구술전문가인 최현숙 선생을 모셔 노인 구술에 대해 이야기를 같이 나누었다.

또한 워크숍 기간에 노인과 함께 예술 활동을 해 온 다른 작가들의 사례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클리라멘의 '망우방 : 삶을 이야기 나누고 금심을 덜어내는 방', 작업장봄의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인천이야기', 예술공동체 스케네의 '청춘랜드 그림책 관람차' 등이 자신들의 사례와 경험을 발표하였고, 이 자리에 이야기 손님으로 나와 최현숙 선생이 자리를 같이했다. 이외에도 이야기 청의 이번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시민자치문화센터의 김재상, 유진호 등 청년들의 참여와 공로가 컸다.

세상 어디에서나 이야기가 존재하고 계속되듯이, 이야기 청의 작업은 이번 프로젝트 이후에도 세상 곳곳에서 계속될 것이다. 이야기 청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서사적 인격'들이 함께 마주하고 공감하며 협력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마을 곳곳에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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