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1일 김명수 춘천지방법원장을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했다. 오는 9월 24일 6년 임기가 임기가 끝나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후임이다. 이번 대법원장 지명의 의미는 각별하다.
첫째, 지난 9년간 보수 정권에 의해 법관 인사가 좌지우지됐던 상황이 비로소 종지부를 찍게 됐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임기가 만약 정상적으로 내년 2월까지 계속됐다면, 차기 대법원장도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의도치 않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업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애초 박근혜 정권 다음 정부는 대법원장 임명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2017년 12월에 정권교체를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19대 대통령의 임기는 2023년 2월에 끝난다. 대법원장 임기는 6년이기 때문에, 2017년 9월 이후 임명되는 대법원장의 임기는 2023년 9월까지다. 법원의 지나친 보수화에 대한 견제가 불가능해졌을 수 있다.
둘째, 현재 '법관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신뢰의 위기를 맞은 대법원 개혁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보수 정권 하에서 벌어진 '재판 외압' 사건으로 대표적인 게 이명박 정권 당시 신형철 전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사태였다. 신 전 대법관은 대법관 임명(2009년 2월) 전인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한미쇠고기협정 반대시위' 관련 재판과 관련한 조속한 판결을 종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2011년 취임한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도 임기 말 법원의 정치적 편향성, 법원 행정조직의 지나친 권한 등의 문제로 '개혁 대상'이 되었다. 그동안 '적폐'가 누적됐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또한 김 후보자가 진보 성향인 우리법연구회 소속이라는 점, 양승태 대법원장의 행정 권력 남용 논란의 시발점이 됐던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초대 회장을 지낸 점 등도 관심을 끈다. 그간 진보 성향 판사들에 대한 '외압' 논란이 제기됐던 상황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청와대의 의지가 엿보이는 셈이다.
셋째, 기수 파괴 실험이다. 일각에서는 5기수를 뛰어넘고 임명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사례와 비교하기도 한다. 양 대법원장(사법연수원 2기)보다 13기수 낮은 김명수 후보자(15기)가 대법원장이 될 경우, 법관 서열은 1위이지만 대법원 내 기수 서열은 전체 14명의 대법관 중 9위에 해당하게 된다. 이처럼 김 대법관의 인사는 향후 법원 내에서도 '파격 인사'를 통한 세대 교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전망을 낳게 한다. 대법관을 지내지 않은 대법원장이 임명된 것도 드문 일이다.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 3·4대 조진만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48년 만의 일이다. 김 후보자는 지난 2015년에 이어 올해 대법관 후보자로 추천받았으나 임명되지는 않았다.
김명수 후보자, 어떤 판결 내려왔나?
김명수 신임 대법원장 후보자는 사법부 내 대표적인 진보·개혁 성향 법관으로 분류된다. 평소 사법부 개혁에 강한 의지를 보인 터라 사법개혁을 이끌 적임자로 평가받는다. 김 후보자는 과거 참여정부 시절 사법개혁 주축이었던 개혁 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이다. 우리법연구회가 2010년 해산한 뒤 이듬해인 2011년에는 국제인권법연구회에서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인권법 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다. 과거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와 함께 성 소수자 인권에 관한 첫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인권법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평소에도 인권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지난해 2월 춘천지법원장으로 취임할 당시 <강원도민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법은 약자를 위한 것이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당사자의 입장을 헤아리고 인권과 소수자를 중시하지 않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법관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외국인, 다문화 가족 이주민 여성, 북한이탈주민, 소송비용을 지급할 여력이 없는 어려운 당사자들의 재판 접근권과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판결에서도 기존의 보수적 논리를 되풀이 하지 않는 전향적 결정을 내려 화제가 된 바 있다. 서울고법 행정10부 재판장을 맡고 있던 지난 2015년 11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고용노동부를 상대로 낸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대법원이 정부의 통보처분 효력을 사실상 인정하고 파기 환송한 사건에서, 대법원의 결정을 뒤집은 판단이다. 당시 고용노동부는 전교조에 해직 교직원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전교조에 '노조 아님'을 통보했고, 전교조는 정부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냈다.
당시 재판부는 "헌재 결정에 따라 해직교사의 교원노조 가입을 금지한 교원노조법 제2조가 위헌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다툴 쟁점이 상당수 남아있다"며 "항소심 판결 선고 때까지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을 정지한다"고 밝혔다.
또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면 노조 명칭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노조에 부여된 노조법상 권리를 현실적으로 행사할 수 없게 된다"며 "전교조의 조합원이 6만 명에 이르고 효력정지 처분이 유지되는 경우 본안 소송 판결이 선고되기 전에 여러 학교를 둘러싼 법적 분쟁이 확산되면 학생들의 교육환경에도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2015년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가 노동조합(노조) 활동을 이유로 노조 부지회장을 '표적 해고'한 사건에서는 노조측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당시 삼성에버랜드가 직원들의 개인정보 등을 외부 이메일로 전송했다는 이유로 부지회장을 해고하자 부지회장은 중앙노동위원회 등에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이 신청은 기각됐고 부지회장은 다시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판정 취소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부지회장에 대한 해고는 사회 통념상 합리성을 잃은 가혹한 제재로 징계권자에게 맡겨진 재량권을 남용한 것"이라며 "삼성에버랜드는 부지회장이 삼성노조를 조직하려 했고 실제 이를 조직한 뒤 부지회장으로 활동한 것을 실질적인 이유로 해고를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했다.
수원지법 판사였던 지난 2002년에는 신호를 위반하고 교통사고를 낸 주한미군에게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죄 등을 적용해 징역 8개월을 선고한 바 있다. 당시 관례상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받던 주한미군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은 이례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후보자는 평소 소탈한 성격으로 동료 법관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 출신인 김 후보자는 사법시험 25회(사법연수원 15기) 합격한 뒤 △서울지법 북부지원 판사 △서울민사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 △특허법원 부장판사 △특허법원 수석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춘천지법원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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