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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이 지난 자리엔 '환자'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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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산업'이 지난 자리엔 '환자'만 남았다

[프레시안 books]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어린 시절을 보낸 충남 보령의 시골 마을은 탄광촌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석탄산업 합리화 이전까지 강원도의 탄전지대 외에도 충청남도 보령과 전라남도 화순은 대표적인 탄광 지역이었다. 탄광이 한참 돌아가던 1980년대 중반, 그 시골 '깡촌'에도 내가 입학한 '국민학교'의 전교생이 600명을 넘었다. 아버지가 광부 일을 그만두고 참치 원양어선을 타러 나가 수 년을 아버지 없이 보냈다. 자주 놀러 간 친구들 집 대부분은 한켠에 탄가루 묻은 작업복과 장화가 널려 있었고, '칸데라'라 불리는 충전식 헤드램프가 놓여 있었다. 그 시절엔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장마당에서 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다. '탄차'의 마모된 베어링에서 나온 쇠구슬이었다. 뜨내기들이 많다 보니 부모를 따라 이사 온 아이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우리가 쇠구슬로 구슬치기 하는 것을 신기해하곤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탄광 마을의 어두운 그늘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태평양 한가운데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후송되어 돌아왔다. 일하다가, 일 때문에 사람이 앓는 모습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경험이었지만, 당시엔 그 의미를 몰랐다. 아버지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무렵, 동네 탄광들은 폐광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졸업할 즈음엔 전교생이 절반도 안 남았다. 중학교에 들어가 단짝이 된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일은 않고 만날 누워만 있는 친구의 아버지가 계셨다. 누렇게 뜬 얼굴로 소주 심부름을 시킬 때나 얼굴을 내비치시던 친구 아버지는 몇 년 후 돌아가셨다. 친구와 나머지 가족들은 도시로 떠났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그리고 많은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도 진폐 환자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다른 친구에게 듣고 알았다.


'산업'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지는 것은 아픈 노동자들이다. 죽은 자들은 그곳에서 사라지며, 그 가족들은 그곳을 떠나간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기획한 책인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은 남겨진 이들과 사라진 이들, 그리고 떠나간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의사들의 이야기이다.


폐광 마을인 내 고향 이야기부터 꺼낸 것은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직업병이라는 개념 자체가 광산 노동자의 경험으로부터 발전"했기 때문이다. 1차 산업이든 제조업이든 서비스업이든 모든 산업은 얼핏 보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사람을 집어삼키는 '괴물'의 모습으로 꿈틀대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의 유연화와 불안정화가 그 괴물을 살찌우려 사람들을 사료처럼 퍼나르고 있으니, 우리 시대에는 그 괴물의 존재를 더욱 유념해야 한다. 책의 프롤로그가 제안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의사가 환자에게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며, 의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우리의 질병이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방법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프롤로그를 읽은 다음 에필로그를 읽고 나서 본문을 읽는 것이다. '굴뚝 밖으로 나온 노동자들'이라는 제목을 단 에필로그가 제시하는 것 중 하나는 "노동자의 정체성만으로는 아픈 노동자인 환자들이 직업병 문제의 적극적인 행위자로 나설 수 없"으며, 따라서 노동재해, 직업병 투쟁은 새로운 시민권, 즉 '노동안전 시민권'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 책의 주인공인 '활동가-의사'들을 노동자들의 경험을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번역가'의 위치에 둔다. 흥미롭게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집필자는 의사가 아닌, 각각 법률가이면서 연구자인 동시에 안전보건 활동가들인데 이들을 제외한 모든 집필자는 '직업환경의'라는 의사들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의사'이자 '활동가'인 이들이 풀어낸 일터에서의 건강 이야기다. 고백컨대 이른바 '사'자 들어가는 직업적 권위의 사회화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내게 의사란 여전히 '친근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아직 노동안전보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고민이 부족하던 시절, 한 활동가-의사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다가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직업적 권위를 내려놓고 스스로를 보다 '활동가'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자신의 소신과 노력을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활동가-의사라는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소수에 불과한 소중한 존재들이다. '굴뚝 속으로 들어가는' 의사들 외에 또 하나의 '굴뚝'인 의료시스템(병원으로 상징되는)의 내부에서 그 문제점을 파헤치고 고쳐나가려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문제는 의학이라는 전문지식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요컨대 의사의 권위의 기반은 전문지식과 그를 둘러싼 제도인데, 이는 의학적 전문성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문성이 구축되고 유지되며 재구축되는 정치과정을 '전문성의 정치'라 한다. 전문성의 정치는 의료시스템과 같은 전문성의 영역 '내부'에서 전개될 수도 있지만, 전문성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전문지식이라는 것이 사실 꽤나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적 권위도 없고 체계화도 덜 되었더라도 유용하고 또 본질을 꿰뚫는 다양한 지식이 존재하는데, 이를 '시민지식' 또는 '현장지식'이라 한다. 이 책이 활동가-의사들을 '번역가'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은 이들의 전문지식과 현장지식 간의 '매개'와 이를 통한 새로운 지식생산이라는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다른 말로 '대항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공식적인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굴뚝 속', 즉 현장에는 노동조합 활동 등을 하면서 개인적․집합적으로 전문지식을 습득하여 '전문가 수준'에 이른 수많은 현장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있으며, 이들의 역할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도 조금씩 엿볼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아직 쓰이지 않은 수백 수천 권의 책이기도 하다. 더불어 잠재적 독자 분들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례들이 비단 과거의 문제들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들이며, 나아가 과거 또한 현재로서 '재발견'되어야 함을 유념하며 읽기 바란다.


대학 시절, 사북을 찾아 폐광 이후 남겨진 탄광 노동자들과 진폐 환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거 문제로서의 노동재해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들을 상당 부분 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현재와 미래의 문제로서의 노동안전보건 문제에 구체적인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아쉽게도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사고로 다치거나 죽어나가는 일터가 바로 건설현장이다.


5년 전, 한 지붕 아래 건넌방에 살면서 어린 시절 친형과도 같은 존재였던 형이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사고로 숨을 거둔 일이 있었다. 형의 아버지는 목 놓아 울었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 규슈 지역에서 수십 년째 매년 열리는 노동재해․직업병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최근 <군함도>로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지만, 규슈 지역은 일본의 근대 산업화가 시작된 곳으로서 탄광, 제철소, 조선소 등 수많은 식민지 강제동원 노동자와 일본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의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나의 일터가 동료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까지 해칠 수 있다는 점에 경종을 울린 미나마타병의 고장이기도 하다. 아픔을 간직한 채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의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고민을 나누는 규슈 지역의 의사, 법률가, 노동자, 활동가, 환자와 가족, 유족들을 만나고 돌아와 보니 수많은 문제 중 하나쯤으로 여겨졌던 반도체 노동자와 서서 일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가 새롭게 보였다.


한편, 일과 관련된 재해와 직업병의 거의 모든 영역과 주제들을 다룬 이 책이 미처 충분히 담지 못한 또 하나의 영역이 바로 방사선이며, 책에서 강조하는 '예방의 중요성' 만큼이나 중요한 주제가 바로 '과거의 재발견'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 노동과 제염 노동으로 인한 방사선 피폭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일본에서 '과거의 재발견'을 통해 현재진행형으로 된 방사선 피폭 노동 문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선원 피폭 문제다. 2차대전 종전 직후부터 1950년대 중후반까지 미국은 태평양에서 핵실험을 계속해 왔고, 이로 인한 선원 피폭은 '제5후쿠류마루'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당시 일본 측에 핵실험 기간 동안 피폭된 어선 900여 척에 한해 푼돈 수준의 보상금을 건네며 '불가역적 합의'를 강요했다. (아베 정부의 위안부 합의와 꼭 닮은 방식이다.) 당연히 피해 선박은 과소 추정된 것이었고, 수십 년이 지나 최근에서야 일부 지역에서 지역 주민과 유족 등에 의해 '환자 찾기'가 시작되었다. 지난해 만난 일본 고치현의 활동가는 내게 한국에도 피폭된 원양어업 선박과 선원들이 다수 존재할 것이라며 더 늦기 전에, 환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도 피폭 선원 찾기와 노동재해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재발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도 있다. 도쿄에서는 현재 수도고속도로 고가교의 노후화로 보수 및 철거 공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철제 골격에 사용된 도료는 몇 겹으로 도포되어 있는데, 안쪽에는 오래 전에 생산되어 납 함량이 매우 높은 도료가 사용되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보수 및 해체 과정에서 도장면을 깎아내는 그라인더 작업, 그리고 크레인 작업을 담당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납 분진으로 인한 중독 증상을 앓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공정상의 관리감독과 집진설비 등 대책이 없는 상황인데, 더욱 문제는 작업자들이 대부분 하청노동자로 안전보건 측면에서 취약하다는 점이다. 건설과 같은 전통적인 부문 외에도 이른바 '프로젝트형' 노동이 확산되어 가는 지금, 일이 시작되기 전 안전보건에 관한 영향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원양어선에 탔다가 병으로 돌아온 이야기부터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선 피폭 이야기까지 선원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데, 혹자에 따르면 배는 '근대적 공장 규율 체제의 원형'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노동의 '원형'과 1차 산업인 탄광 노동의 이야기들은 노동재해와 직업병 문제가 단지 일터 안에서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가족 및 주변 사람들에게 전 생애에 걸쳐 오래도록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노동재해, 직업병 문제는 시간적 차원은 물론 공간적 차원에서도 광대한 지평을 지닌다. 오늘날 때로는 국가에 의해, 때로는 자본에 의해, 때로는 소비자들에 의해, 때로는 이들 모두에 의해 우리의 안전과 건강은 위협받는다.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노동'의 영역인 일터 외에도, 가사노동과 같은 비임금노동의 장소, 학교와 여객선 같은 배움과 여가의 장소, 우리의 안전과 건강이 위협받는 그 모든 일상의 장소가 누군가의 일터이거나 일터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가습기 살균제 사건, 메르스 사태, 구의역 사고, 그리고 세월호 사고를 통해 배웠다. 그 배움을 잊지 않기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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