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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모든 것

[기고] 영국 명예훼손 재판의 이해

진실이 법정에 서게 된 파라독스

영화 <나는 부정한다>(믹 잭슨 감독, 2016)는 실제 재판에 기초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 또는 '쇼아'라고 이름 붙은 유대인 대학살을 부정하는 역사학자와 이를 규탄하는 역사학자 사이의 대결을 극화하고 있다.

'어빙 사건'은 유럽 곳곳에서 신나치 등 극우세력들이 등장하고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일어났다. 미국의 립스타트 교수는 용기 있게 이런 흐름을 고발하는 책을 썼다. 이에 대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영국학자 어빙은 영국 법원에 명예훼손으로 민사소송을 했다(영국의 Hight Court라는 법원은 대개의 영한사전에는 '고등법원'이라고 번역되고 있고, 영화의 번역도 이에 따른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사법제도에서 말하는 항소법원으로서의 고등법원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제1심 법원 역할을 한다). 립스타트는 졸지에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피고의 자리에 서야만 했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어빙이 민사든 형사든 피고석에 앉았어야 했을 것이다.

▲ 영화 <나는 부정한다> 중 스틸컷. ⓒ티캐스트

왜 이렇게 되었을까. 홀로코스트 부정론자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지키려는 사람이 법정에 서게 된 이 역설은 어빙과 그의 지지자들이 자신들이 이길 가능성이 높은 나라에서 재판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생겼다.(재판이 끝난 뒤, 그녀는 과연 2005년에 <법정에 선 역사(History on Trial)>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소송이 제기된 1996년의 시점에는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홀로코스트는 물론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부정하는 것도 범죄로 처벌하고 있었다. 어빙은 전략적으로 그렇지 않은 영국을 선택한 것이다(영국에서는 이러한 법정 쇼핑을 '명예훼손 관광(libel tourism)'이라고 부른다).

법은 자신의 말을 진실인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영국에서 명예훼손 문제에 대한 법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17세기 초 절대왕정 시대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거짓말로 중상하고 비방하는 행위는 흔히 폭력사태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결투를 하거나 가족들까지 동원되어 복수하는 일을 막기 위해 공공질서 유지 차원에서 법원에서 평화적으로(?) 다투도록 한 것이다. 이 시대에서도 역시 절대군주나 국가를 비판하는 서적 출판 등을 금지하는 등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한국에서 문제가 되었다면, 어빙은 역시 민사재판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을 것이다. 또는 립스타트를 명예훼손죄로, 형사 처벌할 것을 요구했을 수도 있다. 반면,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피해자들은 거짓말한 것이 되어 이들의 인격과 명예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들 역시 원할 경우 어빙을 상대로 민사나 형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영국의 경우 형사책임과는 별도로 단순한 모욕(insult)이 아니라 명예훼손(defamation)이 인정되어야 배상을 받을 수 있다. 명예훼손은 문서에 의한 중상 또는 비방의 경우 라이블(libel)로 부르고, 구두에 의한 것은 슬랜더(slander)라고 한다(영어 libel의 어원은 라틴어 libellus로 팸플릿 또는 명예훼손적인 문서를 뜻한다). 영화에서 문제된 '라이블'이 성립하려면, 명예를 훼손한다고 지목된 글이 △ 사업상 또는 직업상 손해를 입혔거나, △ 합리적인 사람이 판단했을 때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한편, 피고는 여러 가지 항변을 통해 자신의 글을 정당화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의 글이 진실에 입각하였음을 입증하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영화에서 립스타트는 크게 놀라게 된다. 자신은 역사연구를 통해 진실을 밝혔고 역사왜곡과 부정론자들은 궁지에 처해졌는데, 이제는 거짓은 자신을 변명할 필요가 없고 진실이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피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법이 피고에게 자신의 말과 글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도록 한 것은 고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법에서도 명예훼손 소송(iniuria)이 인정되었는데, 특히 익명의 글로 명예훼손이 이루어진 경우 형사재판에 넘겨졌다. 피고인은 사실이라고 믿고서 공개적으로 표명하기에 이른 것이 진실임을 입증해야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사형에 처해졌다. '할 말이 있으면 뒤에서 은밀하게 비방하지 말고 재판소에 나와서 하라'는 셈이 되었다.

▲ 영화 <나는 부정한다> 포스터. ⓒ티캐스트
아무튼 명예훼손에 관한 영국법은 수수께끼처럼 립스타트에게 과중한 입증 책임을 부과하게 되었다. 진실을 입막음할 뿐만 아니라, 진실과 역사와 정의를 법정에 세우는 모순을 가져왔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법은 악법으로 지목되어 결국 2013년 명예훼손법률에 의해 개정되었다. 새 법은 무엇보다 '진실의 항변(defence of truth)'을 인정하여 문제된 글이 '실질적으로 진실'이면 정당한 것으로 하였다. 또한 '라이블 사건'에 대하여 재판지인 영국과의 관련성을 요구하고, 배심재판을 원칙적으로 폐지하고, 명예훼손적 발언이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이 되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전체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증대하는 방향으로 법이 바뀌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영국법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제공하면서 전개되지는 않는다. 구체적인 지식이 없이 이러한 법 현실에 직면하게 되는 관객에게는 보다 큰 극적 효과가 나타날 것도 같다. 필자가 영국법을 조사하고, 이렇게 글까지 쓰게 할 정도로 말이다. 법적 프레임의 폭력성을 느끼게 하려던 것이었을까?

'영화가 된 재판'이 끝나고 난 뒤

영화에서와 같이 1심에서 패소한 어빙은 항소하였으나, 2001년에 역시 패소하였다. 재판비용으로 200만 파운드를 내지 못하고 결국 파산한다. 그럼에도 재판을 '검열'이라고 비난하며 극우단체와 활동하던 중 2006년 홀로코스트 부정을 범죄로 처벌하는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너무 추했던 탓일까? 아니면 역사 부정에 확실한 초점을 맞추려고 했기 때문일까? 영화에서는 후일담을 포함하지 않았다. 영화는 자료와 감성 또는 열정만으로 접근하는 것의 한계를 콕콕 찌르는 듯한 장면을 여기저기 배치하고 있다. 역사적 진실 파악의 어려움을 말하는 한편 법정의 언어와 논리, 프레임 속에서 역사가 설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끈질기게 묻고 있다. 홀로코스트 자체를 초점에 두지 않은 것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다음 세대들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과제를 말하려던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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