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4.3은 말한다>가 이미 절판된 마당에 장기간 중단되었던 이 연재가 4.3사건 전개과정의 중간부터 불쑥 시작된다면 독자 분들이 혼란을 느끼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어떻게 다시 글을 이어갈지 무척 고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본 연재에 앞서 <4.3은 말한다>(1~3권은 양조훈 취재반장이 집필)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 그리고 <제주문화상징>(제주특별자치도, 2008)을 바탕으로 △간략한 '4.3사건의 개요와 상징', △본 연재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상황에 대한 '4.3사건 전개과정 요약'을 먼저 쓰기로 하였습니다. 필자 주
제주4.3사건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미군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남 지역을 점령해 통치하던 미군정기에 발발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까지 7년 7개월 동안 전개된 사건이다.
과거 군사정권과 극우세력들은 제주4.3사건을 '반란' 또는 '공산폭동'으로 규정했다. 반면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항쟁' 또는 '민중항쟁'으로 정의했다. 이와 같이 상반된 인식 차이로 인해 오랫동안 '정명(正名)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군 점령기에 발발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까지 지속
그런데 '제주4.3사건'은 무려 7년 여 동안 전개되면서 시기에 따라 여러 국면들이 펼쳐졌다.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제주도 밖에서는 좌우 이념대립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1946년 '대구 10월 사건'이 전국적으로 크게 번지면서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주도의 상황은 미군정청 공보관인 케리 대위가 1947년 신년사를 통해 "육지와 달리 불행한 소요사태가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제주신보>, 1947. 1. 1)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찰 발포에 총파업…미군정, '붉은 섬' 규정해 탄압
하지만 1947년 3.1절 기념식 때 다른 지방에서 온 응원경찰의 무분별한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된 사건은 제주도를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뜨렸다.
경찰 발포에 항의해 대대적인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다. 민간은 물론 대부분의 관공서가 파업에 돌입했고,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들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그런데 조병옥 경무부장 등 미군정 경찰은 관련자 처벌과 사과, 그리고 보상 등의 후속조치를 하기는커녕 느닷없이 "제주도는 붉은 섬"이라고 규정하면서 무차별한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4.3무장봉기가 벌어질 때까지 1년간 무려 2500명이 구금되었다.
그 무렵 미군 감찰반이 "제주도 유치장은 최악이다. 3.3평의 한 감방 안에 35명이 갇혀 있다"고 보고할 정도로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급기야 무장봉기 1달 전인 1948년 3월에는 경찰에 의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졌다. '저항과 탄압의 국면'이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단선·단정 반대" "통일독립"
그러자 곧 '항쟁의 국면'이 펼쳐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경, 한라산 기슭에 산재해 있는 오름마다 일제히 봉홧불이 붉게 타올랐다. 이를 신호로 약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곳을 동시에 공격했다. 또한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 습격해 살해했다. 무장대는 "탄압이면 항쟁이다!"라고 외치며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을 무장봉기의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무장대는 또한 초대 국회의원 선거인 5.10총선거를 거부하기 위해 선거기간에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결국 제주도는 3개의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등 2곳의 선거가 무산되었다. 이로써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2개 선거구만이 무효화되어 제헌의회는 198명의 의원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런데 항쟁 못지않게 탄압도 중첩돼 나타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곧이어 참혹한 '수난의 국면'이 전개됐다. 제주 주둔 제9연대 연대장 송요찬은 1948년 10월 17일 "해안선부터 5㎞ 이외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조선일보' 1948. 10. 20).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고통이 짧으니 다행한 일"
제주도의 지형 상 '해안선에서 5㎞ 이외 지점'은 한라산 등 산악지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해변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송요찬 연대장은 중산간마을을 깡그리 불태우면서 무차별 학살극을 자행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최근 송요찬의 고향인 청양군과 충청남도, 보훈처가 송요찬의 동상을 세우는 등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4.3유족과 제주도민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관련 기사 : '민간인 학살' 송요찬, 7억 들여 기념 사업?)
특히 이승만이 불법적으로 선포한 계엄령에 따라 군.경 토벌대가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약 4개월 동안 벌인 이른바 '초토화작전' 때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치른 희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산간마을을 포위한 군인들은 다짜고짜 집집마다 불을 붙였고 불기운에 놀라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70~8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 아기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요행히 피했다 하더라도 점점 조여 오는 토벌대의 포위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사를 건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아낙네들도 어린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살을 에는 듯한 겨울 한라산으로 향했다. 숨었던 굴이 발각돼 온 가족이 몰살되기도 했고, 우연히 굴 밖으로 나왔다가 구사일생한 사람들은 가족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숨죽여 흐느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해변마을로 소개(疎開.강제 이주) 당한 사람들의 희생도 컸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며 수시로 학살했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고통이 짧으니 다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들이 잇따라 벌어졌다.
해변마을 주민들도 고초를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끼니를 거르면서도 토벌대의 밥상에는 고기반찬과 계란을 올려야 했다. 토벌대는 걸핏하면 '무장대 지원 혐의'가 있다며 총질을 했다.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해 말로는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여성들의 수난도 컸다.
잔혹한 학살극, 이승만과 미군의 책임
이러한 행위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당시 대통령으로서 군통수권자인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었던 미군에게 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살극이 재연됐다. 도내에서는 이른바 '예비검속'으로 1000명 가량의 목숨이 희생됐다. 또한 불법적인 군사재판으로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약 2500명의 제주도민이 인민군에게 쫓기며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 당했다.
이로써 4.3무장봉기 당시 무장대 숫자는 350명에 불과했으나, 희생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가량인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 중산간마을 대부분이 폐허로 변하는 등 재산피해도 컸고, 육체적.정신적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7년 여 동안 벌어진 사건의 전개과정은 '탄압의 국면', '항쟁의 국면', 그리고 탄압이나 항쟁이라는 용어를 무색케 하는 엄청난 '수난의 국면'이 조금씩 중첩되면서 차례로 펼쳐졌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국면 중 어느 하나만을 특정화하여 명칭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한 비록 토벌대에 의한 희생보다 그 비율이 훨씬 작지만,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엄연히 존재하는 점도 정명 붙이기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개인사.가족사적인 체험과 기억의 역사가 아니라 보다 객관적이고 긴 호흡을 하는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4.3사건에 대해 정명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4.3, 평화.통일.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상징
4.3사건의 가장 큰 상징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이다. 4.3희생자 유족들은 복수하지 않았다. 군.경 세력이 위세를 부리던 군사정권 때에는 복수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족들은 서로의 상처를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보듬으며 합동위령제를 봉행해 오고 있다.
제주도민들은 더 나아가 '평화와 인권'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부각시켰다. 4.3이라는 큰 상처를 입고 반세기 넘도록 쓰라린 가슴앓이를 해 왔으나 서로 위로하면서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해 왔다. 4.3이 '평화와 인권'의 상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4.3사건이 분단의 결과로 빚어졌기에 '평화통일'은 당연히 4.3의 한 상징이 될 수밖에 없다. 반상(班常)을 구별하여 신분을 차별하던 봉건시대의 과제는 봉건 타파이며,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과제는 민족해방투쟁이라 할 것이다. 남북 분단 상황이 정치·사회는 물론 경제.문화에 이르기까지 큰 규정력을 갖고 있는 이 시대를 '분단시대'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 동의한다면, 분단시대의 역사적 사명은 평화통일이다. 따라서 4.3은 평화통일로 가야하는 당위성의 상징이다.
제주4.3사건의 상징 중 또 하나는 '저항 정신'이다. 민란이 벌어질 때마다 '장두(狀頭)'가 도민을 대신해 목숨을 내놓아야 했지만, 제주섬에 대한 외부 세력의 탄압과 착취가 극심할 때마다 제주도민들은 절대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생명력'도 제주4.3의 또 다른 상징이다. 제주시 노형동의 한 자연마을의 주민은 "마을의 젊은 남자들이 거의 죽고 나니 축구대회 때 참가할 남자가 정원보다 한 명 부족한 열 명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죽다 남은 열 명'이라며 자조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도민들은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게 된다)며 서로 위로하며 견뎌왔다.
"죽다 남은 열 명"…"볶은 콩에도 새싹이 난다"
이 때 살아있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의 근거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존에 몸부림치며 잿더미로 변해버린 마을을 맨손으로 일구어냈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어 졸지에 고아가 되었지만 꿋꿋하게 살아내 어느덧 할아버지가 된 한 도민은 "볶은 콩에도 새싹이 나는 법"이라고 말했다.
4.3사건 때 벌어졌던 야만적 폭력의 근원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세계적 수준의 냉전과 남북 분단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4.3사건은 평화.통일.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살육이 벌어지고 있고, 강대국간 힘겨루기도 여전하다.
제주도민들은 4.3이라는 엄청난 희생의 후유증을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극복해 왔다. 이젠 남북의 평화는 물론 동북아시아와 나아가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평화·인권의 성지로 가꿔가야만 한다.
'김종민의 다시 쓰는 4.3'은 <프레시안> 기사 교류 중인 <제주의 소리>와 동시에 연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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