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년 앞으로 다가 온 평창동계올림픽 준비가 자원봉사자의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는 평창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의 저조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므로 분명 반가운 뉴스는 아니다. 필요한 자원봉사자의 규모도 미리 예측하지 못해 자원봉사자 확보 방안조차 제대로 수립하지 못한 평창조직위원회의 무능 역시 뼈아프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자원봉사에 기대어 올림픽을 치르려고 한 강원도와 조직위원회의 전근대적 발상이다. 자원봉사는 시민으로부터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받음이다. 따라서 자원봉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임금을 매개로 하는 정상적인 고용은 저해될 수밖에 없다. 경제적 여유 있는 시민이 제공하는 자원봉사가 한계상황에 내몰린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이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원봉사가 마냥 아름답고 훈훈한 것만은 아니다.
자원봉사, 21세기의 원납전(怨納錢)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백성으로부터 원납전(願納錢)이라는 기부금을 징수했다. 원납전이란 말 그대로 백성이 자발적으로 원하여 납부하는 금전이다. 하지만 실제로 원납전을 자발적으로 납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해서 납부하는 원납전(願納錢)이 아니라 '원망하며 납부하는' 원납전(怨納錢)이었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라면 전국 팔도에서 얼마든지 자원봉사자를 징발해도 된다는 조직위의 사고방식은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징수하였던 흥선대원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도 국가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이것이 허용된다면, 향후 온갖 명분으로 위장한 국가의 전체주의적 동원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통해 해학적으로 묘사되었지만, 88올림픽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자원봉사자들은 본래 야간 자율학습에 몰두하던, 그리고 대학 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던 우리의 학생들이고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징용 대상이었다. 그 명분은 국가적 대사에 전국민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원납전(怨納錢)이 아니고 무엇인가. 정녕 이러한 명분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한가. 불행히도 2018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당시와 똑같은 망령이 되살아 나는 듯하다.
한 가지 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근본적으로 이런 식의 자원봉사자 강제 동원이 평창올림픽 흥행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는 문제다. 지난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관중석이 텅 비어 급한 마음에 중고생 자원봉사자를 잔뜩 동원했더니 이 학생들이 스탠드에 앉아 있지는 않고 경기장 출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자원봉사자는 국가가 궁할 때면 언제든지 마음껏 동원할 수 있는, 말 잘 듣는 만만한 훈련병이 아니다.
자원봉사 '구걸'은 조직위의 자기부정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평창은 올림픽 폐막 후 재정파탄으로 파산한 몬트리올이나 아테네와는 다르다는 주장이다. 도대체 그렇게 자신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여태 제대로 밝힌 바 없으나, 전국 샅샅이 자원봉사자를 구걸하고 다니는 조직위의 모습을 보면 그 자신감의 일단을 짐작할 만하다. 재정지출을 최소화하여 적자를 막아보겠다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그러나 흑자 올림픽은 자원봉사자 몇명 더 써서 지출을 줄인다고 달성되지 않는다.
애초 강원도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올림픽 유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평창올림픽으로 막대한 경제효과를 창출하리라고 주장했다. 그 경제효과 중에서도 특히 '고용으로 인한 일자리 창출'을 항상 자랑스럽게 주장해왔다. 그 약속대로라면, 자원봉사는 가급적 줄이고 양질의 일자리를 최대한 많이 제공해야 한다. 국가적인 자원봉사 모집 캠페인을 지금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한 명의 자원봉사자라도 더 구하기 위해 애쓰는 조직위의 모습은 명백한 자기부정이자, 국민과의 약속위반이다. 조직위는 더 이상 자원봉사에 기대지 말고,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노동자를 고용해 올림픽을 치를 궁리를 해야 한다. 자원봉사는 필요 최소한도에 그쳐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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