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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사망 박종철 추도까지 막은 전두환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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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문 사망 박종철 추도까지 막은 전두환 정권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32> 6월항쟁, 열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국민과 함께 만들어간 2·7 추도 대회, 준비위원만 7만 2674명

프레시안 : 박종철의 넋을 위로하고 고문·살인 정권을 규탄하기 위한 2·7 추도 대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준비됐나.

서중석 : 박종철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 연합과 동시다발 투쟁이라는 새로운 투쟁 방식이 등장했다. 고문 공대위는 이 사건과 관련해 고문 폭로 대회를 열기로 1987년 1월 17일에 결정했다. 그 후 고문 폭로 대회라는 명칭을 박종철 고문 사망에 대한 국민 추도회로 바꾸고, 이 국민 추도회를 주도하는 단체도 새로 조직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박종철 고문 사망에 분노하는 여론이 국민적 규모로 들끓는 현상을 포착한 것이다.

국민 추도회 준비위원회 발족식은 본래 1월 26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원천 봉쇄해 이날 발족식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다음 날(1월 27일) 김대중, 김영삼, 계훈제, 송건호 등은 고 박종철 군 국민 추도회 준비위원회 발족식을 열고, 2월 7일을 박종철 군에 대한 국민 추도일로 선포했다. 그러면서 '7일 오후 2시에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군 추도회를 열고 그와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 추도식을 거행한다'고 발표했다.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동시다발 시위 투쟁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고문 사망의 파장을 어떻게든 줄여보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국민 추도회 준비위원회 발족식을 막은 1월 26일에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CBS 라디오 '월요 특집' 생방송 중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26일 오후 2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쟁점 사안을 놓고 청취자들이 전화로 토론에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인 '월요 특집'이 '고문은 사라져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두 시간 예정이던 '월요 특집'이 오후 3시 8분경 갑자기 중단되고 음악 방송으로 대체됐다. 이것에 대해 이날 초청 출연자 중 한 사람인 변정수 변호사는 "방송 시작 전에 이미 '당국에서 이 방송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날 CBS에는 "왜 방송을 중단하느냐", "본래 하던 방송을 계속하라"는 문의 및 항의 전화가 140통 넘게 걸려 왔다. '편집자')

2·7 추도 대회를 앞두고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산하 지운협(지역운동협의회)에서는 동시다발 투쟁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동시다발 투쟁을 하게 된 데에는 민주화 운동의 성장으로 각 지역 운동을 독자적으로 꾸릴 만한 역량을 갖추게 된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각 지역에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싸울 의사를 표한 것이 기반을 이뤘다. 그와 함께 졸업정원제 등도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대학생 숫자가 1970년대와는 비교가 안 되게 늘어나고, 전두환·신군부의 분산 정책으로 서울 지역 대학교의 지방 분교 및 새로이 지방 대학이 많이 설립된 것도 동시다발 투쟁이 전개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동시다발 투쟁에 더해 새로운 투쟁 방식이 또 하나 있었다. 준비위원회에서 제시한 2월 7일 국민 추도회 참가 요령이 그것이다. 이게 6월항쟁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레시안 : 참가 요령으로 어떤 것을 제시했나.

서중석 : 참가 요령으로 '모든 국민은 2월 7일 오후 2시 각자의 위치에서 추도 묵념을 올린다', '박종철 군을 추도하는 뜻에서 7일 검은색 또는 흰색 리본을 단다', '모든 자동차는 7일 오후 2시에 추도 경적을 울린다', '모든 교회와 사찰 등 종교 기관은 이 시간에 추도 타종을 한다' 등을 제시했다. 시위를 원천 봉쇄하거나 초기 단계에서 막아버린 박정희 유신 정권, 전두환·신군부 정권과 맞서 민주화 운동 세력이 얼마나 힘들게 싸워왔나. 10여 년간 계속된 고난의 투쟁에서 얻은 노하우가 쌓이고 쌓인 민주화 운동 세력이 억압된 공간에서 시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이때 제시한 것이다.

국민 추도회 준비위원회는 1차로 각계 대표 9782명을 준비위원으로 위촉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여러 단체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도 '나도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계속 밝혀왔다.

2·7 추도 대회 발표가 나오자 천주교 쪽에서 즉각 호응했다. 2월 4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추도 대회에 적극 참가할 것과 함께, 참가할 수 없는 경우 모든 성당은 7일 오후 2시 정각에 타종하고 신자들은 1분간 묵념할 것을 권고했다. 천주교 측은 1월 27일에는 원주 교구, 2월 2일에는 마산 교구 이런 식으로 여러 교구에서 특별 미사를 올렸다. KNCC도 적극적이었다.

2월 6일 국민 추도회 준비위원회는 준비위원이 7만 2674명으로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이 사람들만 다 거리로 나와도 아주 많은 숫자였다.

전두환 정권, 박종철 죽음으로도 모자라 추도 대회까지 막으려 대규모 경찰 동원

ⓒ오월의봄
프레시안 : 전두환 정권은 어떻게 대응했나.

서중석 : 전두환 정권은 1986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강공, 강압 일변도로 나왔다. 그러면서 다시 비상 조치 카드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1987년 2월 1일 장세동 안기부장은 "내란적인 사태가 벌어질 경우 김영삼, 김대중을 구속하고 핵심 측근들도 구속해 도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비상 조치, 계엄으로 국회는 사실상 휴회 상태에 들어가고 정국을 안정시키면서 (권력 승계 문제에서) 현행 헌법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도 준비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그러니까 전두환과 장세동은 4·13 호헌 조치에 대한 생각을 이미 이 시기에 다, 또는 이 시기 훨씬 이전부터 혹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월 5일 밤 서울시경은 1만 60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2700여 곳에서 일제히 검문검색을 실시했다. 6일에는 김대중, 함석헌 등 주요 인사들을 가택 연금했다. 이날 경찰은 전국 105개 대학에 심야 수색을 실시했다.

2월 7일, 경찰은 추도 대회를 막기 위해 모두 5만 3660명을 투입하고 이 중 3만 6000명은 서울에 배치했다. 이때 총 경찰 병력이 12만 명 정도였다는 걸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인원을 투입했는지 쉽게 알 수 있지 않나. 추도회가 열릴 명동성당 일대에만 전경 기동대 등 8000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명동을 3겹, 4겹으로 에워쌌다. 그뿐 아니라 명동성당 일대의 은행 등 수많은 회사는 출퇴근을 앞당겼고 수많은 상점이 철시했다. 노점상 등도 명동에서 쫓겨났다.

곳곳에서 동시다발 추도…경찰 방해로 끝내 둘이서 타종한 박종철 어머니와 누나

프레시안 : 2·7 추도 대회, 어떻게 진행됐나.

서중석 : 2월 7일 낮 12시 50분경 명동 입구에서 시민과 재야인사 200여 명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대자 시민들은 쏘지 말라고 외치면서 "우우우"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자 경찰은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아댔다.

이날 시민들 표정은 1986년 11월 29일, 신민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 및 영구 집권 음모 분쇄 범국민대회를 계획하고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전개된 그날과도 또 달랐다.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거나 시위대에 직접 뛰어들어 참여했다. 광교, 시청 일대에서는 준비위원회에서 제시한 대로 추도 경적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래서 주최 측도 놀랐고 신민당도 고무됐다. 서울 곳곳에서 노상 추도식과 시위가 이어졌는데, 평화적으로 추도하고 시위하는 모습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박종철의 고향 부산에서는 대각사에서 추도회를 열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전 7시경부터 2000여 명이 경찰이 대각사를 겹겹이 에워쌌다. 대각사에 가려는 사람들을 경찰이 막아서면서 몸싸움이 계속 벌어졌다. 부산민주시민협의회 회원과 신민당 당원, 구속자 가족들이 산발적 시위를 벌이다 결국 대각사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오후 2시 남포동 부산극장 앞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노무현, 김광일 변호사가 그 자리에서 연설을 했다. 경찰은 이곳에 최루탄을 난사했다.

이날 박종철 어머니 정차순은 부산 사리암에 갔다. 전경들은 사리암 입구에 진을 치고, 박종철의 친척들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분위기가 그렇게 되면서 스님들이 무서워서 종을 못 쳤다. 그래서 끝내 박종철의 어머니와 누나, 두 사람만 추도 타종을 했다. 모녀는 아들과 동생을 잃은 슬픔과 통분을 삼키며 울부짖으면서 종을 쳤는데, 그 사진이 또다시 시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2·7 추도 대회는 서울, 부산뿐만 아니라 동시다발 형태로 전국 주요 지역에서 추진됐다. 전두환 정권의 원천 봉쇄로 대회장에서 추도회를 열지는 못했지만 차량 경적, 타종 등의 참가 요령을 포함해 상당 부분이 실현됐다. 부산과 광주에서도 그랬지만 서울 곳곳의 시위 현장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건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항쟁을 제외한다면 1960년 4월혁명 이후 처음 보는 현상으로 전두환 정권의 가슴을 내려앉게 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2·7 추도 대회 직후 박종철 추도 분위기를 잠재우고 민주화 운동을 무력화할 회심의 카드를 갖고 있었다.

▲ 2·7 추도 대회에 참가한 한 여성이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적힌 종이를 높이 들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박종철 고문 사망 문제 가리려 김만철 일가 소식 대문짝만하게 부각

프레시안 : 무엇이었나.

서중석 : 2월 9일, 이날은 월요일이었는데, 신문들은 북한의 김만철 일가 11명이 전날 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고 일제히, 그것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김만철 일가가 도착한 8일이 일요일이어서 9일 자 신문에 난 건데, 1면에 크게 다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면에 걸쳐 보도했다. (동아일보를 예로 들면 1면 톱기사를 비롯해 총 12면 중 5개 지면에 김만철 일가 관련 기사를 실었다. 그뿐 아니라 호외도 발행했다. '편집자')

사실 이 사건은 김만철 일가가 북한을 탈출해 일본에 머무는 과정에서 이미 여러 차례 크게 보도된 바 있었다. 그런데도 2월 9일 이때 이렇게 크게 보도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2·7 추도 대회를 희석시키고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기 위해 전두환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수상에게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으니 김 씨 일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김만철 일가가 2월 8일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김만철 일가는 1987년 1월 15일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했다. 엔진 고장으로 표류하던 김만철 일가의 배는 일본 해상 순시선에 발견돼 20일 일본으로 예인됐다. 그 후 김만철 일가 처리 문제를 놓고 남북한과 일본, 나중에는 대만까지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관계국들은 북한 송환, 한국행, 일본 망명, 제3국 망명 등 다양한 방안을 놓고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북한은 김만철 일가를 무조건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반면에 남한은 김만철 일가의 한국행을 일본에 공식 요청한 것에 더해, 협조를 당부하는 대통령 전두환의 친서까지 일본 수상에게 전달했다. 그러면서 김만철 일가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이와 관련, 2017년 1월 20일 한겨레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남조선으로 오기만 하면 서울에 일등급 병원을 차려주고, 해달라는 거 다 해준다고 약속했다"는 김만철의 말을 전하고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남북 간 대립에 더해 일본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그뿐 아니라 김만철 일가 사이에서도 행선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이 시기에 일본 어선(후지산마루호) 선장이 불법 어로 혐의로 북한에 억류돼 있었던 점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일본이 김만철 일가를 공해상에 추방하면 한국 쪽에서 데려가는 방법도 한일 간에 은밀히 논의되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방안은 대만을 거쳐 한국에 가게 하는 것이었다. 난색을 표했던 대만 당국이 한국 정부의 요청에 결국 동의해 이 방안이 실행됐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 고위층과 가까운 한 막후 인사를 통해 '김만철 일가가 대만에 갈 수 있도록 대만 당국과 교섭해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11월 7일 연합뉴스는 <외교가의 사람들>(노진환, 1993년)을 근거로 이 막후 인사가 세지마 류조라고 보도했다. 세지마 류조는 일본 정계의 흑막으로 불리며 한일 관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다. '편집자')

김만철 일가의 입국은 전두환 정권에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안겼다. 2월 9일 이후 오랫동안 김 씨 일가의 서울 나들이 등 관련 소식이 텔레비전과 일간지를 가득 메웠다. 그 반면 3월 3일에 고문 추방 및 민주화를 위한 국민 평화 대행진을 하기로 결정한 사실 등 박종철 고문 사망 추도와 관련된 여러 활동은 신문에서 크게 밀렸다. 기껏해야 신문 맨 귀퉁이 1단 기사로 나는 정도였다. 신문은 박종철 고문 사망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김만철 일가 탈북 사건으로 사회 분위기가 반전된 면도 있었지만, 보수적인 제도 언론답게 언론이 익숙한 제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 김만철 일가 입국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호외(1987년 2월 9일). ⓒ동아일보

49재 날 전개된 3·3 평화 대행진

프레시안 : 그런 속에서도 박종철을 기억하고 고문·살인 정권을 규탄하는 사람들은 2·7 추도 대회에 이어 3·3 평화 대행진으로 나아갔다. 3·3 평화 대행진 준비, 어떻게 이뤄졌나.

서중석 : 3월 3일은 박종철의 49재 날이었다. 49재는 불교에서 망자에 대한 빼놓을 수 없는 의례 아닌가. 박종철 가족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불교계가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박 군 고문 사망 사건은 촉진제가 됐다. 정권의 압력으로 조계종 종단 차원에서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정토구현전국승가회 등 여러 단체가 고 박종철 영가 49재 봉행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3월 3일 조계사에서 치를 것을 결의했다.

2·7 추도 대회를 앞두고 참가 요령을 발표한 것처럼, 국민 추도회 준비위원회는 고문 추방 및 민주화를 위한 국민 평화 대행진 행동 지침을 발표했다. 3월 3일 정오에 3·1운동 진원지인 파고다공원을 향해 시민들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인도를 따라 행진을 시작하자고 호소했다. 그러고 나서 오후 1시 파고다공원에 모여 추도 묵념, 애국가 제창, 만세 삼창으로 끝맺기로 했다.

이번에도 전두환 정권은 경찰을 대규모로 동원해 막으려 했다. 3월 2일 밤 9시부터 그다음 날 오전 7시까지 경찰은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 곳곳에서 검문검색을 실시했다. 3월 3일에는 서울에 2만 2000여 명을 배치하는 등 전국에서 경찰 6만여 명을 동원했다.

프레시안 : 3월 3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경찰은 전날 밤부터 조계사 출입을 통제했다. 승려와 신도들은 조계사 입구에서 몸싸움을 벌이다 경찰의 벽을 뚫지 못해 결국 노상에서 49재 천도재를 거행했다. 신민당 이민우 총재와 당 간부들은 파고다공원을 향해 나섰지만 바로 경찰에 의해 차단당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신민당사 계단에서 49재를 지냈다.

오전 11시 50분경 종로 일대에서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조금 지나서는 청계 4가 일대에서 학생, 노동자 등이 시위를 벌였다. 처음에는 500여 명이었는데 순식간에 2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면 부근의 육교, 상가 주변에 있던 1000여 명의 시민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고 학생들을 뒤쫓아 잡을 때에는 시민들이 "우우우" 하고 야유를 보냈다.

이날 부산에는 정사복 경찰 4600여 명이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그런 가운데 사리암에서 박종철의 부모와 가족, 친지, 해인사 주지 명진, 통도사 주지 청하 등 400여 명이 모여 49재를 지냈다. 오후 5시경 학생들이 미화당백화점 근처에서 시위를 벌였고, 6시 무렵에는 대각사 앞에서 7개 단체 회원들과 학생들이 대행진을 시도했다.

광주의 경우 원각사에서 49재를 지냈다. 오후 4시 40분경부터 밤 9시까지 학생들이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대구에서는 오후 2시경 시위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800여 명이었다가 1500여 명으로 불어났는데, 경찰이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자 해산됐다. 대전, 전주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교도소에서도 3·3 대행진에 호응했다. 전국의 교도소에 갇혀 있던 양심수들은 3월 7일까지를 애도 기간으로 정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3월 3일 이날 전국 46개 대학에서 학생 6000여 명이 교내에서 49재 대행진 출정식을 열고 시위에 나섰다. 그렇지만 3·3 평화 대행진은 경찰의 봉쇄 때문에 부산 사리암 49재를 제외하고는 원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2·7 추도 대회와 비교하면 학생이건 시민이건 참여자가 그때보다는 적었고 더 평화적이었다.

2·7 추도 대회와 3·3 평화 대행진, 6월항쟁의 기본 틀을 제시하다

프레시안 : 박종철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정권 차원에서 조직적인 진실 은폐, 조작 공작을 편 시기에 2·7 추도 대회와 3·3 평화 대행진이 이뤄졌다.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부터 6월항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 두 행사는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보나.

서중석 : 2·7 추도 대회와 3·3 평화 대행진은 6월항쟁의 기본 틀을 제시해줬다. 그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학생들의 참여가 적기는 했지만 야당과 재야, 종교 세력, 학생이 민주 연합을 형성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또 참여 요령에 따라 차량에서는 경적을 울리고 교회와 성당에서는 타종을 했다.

2·7 추도 대회와 3·3 평화 대행진을 통해 적지 않은 사람이 용기를 얻었고 고무됐다. 두 행사는 사람들이 전두환 정권의 폭압을 뚫고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자신감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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