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수효과. '부유층의 투자, 소비 증가가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로까지 이어져 국가적인 경기부양 효과로 나타나는 현상'을 일컫는 경제 용어다. 이는 이미 가진 자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갖지 못한 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이를 실천한 대표적인 예가 '부자 감세'일 터다.
그러나 우리는 2016년 대한민국에서 부와 권력에 낙수 효과란 없음을 거듭해서 확인하고 있다.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허락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개·돼지' 취급을 당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폭력과 차별, 그리하여 '위험'에만 낙수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것들은 자꾸만 아래로 흘러들어 우리를 침수시킨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곳 혹은 보지 않으려고 했던 곳에서 "노오력하면 우리도 저들처럼 될 수 있다"는 기만적인 환상을 먹고 자란 권력은 다양한 파국의 드라마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성 소수자 혐오,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 백남기 농민의 죽음과 국가 폭력, 가습기 살균제 참사, 삼성 산재 문제와 반올림 투쟁 등은 이런 위기 속에서 누가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우리의 삶은 더 위험해진다.
이처럼 올해의 10대 인권뉴스 후보 목록을 보고 있으면 하나의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 사회를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화두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바로 "평등해야 안전하다"는 것이다. 정치가와 일반 시민이, 자본가와 노동자가, 남성과 여성이,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원주민과 이주민이, 혹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평등하지 않아서 우리는 위험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이런 리스트는 점점 더 쌓여만 간다. 확실히 2016년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문제에 대해서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한 해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해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의 목소리는 쉽게 묻혀버렸고, 그토록 견고하고 튼튼한 벽과의 대면은 우리를 더욱더 깊은 불신과 허무주의로 내몰았다. 투쟁은 언제나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리셋'을 말한다. 차라리 전쟁이 일어나거나 (얼마 전 올라탄 택시에서 기사님은 "북한은 이럴 때 안 쳐들어오고 뭐하냐"라고 말했다) 혹은 피할 수 없는 자연 재해가 밀려오기를 바라기도 한다. "모두 다 쓸려가 버렸으면."
그러나 고통스럽게도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재난조차 평등하게 닥쳐오지 않는다. 경주지역 지진과 밀양의 10년 투쟁의 교훈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부분 서울에서 소비하는 전기를 만들기 위한 원전은 왜 경상도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가? 서울의 에너지 자립도는 왜 그렇게 떨어지나? 고위험 시설인 원전을 서울에 설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험의 낙수효과는 서울과 지역 사이에도 존재한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답이 아닌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처럼 위험조차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삶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감정적인 구조가 혐오다. 혐오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그렇게 양산되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소수자들에게 낙인을 찍어 문제적 존재로 끌어내림으로써 차별에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는 야만적이야, 결혼 이주한 여자들 중엔 꽃뱀이 많아, 여자들은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찾지, 동성애자는 문란해, 장애인은 사회 안전을 위협한다고... 한도 끝도 없이 나열될 수 있는 이런 근거 없는 혐오는 차별에 이유를 댈 뿐이다. 물론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테러방지법 제정과 어버이 연합 게이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혐오가 국가와 자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혐오란 결국 불확실성의 시대에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차별을 통해 배타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마음 훈련소인 셈이다. 그리하여 혐오의 효과 역시 자꾸만 '아래로' 떨어진다.
그래도 변화는 시작되었다. 2015년에 이어 2016년에도 여전히 '혐오'가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핫키워드'인 이유는 혐오로부터 비롯된 폭력이 그 세를 더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런 혐오의 효과를 인식한 시민들이 그와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여성혐오'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전에는 전혀 이야기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광장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평화'와 '광장'의 의미를 다시 쓰는 작업이기도 하다.
'평화 시위'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이야기된다. 첫째는 공권력과 종편 등에서 짜는 평화 시위 프레임 속의 평화. 이는 기실 길들여진 유순한 신체에 대한 묘사일 뿐이며, 권력이 원하는 '안전한 집회'란 진정한 평화에 부합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성숙한 민주시민의 평화 시위. 이때 평화란 온순함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직접행동이 가능하게 하는 평화다. 이 평화는 갈등과 부정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시위에는 이 둘이 교묘하게 중첩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차원을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계속해서 고발되고 있는 광장에서의 성희롱과 성폭력, 그리고 각종 차별의 언어를 예민하게 인식하면서 다시 '평화'의 의미를 질문하는 것이다. 한 해 내내 여성혐오를 비롯하여 소수자 혐오와 싸워온 이들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광장에 함께 선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 차별과 폭력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과연 '평화 시위'인가. 그리하여 싸우는 사람들이 평화의 의미도 다시 썼다. 평화란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에 비로소 안전이 보장되는 그러한 상태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안전'의 의미도 달라진다. 안전은 그저 신체의 보존이나 생존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안전이란 나의 시민됨을 온전히 보장받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렇게 광장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 광장에서는 "페미가, 장애인이, 퀴어가, 청소년이, 알바생이 세상을 바꾼다."
그리하여 좌절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인권뉴스의 목록은 이처럼 '아래'로부터의 각성이, 풀뿌리 운동의 확대가, 그리하여 폭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직접행동의 조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4.16 인권선언 선포, 밀양 투쟁 10년,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농성 1500일, 낙태죄 폐지 운동, 병역거부 항소심 첫 무죄 판결 등을 놓치지 말자. 어쩌면 실패의 기록일 수도 있는 이 목록은, 어쩌면 승리의 기록일 수도 있다. 우리는 기꺼이 지는 싸움을 지속함으로써 세계를 다시 기록하고 있다. 지는 것을 포기했다면 이미 끝났을 10년, 혹은 1500일, 혹은 또 어떤 시간들. 그 시간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2016년 10대 인권뉴스 후보 목록을 천천히 따라 읽어주셨으면 한다. 이 몇 줄의 목록에는 '평등'과 '존엄'이라는 말을 다시 쓰려고 했던, 그리하여 이미 작살난 세계를 어디로든 다시 끌고 가려 한 사람들의 처절한 진심이 녹아들어 있다. 그 진심을 기록하고 기념하며 세계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 기울어진 판을 바로잡는 또 다른 한 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2016 10대 인권뉴스와 숨겨진인권뉴스 투표는 12월 1일(목)부터 11일(일)까지 진행됩니다. 투표는 홈페이지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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