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조작 간첩' 인생의 기록
(전편에 이어서.)
"1969.5~1971.5경 간첩 진현식 등에게 국가 주요 산업시설의 규모와 군사상 기밀을 제보. 국가보안법 제2조, 형법 제96조 제1항."
"1975.4.13 간첩과 반국가단체인 통일혁명당 강원도위원회를 구성하여 간부로 종사하고 내란 예비 음모 국가보안법 제1조 제2호, 형법 제90조 1항, 제87조 제2호."
"1975.4경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동조. 반공법 제4조 제1항."
고문과 협박을 견디지 못해 내뱉은 말들은 하나하나 공소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김태룡 씨와 진창식 씨는 법적으로 완벽한 '간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포함한 가족 열두 명은 '간첩단'이 되었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간첩단이라 하는 떼거지를 따져보면 죄다 가족이에요. '단'이라고 붙일 거면 뭐가 좀 조직다운 게 있어야 하는데, 식구들 모아놓고 '간첩단'이라고 하는 게 참 우습고 거창하지 않습니까?"
언론에서도 '북괴 간첩 일당 열두 명을 일망타진했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일망타진'이었습니다. 한날한시에요. 기획한 일이 아니고서야 한두 명도 아니고 열두 명을 어떻게 한날한시에 잡아넣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경찰은 나중에 재심 법정에서 사전에 안 게 아니라고 발뺌했습니다. '진항식이가 의사도 아닌데 치료했다는 신고를 받고 의료법 위반 혐의로 조사하던 중 북에서 넘어온 형님이 있다는 얘기를 해서 그 진술을 토대로 조사를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사전에 안 게 아니었으니 영장 발부받을 시간이 없었단 겁니다. 진 씨네 가족, 저희 가족이 삼척, 서울에 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 진항식 씨를 잡아넣은 지 하루도 안 돼서 12명을 일망타진하는 게 말이 됩니까?
만일 경찰이 애초부터 우리를 잡아넣으려고 기획한 거였다면, 충분히 시간이 있었으니 영장 발부 신청을 했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검사는 나을까 싶어 검찰 조사에서는 기존 진술을 뒤집었습니다. "경찰이 쓰라고 해서 고문을 못 이겨 쓴 것뿐"이라고 호소했습니다. 검사는 "조사 이따위로 할 거냐"며 매몰차게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다시 경찰에 끌려간 창식 씨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여러 명에게서 얻어맞았습니다.
"'너 이 새끼 또 말 바꿀 거냐'면서 구둣발로 엄청나게 밟더라고요. 그날은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법정에서도 사실대로 말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을 직접 고문했던 조사관들이 방청석에 앉아 빤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조사관들은 조사 말미, '공판장에서 허튼소리를 하면 죽는다', '자백한 내용과 다른 말을 하면 괘씸죄로 더 형이 높아진다'고 미리 겁을 줬습니다. 허탈함에 웃음만 나왔습니다.
"이미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시기도 좋지 않았습니다. 1심을 1979년 11월에 했는데 10월에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구속영장이 떨어져서 춘천교도소에서 조카(태룡 씨)를 만났는데, 보나 마나 죽었다고 우리끼리 얘기했습니다."
억지로 끼워 맞춰진 사건이다 보니, 재판에서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여러 번 연출됐습니다.
"재판은 정말 엉망 그 자체였죠. 우리 중에 두어 명 빼고는 다 초등학교만 나오거나 초등학교도 못 다닌 일자무식들입니다. 조카(김태룡 씨)네 삼촌(김달회 씨)한테 '노동당에 어떻게 가입했느냐'고 물으니까 '반장하고 리장이 하라고 해서 가입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공화당을 생각하고 말한 건데, 한글도 못 읽는 분이 노동당이나 공화당이 뭔지 구분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노동당을 반장이나 리장이 시켰다는 게 말이 됩니까. 판사들이 그 얘길 듣더니 웃더라고요. 그렇게 웃어놓고, 어떻게 징역을 줍니까. 아마 그 사람들은 우리가 간첩이 아닌 걸 다 알았을 겁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불과 일 년도 못 되어 3심이 모두 끝난 속전속전 판결이었습니다. 12월 20일 대법원은 태룡 씨와 창식 씨에게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태룡 씨의 아버지 김상회, 창식 씨의 셋째 형 진항식 씨는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나머지 8명도 5년에서 10년 사이의 실형을 받게 됐습니다.
1심부터 대법원까지 판결 내용이 공소장과 똑같았습니다.
"지금 보니, 그때 판결문이 공소장 오자 탈자까지 그대로 옮겼더라고요. 검사도 엉터리였지만, 판사도 제대로 판결할 의지가 없었던 거죠."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두 집안이 풍비박산 난 꼴이었습니다. 아들 삼 형제와 며느리, 손자, 손녀까지 제 핏줄 일곱 명이 줄줄이 끌려가자, 태룡 씨의 할아버지는 할머니 묘 잔디를 다 뜯어놓은 후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고모도 할아버지의 자살에 충격을 받아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나중 이야기지만,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삼촌 김달회 씨도 결국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영어에 갇힌 몸이 된 태룡 씨는 이 모든 상황을 감옥 안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1983년 집행된 아버지의 처형 소식조차 나중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곧 형장의 이슬이 되고, 다른 가족들도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밖에서 살던 가족들은 농약을 마시고 죽어 나가고,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수였습니다. 그 심정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내 고통을 넘어선 사람이 역사에 있겠는가 싶습니다."
창식 씨 또한 형님의 죽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는 가족 가운데 형님을 가장 마지막으로 뵈었습니다.
"서울에서 전주 교도소에 옮기기 전에 서울 구치소에 계신 형님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형님은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모르고 나는 무기수 몸이니 마지막으로 좀 보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했습니다. 면회를 잘 안 시켜주는데 그때 아주 운 좋게도 형님을 뵀습니다. 형님은 '미안하다. 나로 인해 우리 가족이 이렇게 돼 미안하다. 나도 몸 건강히 잘 있다. 얼마나 살지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면회 시간이 너무 짧아서 형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형장에서 혈육을 잃는 슬픔을 안고도 기약 없는 감옥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처음 영등포 교도소에 있었을 때 그 3개월이 정말 정신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만 있어도 죽을 줄 알았는데 목숨이 안 그렇더라고요. 죽고 싶은 생각이 막 들어서 2심 재판할 즈음에는 저는 밥도 안 먹습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교도관들이 제가 자살할 우려가 있다며 손이랑 몸을 같이 묶어놨어요. 그렇게 밤낮으로 3개월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았습니다. 아침에 가서 봉 들고 운동장 한 바퀴를 돌면 아침에 먹은 걸 다 토합니다.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습니다."
태룡 씨는 굶주리는 고통을 참아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처음 춘천 교도소에 들어갔을 때 밥을 보리쌀로 주는데, 썩은 덩어리가 나오더라고요. 밥이 아주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무지도 썩어서 먹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간수한테 '이걸 먹으라고 줬냐' 하며 따지니 간수가 '무슨 소리냐. 내가 한 번 먹어보자' 해서 줬더니 바로 뱉더라고요. 도통 먹을 수가 있어야지요.
제가 처음 들어갔을 때가 30대 초반이니까, 한창 혈기왕성하고 배고플 때 아닙니까. 그래서 같이 수감된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위바위보를 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실컷 먹어보자 해서 일등은 아침에 세 명 밥을 몰아 먹고, 이등은 점심에 몰아 먹고, 삼등은 저녁에 먹고, 나머지는 굶는 것입니다. 배고팠던 이야기들을 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그렇게 춥고 더럽고 배고픈 곳에서 내 젊은 청춘을 다 바쳤습니다."
젊은 날을 감옥에 모두 바친 둘은 체포된 지 19년 2개월 만인 1998년에야 다시 세상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돼 복역한 이들 가운데 사형당한 두 명을 제외하면 마지막 출소자들이었습니다. (다음에 계속)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토리펀딩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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