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어두컴컴한 독방에 갇혀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양 옆방에는 부모, 형제가 있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족과 만날 수 없습니다. 말을 전할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벽을 통해 들리는 건 사랑하는 가족의 울부짖는 소리뿐…. 독방 안에 슬그머니 다가온 누군가가 말합니다.
"네가 '아니'라고 하면 너희 가족은 죽는다."
그 질문이 무엇이든, 여러분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설령 나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 해도, 내가 부인하면 가족은 나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래도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당신은 다른 가족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네'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가족 모두 같은 방식으로 '네'라고 답했다면?
가족을 담보로 한 협박에 넘어가 결국 일가족, 아니 두 집안 식구가 하루아침에 몽땅 간첩이 되어버린 이들이 있습니다.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 피해자 김 씨, 진 씨 두 가족의 기막힌 사연을 전합니다. (☞관련기사: "30년, 40년만의 치 떨리는 고백")
형님이 넷이었습니다. 그러나 첫째 둘째 형님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한국 전쟁 중에 두 형님은 행방불명됐습니다. 둘째 형님은 북으로 갔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제일 큰 형님은 학교 숙직실에서 의용군으로 강제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형님들을 마지막으로 뵌 게 고작 네다섯 살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진창식(71) 씨에게 두 형님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형님의 소식이 끊긴 지도 십수 년이 흐른 1968년 가을. 입대를 앞둔 창식 씨가 뱃일을 하고 집에 돌아온 때였습니다.
"창식이 왔느냐. 식사하고 이리로 오너라."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전쟁통에 사라진 두 형님을 대신해 가장이 된 셋째 형님 진항식 씨가 그를 불렀습니다.
어머님이 차려주신 식사를 마친 창식 씨가 형님이 계신 사랑채로 갔습니다. 창식 씨를 부르는 형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에 사라진 둘째 현식이 형님을 아느냐."
"네."
"그 형님이 지금 여기 와 계시다."
북으로 넘어갔으니 평생 못 볼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계신다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오셨다가 오늘 밤이 어두워지면 간다 하셨다. 길 떠나기 전에 집에 있는 막내 얼굴이라도 보고 가고 싶다는구나."
반가움은 잠시였습니다. 남북이 갈라서 서로 총구를 겨누던 흉흉하던 때였습니다. 북쪽 사람들은 뿔 달린 무서운 사람들 아닌가, 적대감이 들었습니다.
"적국에서 내려왔으면 간첩 아닙니까. 이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휙 뒤를 돌아 문고리를 잡았습니다.
"창식아!"
문을 열어젖힐 찰나, 셋째 형님이 그를 잡았습니다.
"형님이, 북에 가족이 있으시다고 하신다. 네가 만일 신고를 하게 되면 북에 있는 형님네 가족은 어찌 되겠냐. 그리고 어머님도 형님을 보셨다. 십년을 넘게 떨어져 살다가 앞으로도 못 볼 텐데 그렇게 떨어져서야 되겠느냐. 네 얼굴만 보고 가면 그만 아니냐."
어머니가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두 형님이 사라진 후로 매일 밤 정화수를 떠놓고 형님들이 건강하게 잘 살아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창식 씨는 매일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창식 씨에게 둘째 형님은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이나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아들이었고, 아버지처럼 모시는 셋째 형님의 형님이었습니다.
"알겠습니다. 형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두 시간 정도 흘렀습니다. 사방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불을 켜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바깥에서 누가 볼까 염려스러웠습니다. 숨을 죽이고 조용히 방 한구석에 앉아 둘째 형님을 기다렸습니다.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손전등 불빛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이었습니다. 둘 중 누가 형님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농구화 같은 신발을 신은 남자가 창식 씨 쪽을 향해 불을 비추며 말했습니다.
"네가 막내냐."
"네, 제가 막내 창식입니다."
창식 씨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대답했습니다.
"얼굴 봤으니 됐다. 나중에 통일이 되면 만나자. 그동안 형하고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거라."
말을 마친 뒤 둘째 형님은 서둘러 방을 나갔습니다. 창식 씨는 구태여 배웅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형님이 그 길로 떠났다는 것은 그 다음 날, 셋째 형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이것이 창식 씨와 둘째 형님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후로 보름이 흘렀습니다. 바닷일이 없어 집에서 빈둥거리며 소일거리나 하던 날이었습니다. 다시 셋째 형님이 창식 씨를 불렀습니다.
"지난번에 오셨던 둘째 형님이 산을 타고 북으로 가시려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거기서 가까운 조카네 집으로 갔다는구나."
형님은 창식 씨에게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형님이 머물고 있는 조카 집에 소독약과 생선을 전해주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창식 씨는 군말 없이 조카 집으로 가 둘째 형님을 뵙고 왔습니다. 여전히 둘째 형님은 낯설고, 무서웠습니다. 꺼림칙한 마음에 대화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둘째 형님과의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잃어버린 아들 얼굴을 봤으니 좋으셨겠지만, 우리 집안에는 비극이었죠. 그 형님만 오시지 않았으면 우리 가족이 하나로 엮여서 잡혀가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비극은 창식 씨 집안에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북으로 가는 길에 다친 진현식 씨를 거둬주면서, 창식 씨의 조카 김태룡(70) 씨의 집안 또한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저희 아버지한테서 들으니, 진현식 씨와 저희 아버지가 굉장히 절친한 사이였다더군요. 친척인 데다가 나이도 비슷했고, 아버지가 옛날에 진현식 씨 가족이 운영하던 구멍가게에서 일을 했는데, 그때 진현식 씨한테 사탕도 주고 그러면서 돈독하게 지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진현식 씨가 북으로 가던 중에 낭떠러지에서 구른 곳이 하필 우리 집과 꽤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진현식 씨가 함께 남한으로 온 사람한테 '고종사촌 형님 집으로 가자'고 해서 우리 집에 왔다 하더라고요."
그 당시, 타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느라 본가에서 살지 않았던 태룡 씨는 이 모든 상황을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처음에 진현식 씨가 우리 집에 도착해 노크를 하더니 아버지 얼굴이 보이자마자 권총을 들이밀었대요. 어머니를 뵈러 북에서 넘어온 것이니 신고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 뒤에 또 사람이 있는데, 형님이 여기서 신고하면 저 사람이 이 집안 식구를 다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어요. 아마 많이 다쳤는지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하더라고요. 예전에 워낙 가까운 사이였던 데다가 다쳤고 하니 도장방을 좀 내어줬습니다."
진현식 씨는 다리가 치료될 때까지만 자신과 동행인 김흥로 씨를 보호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 열흘, 한 달이 지나도 둘은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진현식 씨는 잘 알던 친척이니 집에 데리고 있을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는 동행인까지 거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태룡 씨의 부모는 더 이상 보호를 해줄 수 없다며 김흥로 씨에게 나가달라 부탁했습니다.
김흥로 씨는 태룡 씨 부모의 말에 수긍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을 나가 자신의 친척집으로 갔습니다.
남파 간첩들은 대체로 조를 짜서 내려왔는데, 진현식 씨네 조의 경우 김흥로 씨가 조장이었고 진현식 씨가 조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북과 소통할 수 있는 무전기를 휴대하고 있었는데 조장인 김흥로 씨는 발신과 수신 기능이 모두 되는 무전기를 갖고 있었던 반면, 조원인 진현식 씨는 수신 기능만 있는 무전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김흥로 씨는 태룡 씨 집을 나가면서 발신 무전기도 챙겼습니다. 진현식 씨로선 북과의 연결고리가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친척 집에 도착한 김흥로 씨는 며칠 되지 않아 경찰에 적발됐습니다. 친척 집안에 있던 그는 경찰로부터 포위를 당해 자수를 권유받았습니다. 경찰에게 시간을 달라며 방 안에 들어간 그는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하고 말았습니다. 북과의 교신 장비도, 각종 서류도 폭파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진현식 씨는 김흥로 씨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3~4년이 흘렀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태룡 씨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고, 그동안에도 진현식 씨는 여전히 태룡 씨 집에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세상 모르게 숨겨주고 있으면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옛날 시골 인심이란 게 아주 정이 두텁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집이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라 여유롭게 그분을 도와줄 수 없었고, 저 같은 경우는 적발이 되면 숨겨준 데 대한 처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진현식 씨와의 인연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진현식 씨에게 '나가라'고 할 경우, 자칫하면 그가 자신을 버린 데 대한 원한을 품고 보복을 하거나 경찰에 자백을 하며 태룡 씨네 집안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태룡 씨는 이 난처한 상황을 빠져나갈 묘안을 짜냈습니다. 이사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태룡 씨 부모는 진현식 씨에게 '삼척에서는 벌이가 시원치 않아 이사를 가야 하겠으니, 당신도 제 갈 길을 찾아가라'고 부드럽게 설득했습니다. 진현식 씨는 알겠노라 답했습니다.
태룡 씨 집을 나온 진현식 씨는 어디로 갔을까요. 다시 진현식 씨의 동생 창식 씨의 이야기입니다.
창식 씨는 둘째 형님을 뵌 다음 해인 1969년 예정대로 입대했습니다. 군에 가서도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혹시나 둘째 형님을 만난 게 문제가 될까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파병단에 지원했습니다. 심란한 생각도 덜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습니다.
2년여의 파병 생활을 마치고 삼척 집에 돌아온 창식 씨는 어머니에게서 둘째 형님의 마지막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카(김태룡 씨) 집을 나와서 다시 우리 집에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조카 집에 몇 년을 있으면서 굉장히 몸이 허해졌대요. 다리를 다쳤는데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으니 제대로 치료도 하지 못했고, 운동도 못 하니 기력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결국 골수염을 앓았는데, 도저히 버티기 힘든 상태까지 간 모양이에요.
그렇게 몸도 안 좋은 데다가, 더 있다가는 가족들한테 피해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나 봐요. 어머니한테 미숫가루를 일주일분을 해달라고 부탁하더니, 두 끼 정도 먹을 것만 챙겨서 집을 나갔다고 해요. 어머니는 '아마도 죽으러 간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둘째 형님은 영영 자취를 감췄습니다.
일이 커진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1974년, 북한 공작원들이 창식 씨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공작원들은 셋째 형님 진항식 씨에게 협박하다시피 '진현식 씨를 어디에 숨겼느냐'며 캐물었습니다. 진항식 씨는 공작원들에게 '형님은 거의 죽었다고 봐야한다'고 답했지만 '혹시 돌아올지 모르니 집에 오면 보호하라'고 말했습니다.
공작원들은 이듬해 다시 찾아왔습니다. '진현식이 남한에 온 이후 행적을 확인해본 결과 김상회(김태룡 씨의 아버지)의 집에 오래 있었던 것 같으니, 그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혹시 아직도 몰래 진현식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 본인들이 직접 확인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진항식 씨는 공작원을 우선 자신의 집에 남겨두고, 친척을 데리고 오겠다며 홀로 서울 성동구 태룡 씨의 새집에 찾아갔습니다.
"지나고 보니, 참 인생이라는 게 한순간입니다. 제가 실은 무기징역을 안 받아도 될 사람인데, 하필 그날 아버지가 바빠서 제가 대신 나가는 바람에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지난날의 기억을 끄집어내던 태룡 씨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당시 태룡 씨의 아버지는 서울 성수동에서 롤러스케이트장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진항식 씨로부터 삼척에 와달라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태룡 씨에게 '일이 많아 손이 바쁘니 네가 갔다 와라'라고 했습니다. 태룡 씨는 일을 마치고 집에 온 터라 피곤하기도 하고, 그날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당숙을 뵙고 삼척을 따라가는 내내 비몽사몽이었습니다. 삼척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도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저랑 당숙이 만난 걸 가지고 경찰이, 당숙은 통일혁명당 강원도당위원회를 구성하라는 지령을 받아서 본인이 위원장이 되고 저와 창식 삼촌을 부위원장 시켜서 당을 조직하려고 만난 것처럼 꾸며놨더라고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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