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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40년만의 치 떨리는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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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40년만의 치 떨리는 고백

[30년, '조작 간첩' 인생의 기록] 프롤로그

여기, 한 장의 가족사진이 있습니다.

"가운데 앉아 계신 분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그 위 왼쪽에 서 있는 분은 누님, 그 옆에는 남동생, 저는 맨 오른쪽 아래…."

김태룡(70) 씨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가족을 소개합니다. 여느 가족만큼이나 단란해 보이는 여덟 식구.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들 가운데 네 명은 실은 과거 무거운 혐의를 받고 감옥살이를 하다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5년형, 누님이랑 남동생도 7년형, 그리고 저는 무기징역…."

세상은, 이들 가족을 '삼척 북괴 간첩단'이라 불렀습니다.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 피해자 김태룡 씨네 가족 사진. ⓒ프레시안(서어리)

일가족 잡아넣고는 "간첩 일당 일망타진"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79년 6월, 건설 회사 직원이었던 김태룡 씨 사무실로 장정 대여섯 명이 찾아왔습니다. 다짜고짜 총구를 들이댔습니다. 김태룡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론가 끌려갔습니다. 들어가면 '반 송장'이 되어 나온다는 그곳, 남영동 대공분실이었습니다.

태룡 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까지 한 식구가 몽땅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불과 하루 이틀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는 '간첩 일당을 일망타진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1979년 8월 9일 자 <경향신문> 보도.

김태룡 씨 가족이 끌려간 것은 6월 중순, 치안본부가 발표한 시기는 8월 9일. 약 한 달 반 사이, 이들 가족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옥을 경험했습니다. 구타, 물 고문, 고춧가루 고문, 잠 안 재우기 고문, 전기 고문…. "간첩이 아니"라고 할 때마다 고문 강도는 더해갔습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한 협박이었습니다.

"한밤중이 되면 옆방에서 가족들이 고문받는 소리가 들립니다. 조사관들은 '똑바로 안 하면 네 아버지, 네 누이 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간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조사관들이 부르는 대로 자술서를 쓰고 말았습니다.

결국 김태룡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제 핏줄을 줄줄이 감옥에 보낸 할아버지는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고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한 집안이 그야말로 풍비박산 났습니다.

김태룡 씨는 20년을 채우고서야 감방 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첩 낙인 탓에 직업도 구할 수 없었고,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귀를 쓸 수 없게 됐습니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간첩이랑 말만 섞어도 잡혀가는 어지러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김태룡 씨 가족은 숨을 죽이며 외롭게 살아야 했습니다.

▲벽장에서 남편 김인봉 씨 사진을 꺼내보는 김성완 씨의 어머니. ⓒ프레시안(서어리)

간첩죄보다 무서운 '간첩 핏줄' 소리

여기, '간첩 집안'이라 불리던 가족이 또 있습니다.

제주에서 명망 높은 국어 교사였던 고(故) 장재성 씨와 평범한 농부였던 고(故) 김인봉 씨. 사돈 관계였던 이들은 일본에 다녀왔다가 나란히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남편이 간첩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김인봉 씨의 가족은 그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간첩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간첩 핏줄'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아들 김성완(60) 씨는 학창 시절, 연좌제가 얼마나 큰 걸림돌인지를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김인봉 씨의 가족은 행여나 누가 들을 새라, 김인봉 씨의 입을 억지로 막았습니다. 훗날, 아버지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김성완 씨는 땅을 치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생에 한 번 겪기도 힘든 간첩 누명을 두 번이나 썼던 비운의 인물이 있습니다. 1972년 통일혁명당 재건 사건, 2012년 GPS 간첩 사건의 피해자 이대식(79) 씨입니다.

과거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철창 신세를 진 그가 또다시 간첩 혐의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한 과거 전력은 또 다른 조작 간첩 사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간첩 누명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습니다.

하얗게 머리가 센 노인이 되어서야 이들은 법정 앞에 섰습니다. 이대식 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김성완 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씻어드리기 위해. 김태룡 씨는 자신을 포함한 가족 모두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뒤늦게서야 용기 내어 말합니다.

나는, 우리 가족은, 간첩이 아니라고.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 피해자 김태룡 씨. ⓒ프레시안(최형락)

"다 지난 일이라고요?"

"30년, '조작 간첩' 인생의 기록". 앞으로 여러분께 전해드릴 이야기는 조작 간첩 사건으로 삶을 빼앗긴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피와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된 날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30년도 더 지난 일들입니다. 누군가는 "다 지난 일인데 이제 와 말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합니다. 또 누군가는 "옛날엔 시절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과거는 반복됩니다. 정보기관, 수사기관은 까마득한 과거와 비슷한 수법으로 여전히 조작 간첩들을 찍어냅니다. 그 결과가 '유우성 사건', '홍강철 사건'이었습니다.

조작 간첩 피해자들의 고통을 쓰는 일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고, 특히나 국정원과 검찰이 왜곡시킨 과거를 바로잡는 일일 테니까요.

무엇보다, 조작 간첩의 멍에를 진 피해자들와 그 가족들의 응어리를 푸는 일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간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추락해버린 존엄성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재심 신청, 언론 인터뷰, 모두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과거의 고통과 대면하는 일은 끔찍한 일입니다. 피해자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욕조 물에 정신이 아득해지던 옛일을 떠올릴 때면 몸서리를 칩니다. 재심을 신청하고 언론 인터뷰를 했다는 이유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와 결심을 반복합니다.

김태룡, 김성완, 이대식 씨. 이들은 이 모든 공포를 이겨내고 진실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을 시작으로 앞으로 8주 동안 독자 여러분과 함께 역사를 새로 쓰려 합니다. 진실을 밝히는 긴 여정에 동참할 준비 되셨나요?

그럼, 하루아침에 일가족이 몽땅 간첩단이 되어버린 김태룡 씨네 가족의 기막힌 사연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토리펀딩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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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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