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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태민 문제와 10·26, 그 미묘한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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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최태민 문제와 10·26, 그 미묘한 상관관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5> 유신의 몰락, 열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김재규는 왜 거사를 결심했던 것인가.

서중석 : 김재규가 거사하게 된 데에는 크게 보면 '한국이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유신 체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생각을 거사할 무렵에는 했던 것 같다. 직접적인 계기는 부마항쟁을 자기 눈으로 보고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이 아주 힘든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다.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지역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시위건 항쟁이건 간에 유신 체제 반대에 박정희나 차지철이 대응하는 자세가 국가를 파탄으로, 정말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게끔 돼 있다. 이러다가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러한 두려움이 직접적인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미 관계가 매우 나빠졌다는 것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군인들은 그전부터 많이 생각할 수 있었던 사항인데, 그런 것 때문에도 유신 체제나 박정희 문제는 해결돼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김재규는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부마항쟁의 기본적 배경이기도 한데, 거기서 위기감을 느낀 것도 작용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요인들 말고도 김재규가 거사하게 된 데에는 다른 몇 가지 요인도, 크게 영향을 끼친 건 아니지만 약간씩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10·26 동기, 박근혜·최태민 문제

▲ 최태민(1977년). ⓒ연합뉴스
프레시안 : 그러한 요소로 어떤 것을 꼽을 수 있나.

서중석 : 그중 하나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박근혜와 최태민 목사 문제였다. 박근혜와 최태민 목사의 관계에 대한 글도 참 많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조갑제 기자의 글과 김진 기자의 글을 많이 참조하려 한다.

김진 기자는 유신 말기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분별력이 차츰 빛을 잃어갔던 것 같다고 하면서, 가장 큰 것은 차지철 경호실장 문제였지만 큰딸 근혜 양과 그 옆에 붙어 다니던 최태민의 존재, 이것도 말이 많았다고 얘기했다.

박정희가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건 가족 관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육영수 사거(1974년) 직후 박근혜에게 접근한 최태민은 구국선교단, 구국여성봉사단 같은 전국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다. 구국여성봉사단, 이건 나중에 새마음봉사단이 된다. 하여튼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활동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등장하게 된다.

특히 최태민을 둘러싸고 물의를 빚는 일이 많았다. 일각에서 한국의 라스푸틴(제정 러시아 말기 황실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괴승)으로 얘기되기도 하는 최태민은 목사라고 하지만 목사 안수 경력이 명확하지 않았고, "나는 영적 계시를 받아 움직인다"고 얘기해서 뭔가 아주 이상한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고 한다.

1975년 초 치안본부에서 박근혜의 부탁으로 최태민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치안본부 간부가 그걸 박 대통령한테 보고했다. 박정희는 그 정보를 딸한테 알려주고 주의를 줬다고 한다. 그러자 박근혜는 치안본부 간부한테 전화를 걸어 '이럴 수가 있느냐'며 섭섭함을 표했다고 그런다. 그 후 이 치안본부 간부는 박 대통령도, 박근혜도 만날 수 없게 됐고, '최태민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박근혜에게 건의했던 비서들도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박근혜·최태민 문제에 대해서는 박승규 청와대 민정수석의 증언이 자세하다.

프레시안 : 박승규는 어떤 이야기를 했나.

서중석 : 민정 비서실로 진정서가 들어왔는데, 최태민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부금을 걷는다는 내용이 많았다. 최태민이 정부 부처에 찾아가 이권 관계를 수소문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주관한 새마음 갖기 운동이라는 것도 물의를 일으켰다. 그래서 박승규 수석은 이것에 대해 박 대통령한테 보고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조사에 착수해서 대통령한테 보고서를 올렸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그전에 몇 차례 구두 보고를 받긴 했지만 이렇게 문제점이 조목조목 나열된 서면 보고를 접하자, 박 수석 얘기에 의하면 얼굴이 아주 상기됐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박정희는 차마 이걸 딸에게 직접 얘기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고 그런다.

박정희는 고민하다가 슬그머니 박승규 수석한테 보고서를 도로 줬다고 한다. "자네가 직접 근혜한테 이야기 좀 해봐. 나한테 보고 안 한 걸로 하고."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나. 그렇게 하기가 정말 어려운 일인데도 박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박 수석은 직접 박근혜를 만나서 얘기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 지시를 못 들은 척할 수 없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이 관계로 박근혜와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프레시안 : 김재규도 박근혜·최태민 문제로 곤욕을 치르지 않았나.

서중석 : 김재규는 항소 이유 보충서에서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라면서 총재 최태민, 명예 총재 박근혜로 돼 있던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를 얘기했다.

1977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백광현 안전국장한테 뒷조사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갑제 책에 의하면, 이렇게 조사를 해보니까 최태민이 구국여성봉사단에 여러 재벌 총수가 기탁한 수십 억 원을 횡령한 사실, 여비서들과 저지른 불륜 등이 드러났다고 한다.

김재규는 조사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박정희는 김재규와 백광현을 한편에, 박근혜와 최태민을 다른 한쪽에 앉혀놓고 일종의 친국이라고 여러 사람이 쓰고 있는 대질 신문 비슷한 걸 했다. 이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중앙정보부장, 그러니까 자신이 직접 임명했고 중요한 위치에 있는 그 사람이 낸 보고서를 믿지 못하고, 관계자들을 양쪽에 앉히고 이른바 친국을 하느냐, 이 말이다. 김재규로서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고 기자들은 썼다. 이 자리에서 딸은 울면서 부인했고 최태민은 고문을 당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검찰에도 조사를 명했다. 결과는 중앙정보부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렇지만 최태민은 총재에서 명예 총재로 직책이 바뀌었을 뿐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새롭게 총재가 된 박근혜에게 계속 영향을 줬다.

박근혜는 최태민 문제와 관련해 김재규에게 항의했다. 그렇지만 김재규는 최태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1979년 5월 최 목사가 계속 박근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김재규는 "그자는 백해무익한 놈이다"라고 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최태민 문제는 10·26 이후에도 계속됐다. 1987년과 1990년 육영재단에서 '최태민의 전횡을 반대한다'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육영재단 이외에 박근혜가 관여한 영남대, 정수장학회에서도 최태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의 활동이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그러면서 1990년에는 박근혜의 동생 박근영(그 후 박서영을 거쳐 박근령으로 개명)과 박지만이 '최태민으로부터 박근혜를 구해달라'는 탄원서를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내는 일도 일어났다. 그 후에도 최태민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최태민의 사위 정윤회는 1998년 정치인으로 다시 나선 박근혜의 보좌관을 맡아 여러 해 동안 활동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인 2014년에는 이른바 정윤회 문건이 세상에 드러났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의혹 및 박근혜, 정윤회, 그리고 최태민의 딸 최순실 문제는 세간의 큰 관심을 모았다. '편집자')

정치인 박근혜는 유신의 망령에서 자유로운가

프레시안 : 1989년 4월 <월간조선>에 실린 인터뷰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조갑제에게 김재규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10·26 이틀 전인 1979년 10월 24일 "측근들을 바꾸어야 한다"면서 "우선 정보부장을 갈아야 한다"고 자신이 아버지에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재규 경질설이 돌던 건 사실이지만, 측근들 중에서 월권과 전횡으로 가장 문제를 일으킨 건 누가 봐도 차지철이었다. 그런데도 박근혜가 차지철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장부터 내쳐야 한다고 건의한 건 최태민 문제로 김재규와 갈등을 겪은 것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대선이 있던 2012년 세간의 관심사 중 하나는 박근혜 후보와 유신 체제의 관계 문제였다. 그때 일각에서는 '잘못을 저지른 건 아버지인데 그 책임을 딸에게 과하게 묻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그것에 대해 당시 인터뷰에서 '박근혜 후보는 유신 체제에서 허깨비가 아니었다'고 반박한 적이 있다. 유신 체제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역할을 했고, 그 당시 경험한 것이 정치인 박근혜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나.

서중석 :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 체제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만큼 영향을 받았느냐고 물었는데 박근혜는 육영수 사거 후 퍼스트레이디로 박정희 다음가는 위치에서 중요 행사에 참석했다. 구국여성봉사단 활동도 기자들이 쓴 여러 글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 폭이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유신 후기에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데 자신도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유신 체제 시기에 퍼스트레이디였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에도 박근혜는 유신 체제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퍼스트레이디 시절이 어쩌면 박근혜 일생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황금기가 아니었을까. 젊은 나이에 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니까. 또 그만큼 주위 사람들이 박근혜를 칭송했을 것이다.

박근혜는 유신 체제 시기에 바로 그런 활동을 하면서 20대를 보냈다. 인간의 의식은 10대에서 20대 시기에 기본적으로 형성된다고들 보고 있는데, 박근혜는 20대의 대부분을 유신 시대에 보냈고 더욱이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하지 않았나. 유신 체제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10·26 이후 새롭게 의식을 변화시킬 만한 계기나 기회를 가졌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도 유신 시대에 받은 영향이 대단히 클 수밖에 없지 않겠나.

박정희 대통령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도 박근혜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 같은 것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권력은 최고 권력자, 대통령한테 집중돼야 하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철저히 보필하면서 그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사고에 익숙한 면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 박근혜는 아버지를 대단히 존경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유신 체제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할까, 여러 가지 얘기를 들은 것은 그것대로 박근혜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예컨대 김형욱 납치·살해 사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이북에서 한 짓 같다'는 식으로 딸한테 얘기했다. 그런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박정희가 중요한 여러 문제에 대해 딸한테 사실과 좀 차이가 나게 얘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워낙 존경하는 아버지가 얘기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아버지 말씀은 박근혜한테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볼 때,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중심에 있긴 하지만 유신 체제는 박근혜가 사고하고 사물에 대해 판단하는 데 아주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정치인 박근혜가 걸어온 길, 그리고 집권 후 행보를 보면서 10·26 때 박근혜의 시간은 멈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여러 번 했다. 모든 것을 10·26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그릇된 사명감을 가진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심심찮게 든다. 특정한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사명감임을 시민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돌아오면, 김재규는 항소 이유 보충서에서 박지만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나.

서중석 : 김재규는 박근혜와 최태민 관계뿐만 아니라 박지만 문제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다. 박지만은 당시 육사 생도였는데, 재학 중에 무단 외출을 한다거나 여자관계가 얘기가 되고 그랬다. 그래서 육사 교장이 골머리를 앓는 등 문제점이 노출되자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박지만을 퇴교시켜서 다른 학교로 옮기거나 유학을 보내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 그렇지만 그런 건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정희가 이런 식으로 나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박정희한테 충고하거나 잘잘못을 얘기하기가 힘들었다. 가족 관계에 대한 박정희의 이러한 태도 그리고 박정희가 아랫사람들의 충고나 비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태도, 이런 것도 10·26 거사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이날 공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에 손을 대며 활짝 웃는 모습. ⓒ연합뉴스


"지나칠 정도로 난잡", 도가 지나쳤던 박정희의 여자관계

프레시안 : 남녀 문제와 관련해 박지만에 관한 얘기도 돌았지만, 여성 편력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훨씬 심각하지 않았나.

서중석 :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관계도 10·26 거사에 약간은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채홍사 역할을 주로 했던 건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였다. 박선호는 의전과장 활동의 90퍼센트가 주로 그런 일이었다고 법정에서 얘기했다. 박선호가 법정에서 박정희의 여자 얘기를 하면 김재규는 그걸 제지하고 그랬다. 그렇지만 합동수사본부의 한 관계자는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여자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난잡하다고 여러 차례 불평했다"고 얘기했다.

10·26 그날에도 있었던 대행사는 한 달에 2~3회, 여성 1명과 함께 벌이는 소행사는 한 달에 7~8회 있었다고 돼 있다.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만 해도 100명이나 됐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가 살아 있을 때에도 여자관계가 많았다. 윤필용이 방첩부대장으로 있을 때 육 여사는 윤필용에게 "윤 장군님, 각하께 여자를 소개하면 소개했지 왜 꼭 말썽 날 만한 탤런트들을 소개합니까", 이렇게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위장 번호를 단 승용차로 밤 나들이를 하곤 했는데, 야행 시간과 장소는 경호실장 박종규만이 아는 천기에 속했다고 강준만 교수가 쓴 책에 나온다. 그래서 육 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야행을 감시했고, 꼬투리가 잡히면 박종규 경호실장한테 심하게 따졌다고 한다. 나도 1970년대에 여러 번 들었지만, 그래서 박 대통령은 육 여사하고 부부 싸움도 많이 했고 그러면서 육 여사가 얼굴에 멍이 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그랬다.

프레시안 : '육박전'이라는 얘기까지 세상에 나돌지 않았나.

서중석 : 당시 나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박정희는 경호원 1명만 대동하고 나가는 심야 단독 행사도 자주 즐겼다. 나중에는 중앙정보부가 여자관계에 깊이 개입했는데,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당시 마담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있지 않았나. 1970년대에 안가에서 근무했던 중앙정보부 직원이 이 부분에 대해 2005년 <한겨레21>에 증언한 게 있는데, 그걸 한 번 보자.

증언에 따르면, 손이 컸던 마담 2명 정도가 주거래처였는데 이 사람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을 100여 명씩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담들이 추천하면 중앙정보부 직원이 면접을 봤는데, 여러 가지를 따진 다음에 대통령 수발을 들게 했다. 그런데 대통령을 접대한 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임신하거나 대통령이 그 여성에게 빠지는 걸 차단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궁정동 안가와 같은 대통령 전용 요정은 5~6군데 더 있었다고 하는데, 경호실장 차지철도 채홍사 역할을 맡았다. 박선호가 구해온 여자들을 차지철이 먼저 심사한 것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 자신이 영화나 TV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왔을 때 "한 번 보고 싶다", 이러면 즉시 그 사람이 불려오기도 했다고 그런다. 지방 순시를 갈 때에도 여자관계가 있었다. 심지어 서울의 요정 아가씨들이 단체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모심기 행사를 시골에서 하는데 박 대통령 가까이에 젊은 여자들이 어른거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 책에는 나온다.

또한 '대통령이 압구정동에 있는 H아파트에 자주 출입한다'는 얘기가 1970년대 후반에 돌았는데, 그것과 관련해 특이한 민사 소송도 들어왔다고 한다.

프레시안 : 어떤 소송이었나.

서중석 : 1981년경 희한한 민사 소송이 들어왔는데, 뭐냐 하면 압구정동 H아파트에 사는 한 주부가 경찰관을 상대로 '갈취한 돈을 돌려달라'면서 반환 청구 소송을 낸 것이다. 그 주부는 아파트 승강기에서 대통령을 목격했는데, 경호원들로부터 즉각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동네의 다른 주부들한테 자기가 본 걸 귀엣말로 전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얘기를 연상시키는데, 문제는 이 주부가 발설했다는 게 한 경찰관 귀에 들어간 것이다. 이 경관은 그 주부한테 눈감아주겠다고 하면서 돈을 갈취했는데, 그 액수가 무려 1000만 원이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세상이 바뀌지 않았나. 그러자 이 주부가 분한 마음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자기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괴롭힘을 당했으니까. 여기서 잠깐 박정희 일기 얘기를 해두는 것도 필요하겠다.

박정희 일기에는 왜 장황한 설명과 합리화가 많을까

프레시안 : 박정희 일기는 어느 정도 남아 있나.

서중석 : 박정희는 1972년 1월 12일,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해 초인데, 이때부터 1979년 10월 17일까지 일기를 썼다. 박근혜 얘기에 의하면 약 200쪽짜리 일기장 5권이 있다고 한다. 그전에 일기를 전혀 안 쓴 건 아니지만 주로 쓴 건 이때로 보인다.

그런데 이게 출간되지 않았다. 왜 출간이 안 된 건지 의아스럽다. 박정희를 연구하는 데 이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 기념·도서관에도 가보고 구미에 있는 박정희 생가, 기념관에도 가봤는데 거기에도 일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더라.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져서 조금 찾아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확보할 수 있는 양은 얼마 안 된다. 거듭 말하지만 박정희를 연구하는 데 이 일기는 꼭 필요하다. 또 어느 나라에서나 중요한 공직에 있었던 사람이 쓴 일기는 출간을 많이 한다. 설령 출간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연구자들은 볼 수 있게끔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도 박정희 일기를 꼭 출간하거나, 그게 정 어렵다면 적어도 연구자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이 문제와 관련해 장제스 사례도 참조할 만하다. 중국사 연구자 이원준에 따르면, 장제스는 1917년부터 1972년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작성했다. 2005년 장제스의 후손들은 방대한 장제스 일기를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 기증했다. 2006년 후버연구소는 그 일기를 공개했다. 그전까지는 부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일기가 그 전모를 드러내면서 장제스 일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연구 성과들도 나타나게 된다. 거액의 세금을 들여 박정희 신격화를 위한 각종 관변 사업이 진행되고 있을 뿐 자료 공개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한국과 대조적인 풍경이다. '편집자') 그런데 이 일기는 내가 본 부분만 가지고 얘기하면 좀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일기는 대개 자신의 일과를 담담하게, 짤막하게 서술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내면의 세계도 간단히 서술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기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위해 쓴 것 아니냐는 느낌을 주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박정희 일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설명하는 게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길게, 그러니까 상대방이 짧은 설명으로는 설득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 많다. 특히 5·16쿠데타와 유신 체제에 대해서는 그걸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북한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이나 반공 의식도 일기에 참 많이 담겨 있다. 그런데 박정희 일기를 읽어보면 홍보, 선전용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글이 많다. 그런 게 일기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 부분의 비중이 너무 큰 것 아닌가, 꼭 누군가를 설득해보려는 것처럼 그런 부분을 지나치게 길게 쓴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현재 나와 있는, 즉 내가 볼 수 있는 것만 놓고 이야기하면 박정희 일기는 이런저런 식사(式辭), 담화, 유시 같은 걸 읽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내가 여기서 일기 얘기를 꺼낸 건 육영수 여사에 대한 기술이 여러 군데 나오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30일 자로 돼 있는 일기는 순애보 같다고 할까, 순정적인 면을 보여준다. 육 여사가 사거한 지 한 달여밖에 안 된 때이기 때문에 육 여사를 그리워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소설이나 시에도 나오는 구원의 여성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1975년 12월 12일 일기의 경우 이날이 은혼식 날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게 육 여사에 대한 마음을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이후 일기들, 특히 여성 관계에서 난잡함이 아주 심했다는 얘기를 듣는 때인 1978년 4월 12일 일기에도 그와 비슷한 얘기가 들어 있다면 이건 이 사람의 의식이 어떻게 돼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중적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어떤 특징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박정희의 여자관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 이런 부분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배꼽 아래 문제는 넘어가자? 박정희 여자관계, 그럴 사안 아니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박정희의 여성 문제에 대해 박정희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엽색이나 친일 문제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훼손해선 안 된다며 이런 주장도 나온다. "그때는 '배꼽 아래 얘기는 하지 말라'는 얘기가 돌 때", "불륜은 문제가 됐지만 '로맨스'는 용납되던 때였다."

그러나 친일 문제도 그렇지만 엽색 문제도 그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면서 감쌀 사안이 결코 아니라고 본다. 박정희의 행위는 불륜이 아니라 이른바 '로맨스'라고 치부할 근거도 없고, 도가 지나쳐도 너무나 지나쳤다는 숱한 지적도 가벼이 여길 문제가 아니다. 아울러 '허리띠 아래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심각한 문제임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도 있다.

덧붙이면, 김일성 일가에 대해서는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며 핏대를 세우면서도 박정희의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거나 심지어 '영웅호색은 당연한 일'이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일각에 있다. 북한에서 이뤄진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쌍심지를 켜면서 남한에서도 심각했던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경우와 닮은꼴이다. 그처럼 습관적으로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 문제에서도, 독재와 인권 탄압 문제에서도 박정희건 김일성이건, 남한이건 북한이건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본다.

서중석 : 박정희 대통령의 여성 관계를 보면 근대적 정치인, 더구나 민주주의 정치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술이나 여자에 탐닉한 것에도 전근대 왕조 시대의 의식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일본 사무라이, 군인들한테서 박 대통령과 비슷한 여성관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신용구는 자신의 저서에 박정희의 성적 방황에 대해서 박정희가 갖고 있는 유기(遺棄) 불안, 버린다는 뜻의 그 유기인데, 그것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심화됐음을 박정희의 여자 문제는 뚜렷이 보여준다고 썼다. 여자관계에서 가학성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도 어떤 사람들은 하고 있는데, 그것과 관련해 신용구는 이렇게 썼다. "스스로를 매우 위대한 존재로 인식한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그의 성적 행동이 가학적인 양상을 띠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피학성을 띠었을 가능성도 있다. 박정희는 홀로 있는 공간에서조차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강박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라고 주장했다.

일기에서도 부분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박정희에게는 불안, 죄의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난 박정희가 선글라스를 자주 쓴 것도 이것과 좀 연관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한 불안 같은 것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성적인 자극에 탐닉하게 된 건 아닐까, 그러한 불안이나 죄의식이 유신 말기에 그토록 강렬한 성적 충동성을 갖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신 쿠데타를 계획하고 유신 체제를 설계할 무렵으로 보이는 1972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일기를 썼다는 점도 이것과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사람이 유신 체제에 대해 죄의식 같은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일기를 쓰게 된 것 아닌가, 난 그런 생각까지 든다.

예컨대 일기를 보면 '유신에 대해서 말들이 많지만 역사의 심판에 맡기고 싶다', 이런 얘기를 몇 군데에 썼다. 자신의 행위가 뭔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쓴 것 아니겠느냐, 난 오히려 그렇게 해석되더라.

이 해석이 맞는지는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하여튼 박정희의 여자관계에서 정신적 방황과 충동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지철이 부마항쟁에 관해 "100만~200만 명쯤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얘기하거나 10·26 그날 대행사 때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라고 얘기한 그런 것들이 오히려 박정희한테는 강하게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거기서 편안함 같은 것, 또는 불안함으로부터 도피라든가 탈출 같은 걸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것이 여성 관계에서도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여든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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