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에 있는 H사에서 일하다 백혈병 진단을 받은 이모 씨가 28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 OLED사업부에 화학제품을 납품하는 회사였다.
삼성반도체나 외주 하청업체에서 그동안 백혈병, 뇌종양 등의 희귀질환이 집단 발병한 사례는 알려져 있지만, 삼성에 화학제품을 공급하는 업체에서의 백혈병 산재 신청은 처음이다.
LCD 모니터 생산 과정에서 사용되는 제품 생산…"환풍기 틀어도 역한 냄새 심했다"
이모(31) 씨는 아이 둘의 아빠다. 2012년 H사의 전자재료팀에 입사해 2015년 10월 급성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이 씨는 주로 전극보호용 방습절연제나 세정제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LCD모니터 등 전자제품 생산 과정에서 사용되던 제품이었다. 각종 화학약품을 정해진 양만큼 계량해 반응기에 투입하고, 혼합이 완료되면 이를 용기에 포장하고 포장 후에 반응기를 세척하는 것이 이 씨의 일이었다.
이들 물질을 혼합하는 과정에서 용액이 눈과 피부에 직접 튀기도 했고, 약품 분진을 호흡기로 흡입하는 일도 있었다. 이 씨는 "용액이 튄 작업복은 세탁해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고 제품 특성상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했는데 환풍기를 가동해도 역한 냄새가 심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완성된 제품은 삼성전자 중국법인 등에 납품됐다. 이 씨는 작업 과정에서 사용한 물질명을 정확히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이 물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이 씨가 사용한 화학약품과 이 씨의 백혈병 발병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당장 알기는 힘들다. 그러나 다수의 화학제품을 사용하는 삼성반도체 등 국내 전자산업에서 백혈병, 뇌종양, 다발성경화증 등 희귀병 발병 사례는 400명 가까이 된다.
반도체노동자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등이 포함된 '전자산업 백혈병 산재 인정 촉구 노동시민단체'는 이날 전북 전주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피해 노동자가 일한 현장은 십수 년 전부터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이 경험한 현장과 많은 점에서 닮았다"고 주장했다.
100시간 넘는 연장근무를 1년에 5달이나…"하루 20시간 넘게 일하기도"
특히 이 씨는 2014년과 2015년 백혈병 진단 직전까지도, 한 달에 100시간에 달하는 연장근무를 자주 하곤 했다.
이 씨는 이날 기자 회견을 위해 작성한 편지 글에서 "첫 아이가 태어난 무렵부터 제품의 출하량이 급격하게 늘었고 그를 맞추기 위해 자는 시간 외에는 일만 했다"고 말했다. "하루 12시간 근무가 잦았고,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20시간 이상 근무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H사에서 제공한 이 씨의 연장근무 기록을 보면, 2014년 4월에 104시간, 7월에 다시 104.5시간, 8월에 116시간, 9월에 112.5시간, 12월에 106.5시간 연장근무를 했다. 이 씨는 2015년에도 2월에 98.5시간, 3월에 98시간을 더 일했으며 백혈병 진단 직전인 9월과 10월에도 60시간 넘는 연장근무를 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씨의 몸에 이상이 느껴진 것은 지난해 10월부터였다. 몸에 반점이 생기고 감기와 같은 증상이 자주 발생해 병원을 다녔지만 나아지지 않았고, 피검사 결과 염증수치가 높게 나와 회사에 휴가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 씨는 피검사 결과를 받아든 날도 야간근무를 했다.
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는 "최근 법원의 백혈병이나 난소암, 뇌종양 등 희귀질환에 대한 산업재해 관련 판결을 보면, 과도한 연장근무를 한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며 "이 씨의 경우에도 거의 매달 100시간 가까이 연장근무를 한만큼 백혈병 발병의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는 8일 골수이식 수술을 앞두고 있는 이 씨는 편지글에서 "값비싼 치료비와 주기적인 검사 비용도 엄청난 부담이지만, 무엇보다 3살 된 딸과 이제 태어난지 2주된 아들을 키워야 하는데 딸아이를 안기에도 힘이 떨어져 나도 모르게 벌벌 떠는 손을 보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만 간다"고 하소연했다. 이 씨는 "그저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었을 뿐인데 아이들, 그리고 아내 보기가 정말 미안하고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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