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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현대 중국 화가는 얼굴에 집착하나?

[김영미의 중국 미술 깊게 읽기] 위에민쥔이 그리는 웃음과 냉소 사이

위에민쥔(岳敏君)은 자신의 초상화로 하나의 캐릭터가 되었다. 눈을 감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는 그의 얼굴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 그것은 확실히 '소비'의 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상품성 있는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포스트 사회주의 중국에는 특별히 사람의 얼굴을 그린 그림들이 많다. 마스크 시리즈로 유명한 정판즈(曾梵志)도 그렇고, 사시 눈을 하고 있는 도시의 여자들을 그린 펑정지에(俸正杰)도 그렇고, 대머리로 유명한 팡리쥔(方力钧)도 그렇다. 그래서 중국 밖의 해외 컬렉터들은 의문을 갖는다. 왜 중국 작가들은 사람의 얼굴을 많이 다루는지.

아이콘

▲ [Untitled](2005년). ⓒyueminjun.com.cn

냉소적 리얼리즘(Cynical Realism)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것은 중국의 큐레이터 리시엔팅(栗憲庭)이 장샤오강(張曉剛), 위에민쥔, 그리고 팡리쥔의 천편일률적인 모습 뒤에 사회주의 시기 문혁의 아픔이 묻어있다는 의미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즉 '냉소적'이라는 형용사는 웃고 있는 표면적 얼굴 속에 있는 어떤 상태를 지적한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뭐 그런 식인데 그런 해석은 실제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정치적 이념과 예술을 연관시키는 사고의 틀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위에민쥔은 말한다. 자신의 그림 속에는 결코 냉소적인 것이 들어있지 않다고. 그저 표면적인 것만 읽어주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림 뒤에 무엇을 숨기고 있다면 그것은 기표, 기의와 같은 언어 작용을 하는데, 자신의 그림은 겉 표면만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그림이 만화 주인공인 가필드(Garfield)나 땡땡(Tintin)처럼 그저 하나의 즐거움을 주는 캐릭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위에민쥔의 말을 따르자면 그의 그림 속 얼굴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아이콘으로서 기능하지는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를 생각해 보자. 중국의 현대 작가들이 다루는 사람의 얼굴에 대해 냉소적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그의 그림이 완전히 유별되어 독자적으로 위치하는가 말이다.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포스트 사회주의 시기 중국의 현대 작가들의 이런 경향의 그림들은 분명히 그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그것은 지난 사회주의 시기에 가장 많이 그려진 얼굴, 즉 국가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의 초상화와 연관성이 있다.

마오의 초상화는 지난 사회주의 시기 가장 공적이고 권위적인 장소에서 권위와 중국의 사회주의를 상징했다. 그곳에는 어떠한 감정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모습 그대로 이념의 상징이자 권력의 아이콘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얼굴은 그저 몸의 가장 위에 붙어있는 머리로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띤 '얼굴'이 될 수 있으며, 그 얼굴은 그때부터는 그저 어느 한 사람에 불과하지 않게 된다.

중국의 현대 작가들은 그런 영웅의 얼굴에 무명의 개인적인 얼굴들을 대치시킨다. 그래서 마오를 대신한 작가 개인의 얼굴은 권위와 이데올로기라는 의미를 띠기보다는 그렇게 사용되었던 지난 사회주의시기 미술양식에 대한 직접적 저항으로 읽힐 수 있다.

실제로 그것은 한 개인의 초상화를 보는 것에 매우 길들여진 작가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얼굴은 그리고 무엇을 꼭 상징할 필요가 없는 '얼굴'들은 그렇게 중국 현대 작가들의 예술적 표현대로 표출되었다. 위에민쥔 역시 그러한 것으로부터 결코 멀지 않다.

'나 자신'

▲ [Lying head](2008년). ⓒyueminjun.com.cn


이로써 중국 현대 작가들이 그려낸 '얼굴'들은 이데올로기와 상관이 없어진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상징적 얼굴을 배격한다. 무엇을 의미하고 싶지 않으며 그저 예술적 표현으로서 사람의 얼굴이 그려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그린다. 물론 이 경우도 신체의 일부로서 머리를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의미를 띠는 '얼굴'이 된다.

질 들뢰즈는 얼굴이란,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시선에 대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남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을 위해 얼굴을 만들어낸다. 이것을 그는 '감정-이미지(The Affection-image)'라고 했는데, 중국 현대 작가들의 초상화들은 바로 이러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들의 표면적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순수 예술(Fine Art) 이외에 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실험 예술과의 연관성이다. 당시 수많은 행위 예술 작가들의 주요 소재는 작가 자신의 몸뚱아리였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멀어지려하는 극단의 행동이었고 작가 자신의 몸은 예술적 표현의 사물로 간주되어 모든 사회적 반항 행위의 적극적 표현 수단으로 사용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예술 표현에 적극적으로 작가 자신을 소재화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마오 이외에 어떤 개인을 초상화로 그려낸다는 것은 그린 사람도 그 얼굴도 모두 마오와 동격으로 취급될 사건이니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상관성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현대 작가들의 '나 자신'에 대한 표현은 그것 자체가 정치적 행위라기보다는 정치로부터 분리되고 싶은 예술적 자유에 대한 강력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에민쥔의 작품은 '모자 시리즈(Hats Series, 2004, 2005)', '부재 시리즈(Scene Series, 2000~ 2011)'와 같은 것에서는 정치적이고 권위적인 것과 연관성을 지닌다고 해석되어 왔다. 또한 '미로 시리즈(Maze Series, 2006~2011)'와 같이 전혀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항상 그의 그림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저렇게 크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상황과 상관없이 위에민쥔이 자신과 대화하면서 그의 작업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복, 강박, 우울

▲ [Untitled](2005년). ⓒyueminjun.com.cn


그러니까 그의 얼굴 속 웃음은 반드시 다시 살펴볼 필요는 있다. 특별히 한 그림 안에서 반복이 될 경우 말이다. 내부적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반복적인 웃음들은 그 자신의 내면과 관련성 있어 보인다.

콰로니(Grazia Quaroni)는 그의 웃는 얼굴이 멜랑꼴리(melancholy)하게 읽힐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위에민쥔은 자신의 웃음과 관련하여 부처의 웃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통스러운 성찰을 연관시킨다. 물론 부처의 자비로운 웃음을 생각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초탈한 웃음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의 웃음은 리시엔팅(栗憲庭)이 말하는 '냉소적'이라고 표현한 그런 시니컬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웃음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어떤 장치로 읽힐 때, '웃음'이라는 1차적 해석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서려지게 된다. 또한 그의 웃음은 표면만 있고 그 밑에 아무 것도 의미하는 것이 없다고 할 때, 바로 그것은 철저하게 나 자신의 개인적 감정과 상관된 것이 된다.

반복적인 모습과 얼굴이 위치한 장소가 단지 자유를 이끄는 선봉대에 있고(<自由引导人民>(1996년)) 천안문 앞에 있기 때문에([The Execution](1995년)), '정치적'이라고 읽히는 것은 위에민쥔을 다시 사회주의 시기로 돌려보내는 일이 된다. 그는 그 시기를 벗어나고자 했고 그 시기를 벗어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가 말하는 '표면' 이라는 것은 이것이다.

다른 중국의 현대 작가들의 작품 역시 위에민쥔이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듯이 다른 각도에서 읽힐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이 정치의 예술화를 이뤘던 사회주의 시기의 틀 속에서 보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나 혹은 비평가가 그것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틀 안에서 읽어낸다면 그것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크 랑시에르의 말대로 예술 작품이 곧 정치는 아니지만, 그것에 대한 정치적 해석은 충분히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민쥔의 웃음에 대한 해석(텍스트 밖)과 웃음을 그려내는 것에 대한 것(예술행위) 사이에는 수많은 연결지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가 말한 '표면'의 층차로부터 웃음의 중층적 측면, 즉 얇게 포개져 여러 겹을 이루어 하나의 웃음으로 드러난 지점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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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매체에 중국 현대 미술과 현대 미술 작가들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초기 경극 형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희곡예술연구원에 방문학자로 있으면서 한국 전통극 배비장전을 경극으로 기획하고 연출했다. 2003년 코넬 대학교 동아시아 프로그램 방문 연구를 계기로 중국 영화 비평을 시작하여, 전주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패널로 활동했다. 저서로 <현대 중국의 새로운 이미지 언어 : 미술과 영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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