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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2016 '어묵 혁명'은 왜 일어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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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2016 '어묵 혁명'은 왜 일어났나?

[기고] 2014 '우산 혁명' 후 2년…홍콩, 어디로 가나

"홍콩을 되찾자. 이것은 시대적 혁명이다!"

2016년 춘절 홍콩에서는 '어묵'을 둘러싼 충돌이 일어났다. 어묵 등을 파는 노점상 단속에서 촉발된 갈등이 밤새 길거리 곳곳에서 방화와 무력 충돌로 이어지고, 경찰이 시민에게 총까지 겨누는 충격적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는 어묵 '혁명' 또는 어묵 '폭동'으로 불린다. 왜 어묵이 이런 충돌을 낳았을까? 지금 홍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엇보다 이번 충돌 사건은 홍콩인, 특히 젊은이들의 분노가 사소한 일에서도 폭발할 정도로 임계점에 달해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분노의 연원은, 2014년 지도자(행정장관) 직선을 요구하며 반환 후 최대 규모인 1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도로 점령에 나섰던 우산 운동이 무력하게 끝난 후 홍콩에 만연해있는 좌절감이다. 당시 우산 운동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홍콩 중심가를 79일 동안 평화적으로 점령했지만, 체제와 제도를 털끝 하나 바꾸지 못하고 끝났다. 그리고 이번 어묵 충돌에서 이 무력감과 좌절감이 극심한 분노로 변해 표출된 것이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 우산 운동 기간 홍콩인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서로의 열정과 자발성에 끊임없이 감탄했었다. 수업은 거부하지만 공부는 계속한다며 등장한 길거리 자습소, 모두의 희망을 빼곡히 적은 '존 레논의 벽', 곳곳에 만들어진 물자 보급소, 매일 아침 새롭게 등장하던 문화예술 작품…. 홍콩 민주주의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평생 '운동'이나 '정치'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길거리에 나왔다.

그런데 채 2년도 되지 않아 분위기는 암울해졌다. 젊은이들은 폭력 외에 이제 무슨 방법이 있겠냐며 극단적 방법에 기대려 한다. 이 변화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잠시 2년 전 우산 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 우산 운동 당시 곳곳에서 벌어진 자유토론 ⓒ장정아

자발성의 딜레마

"누구도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우산 운동 기간 등장했던 이 슬로건은 우산 운동의 본질을 담고 있다. 우산 운동은 대학생회연합과 중고등학생 단체, 그리고 교수와 원로 목사 등으로 이뤄진 몇 단체의 주도로 시작되었지만, 시작부터 이미 그들의 통제에서 벗어나있었다. 우산 운동은 무엇보다 자발성에 기반을 두고, 이는 운동 기간 내내 폭발적 힘인 동시에 족쇄가 되었다.

우산 운동 이전 홍콩 사회 운동의 등장인물은 지난 20여 년간 거의 변함이 없었다. 2006년경부터 큰 이슈가 된 유적지 철거 반대 운동과 2012년 중국식 애국 교육 반대 운동 때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주요 인물과 단체, 활동 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이른바 '민주 없는 자유'에 익숙한 대부분의 홍콩인에게, 사회운동은 '그들'만의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우산 운동 기간에는 새롭게 등장한 개인과 집단이 많았다. 시민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더 많은 이들이 거부감 없이 도로 점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대 위의 지도부는 필요 없다. 오직 군중만이 있을 뿐"이라는 우산 운동 구호는 더 많은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뛰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많은 논란을 낳았다. 이는 홍콩 사회운동의 취약한 기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평소 시민운동가와 대중 간에 큰 신뢰나 밀접한 관계가 없는 홍콩에서, '중앙'에서 결정하는 방식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얻기 힘들었다.

특히 시위가 성과 없이 길어지며 점점 초기의 열정과 감동은 옅어지고 내부의 의견 차이가 두드러졌다. 운동의 진행 방식과 노선, 소통과 의사 결정 방법에 대해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대규모의 도로 점령이 시작되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시위대 일부가 정부 건물에 진입과 봉쇄를 몇 차례 시도하다 실패한 후 시위대 내부의 갈등과 불신은 더욱 심해졌다. 운동을 주도하는 단체들은 소통 부족과 판단 착오에 대해 끊임없이 사과해야 했다. 운동 중반부터는 언제 어떻게 퇴장을 할지 또는 끝까지 싸울지를 둘러싸고 '지도부'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고, 다양한 참가자들과의 의견 차이는 더 극심해졌다.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일부의 행동을 지도부가 견제하면 불만과 항의가 빗발쳤다. 지도부는 "이 모든 사람의 의견을 도대체 어떻게 수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고 사후에 털어놓았다. 자발성과 순수한 열정에 기반을 둔 대규모 점령 운동이 어떻게 민주적으로 의견을 수렴하며 장기간의 싸움을 이어나가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로를 점거하고 곳곳에서 누구나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며 끝없이 토론하는 장관을 역사상 처음으로 연출해낸 우산 운동은, 결국 무력하게 해산되며 막을 내렸다.

폭력의 딜레마

"인민은 잔혹하다. 인민이 원하는 것을 당신들이 못 해내면 인민은 당신을 뱉어버릴 것이다."

우산 운동 1년을 평가하며 당시의 주요 인물들이 모인 좌담회에서, 더 이상 비폭력 시위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주장하던 한 발표자의 발언이다. 대중이 원하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현재 홍콩에 만연한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우산 운동이 남긴 좌절감은 극단적 세력이 급속히 힘을 얻는 토양이 된 것이다.

홍콩인들은 역사적으로 폭력적 정치 행동과 시위에 대해 반감이 아주 강했다. 이는 중국 본토의 정치 경제적 혼란을 피해서 '생존을 위해' 건너온 이주민이라는 홍콩 사회의 성격과 관련된다. 1967년 홍콩에서는 한 공장의 파업이 중국 본토 문화 대혁명의 영향으로 격렬해져 폭동이 되었다. 당시 폭탄이 난무하는 폭동을 보며 홍콩인들은 '대륙식 폭력'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안정을 중시하는 홍콩인의 심리 상태는 이런 역사적 트라우마와 연결된다.

내가 목격한 우산 운동 초반의 집회에서는 "평화로운 불복종이 바로 홍콩 정신이다", "우리는 중국 홍위병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우산 운동은 처음부터 중앙 정부에 대한 대항이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언론이 붙인 '우산 혁명'이란 이름은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한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며, 시위대는 운동이 오직 직선제를 요구하는 비폭력적 민주 운동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평화적 시위가 결국 아무 성과 없이 끝나자, 홍콩인들 사이에는 중국이라는 큰 거인을 상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회의감, 그리고 그 거인이 자신의 '조국'이라는 난처함이 자리 잡았다. 이 속에서 많은 젊은이들은 더 이상 '비폭력'과 '평화'를 자랑스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폭력에 대한 반감을 뼛속까지 가지고 있던 부모 세대가, 자신이 저항 없이 편하게 지낸 탓에 자식 세대가 희생을 치른다고 느껴 죄책감을 가지면서, 급진적 행동에 대한 공감대는 점점 확산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의회(입법회) 보궐 선거에는 폭력 투쟁을 통한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뛰어들어 관심이 집중되었다. 강경파 후보자로 나온 홍콩 대학교 대학생 렁틴케이는 "나는 시대의 부름에 응하겠다"며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자고 주장해 젊은 층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이에 맞선 온건파 후보자인 앨빈 영은 "나는 시대의 부름에 '선량한 마음으로' 응하겠다"고 응수했고, 결국 중산층 중년층의 지지로 선거에서 이겼다. 그러나 점점 많은 청년층이 비폭력 저항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복잡한 이론이나 불확실한 장기적 싸움보다 선명한 '독립'이나 '폭력'이라는 구호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연합뉴스

무엇을 위한 혁명인가

"어묵 혁명은, 홍콩이라는 우리의 도시가 진정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후 홍콩은 한동안 성공적으로 본토에 통합되는듯 보였지만, 일련의 사건들은 갈등을 심화시켰다. 2003년 정부가 국가 전복과 반역 행위를 금지하는 국가안전법을 입안하려던 시도는 50만 명의 반대 시위로 철회되었다. 본토인의 홍콩 여행 규제가 풀리면서 밀려드는 여행객과의 갈등도 빈번해졌다. 홍콩 정부의 정책은 홍콩인의 이익보다 중국 정부 정책에 발맞추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 보였다.

홍콩의 젊은 세대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불안을 겪어온 세대이다. 1984년 홍콩의 중국 반환 결정, 1989년 천안문 사태, 1997년 중국 반환과 아시아 금융 위기, 2003년 사스 그리고 이후 이어진 많은 사건들. 청년들은 앞날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을 점점 '중국에 종속된 지위' 때문으로 여기게 되었다.

실제 홍콩의 위기는 훨씬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문제지만, 분노의 대상은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입법회 보궐 선거에서는 총 43만 표 중 온건 민주파가 16만, 친정부 정당이 15만, 그리고 강경파가 6만7000표를 얻어 온건파가 당선되었지만, 강경파의 득표 역시 놀라운 성적이었다. 이들의 주요 득표 기반은 젊은 빈곤층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홍콩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한 강경파에 대해 한편에선 깊은 우려가 제기된다. 강경파는 '인민'과 '자주', '혁명'과 '독립'을 내세우지만, 이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극히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홍콩의 이익이 짓밟히는 상황에서, 홍콩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본토의 민주화나 인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홍콩에서 매년 최대 규모의 집회를 열어 기념하던 1989년 천안문 사건도 더 이상 추모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홍콩의 이익을 침해하는 중국 정부와 본토 '동포'들은 모두 적(敵)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또한 대중의 자발성을 찬양하지만, 다수의 대중을 참을성 있게 설득하는 활동은 무의미하다며 즉각적 행동을 제창한다. 무엇보다도, 이 강경파가 추구하는 홍콩적 '가치'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하다. "홍콩인의 이익을 침해하지 말라"는 주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초 일어난 어묵 충돌은 이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어묵 충돌은 과도한 노점상 단속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 강경파의 개입, 경찰의 미숙한 대응이 합쳐져 벌어진 사건이었다. 많은 이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1997년 반환 후 처음으로 시민에게 총을 겨눈 경찰의 모습이었다. 우발적인 하룻밤의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정부에 대한 반발로 '혁명'이란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선, 이제 모든 갈등이 폭력으로 치닫는 상황에 참담함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 밤새도록 곳곳에 불을 붙이고 보도 블록을 부수며 경찰과 대치하고 기자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한 어묵 '혁명'이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데에 가장 큰 우울함이 있다.

홍콩은 어디로 갈 것인가 : 정치적 구호와 커뮤니티 활동 사이에서

지난 4월 3일 홍콩 금상장영화제에서는 홍콩 독립 영화 <십년(十年)>이 최고 작품상을 수상했다. 10년 후의 홍콩을 암울한 미래로 그려낸 영화다. 가상의 미래는 숨 막히도록 어둡다. 국회의원을 총으로 쏴서 혼란을 야기하여 '국가안전법'을 시행하려는 음모, 표준어가 강제되어 더 이상 모어인 광둥 어를 쓸 수 없게 된 곤혹스러움, 홍콩 독립 운동을 하던 이의 분신자살, 홍위병 같은 '소년군'의 출현,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홍콩에서 자기 몸을 표본으로 박제시켜버리는 젊은 남녀. 영화 속 여인은 슬픈 표정으로 말한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가장 많이 배운 건 '음모'요, 가장 크게 잃어버린 건 '신임'이다."

홍콩에서 이렇게 과감하고 노골적으로 정치 문제를 다룬 영화는 드물었다. 이 영화는 제작만으로도 주목을 받았고, 대표적 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까지 받으며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이 영화에 상을 줄 용기를 낸 영화제 측에 감사 드린다"는 수상 소감이 보여주듯, 민감한 홍콩 문제를 문화예술에서 전면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예술성이 아닌 정치적 의미만으로 작품상을 주는 건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등장은 갑작스러운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나는 지난 2월 홍콩에서, 2014년 우산 운동을 이끌었던 10여 명의 활동가를 만나, 우산 운동이 남긴 유산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어떤 이는 아무 것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고, 어떤 이는 '유토피아의 경험'이라 답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우산 운동 이후 문화예술계의 사회의식이 크게 높아진 것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라고 했다.

우산 운동은 결코 성공한 운동이 아니다. 지도자 직선 요구라는 목표는 완전히 실패했고, 많은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대학생들은 다시 취직 준비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우산 운동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운동 이전과 이후의 홍콩은 달라졌다. 고등학생들은 학교에서 국기 게양식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운동 참가자 중 많은 이들은 새로운 조직이나 정당을 만들고 있고, 그 중에는 급진화된 조직도 있다.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각자 살고 있는 지역 사회로 돌아가 일상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런 커뮤니티 운동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민주 운동의 기지를 커뮤니티에서부터 만들자"며 명시적인 정치 운동을 목표로 하는 단체도 있고, 큰 것을 바꾸기 어렵다면 주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소중한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다. 영화 <십년>이 두 달 만에 불명확한 이유로 상영 중단되자, 제작진은 홍콩 전역에서 50여 개의 단체와 손잡고 34개 지역에서 동시 다발 무료 상영회를 열어 하룻밤에 6000명의 시민을 끌어모았다. 이런 전례 없는 현상은 바로 커뮤니티 운동의 뒷받침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의 일부로서의 홍콩을 넘어 '진정한' 홍콩을 찾으려는 고민과 모색은 분명히 하나의 흐름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는 언론에 주로 보도되듯 중국 본토와의 격렬한 대립으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허름하고 보잘것없는 뒷골목과 이웃, 쓰러져가는 가게와 건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움직임도 이런 흐름의 하나이다. 어묵 충돌의 근본 원인도, 홍콩의 독특한 일상문화와 기억이 너무 빨리 사라져간다는 불만과 상실감에 있었다.

홍콩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한편에선 점점 무장 혁명과 독립 등의 정치적 구호가 격렬해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선 주위 이웃의 물건을 고쳐주고 이야기하며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려는 조그만 움직임도 널리 퍼지고 있다. 중국과의 대결을 통해서든 공동체의 발견을 통해서든 진정한 홍콩을 찾으려는 갈구는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 되고 있다. 이 부름에 대한 답을 어떻게 찾아나갈지는 이제부터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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