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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명분 투표' 폭로에도 박정희 "신은 내게 중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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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명분 투표' 폭로에도 박정희 "신은 내게 중책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4> 유신 체제, 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1974년 하반기에는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이 각 부문에서 그 이전보다 더 강하게 일어난다. 유신 반대 세력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역량을 모으는 모습도 나타난다.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대응했나.

서중석 : 1974년 하반기, 특히 연말과 1975년 연초에 걸쳐 동아 광고 사태가 벌어지면서 소란한 분위기였는데, 그런 속에서 1975년 1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기습적으로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유신 헌법 찬반 국민 투표를 2월 12일에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하려면 그것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다. 찬반 토론을 금지했다. 공식적으로는 그랬지만, 실제로는 반대는 철저히 봉쇄하고 찬성, 지지 쪽만 음성적인 여러 형태로 방송 같은 걸 통해 나가게 했다. 그뿐 아니라 1969년 3선 개헌을 위한 7·25 특별 담화 때 했던 것과 똑같이, 1975년 이때도 만약 국민 투표에서 지면 하야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이거 찬성표를 던지지 않으면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냐?', 국민들한테 이런 두려움을 갖게 하는 특별 담화였다.

이러한 박 대통령의 국민 투표 발표에 대해 정치학을 전공한 김용호 교수는 "유신 정권의 국민 투표 실시 방침은 국민 투표 독재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나중에 논문에서 썼다. 독재자들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형식적인 국민 투표 방식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했다. 특히 유신 헌법에 대한 공개적인 찬반 토론을 금지한 속에서 3선 개헌 때와 같이 투표에서 지면 자신이 퇴진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유신 헌법에 찬성하도록 유도했다는 건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다.

느닷없는 국민 투표 발표와 유치찬란한 홍보 노래 '유신새야'

▲ 1975년 2월 12일 국민 투표를 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은 왜 이 시기에 갑자기 국민 투표 카드를 꺼낸 것인가.

서중석 : 국민 투표 방안을 이때 왜 제시했느냐. 이걸 파악하려면 1974년 하반기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신 정권은 1974년 8월 23일 긴급 조치 1호, 4호를 국내외 압력 때문에 할 수 없이 해제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계속 인권 문제를 제기했고, 구속자를 석방하라는 요구도 지속적으로 나왔다. 그리고 11월 22일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때도 이런 인권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들 보고 있다.

이런 국내외 압력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이 일정하게 양보를 해서, 유신 체제에 반대했다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석방하기 위한 구실로 국민 투표 실시를 구상한 것으로 난 본다. 아울러 그러한 국민 투표를 통해 유신 체제의 정당성을 국민들한테 과시하려는 의도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긴급 조치 1호, 4호로 갇힌 사람들을 국내외 압력 때문에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냥 석방할 수는 없으니까 그 명분을 만든 것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유신 체제에 대한 강한 지지를 받았으니까 이제 갇혀 있는 사람들도 석방하겠다', 이런 식으로 조치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민 투표 방안이 제시됐다고 볼 수 있다.

국민 투표에서 공식적으로는 찬반 토론을 금했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찬반 토론을 금한 게 아닌 것이, 유신 체제를 갖가지 방식으로 찬양하고 옹호하는 활동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유신새야'라는 건데, 녹두장군 전봉준과 관련된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노랫말을 바꾼 것이다. 이걸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만들어서 교사들을 동원해 보급했다. 교사들한테 각 가정을 방문해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보급하도록 지시하고, 학부모들을 상대로 국민 투표에 기권하지 않도록 적극 독려하는 활동도 하게 했다. (동아일보 1975년 1월 30일 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기도 교사들은 방학 중임에도 매일 오전 10시 반까지 학교에 출근, 교장의 지도 아래 '유신새야'를 합창한 후 각 가정을 방문해야 했다. '편집자') 그러면 '유신새야'는 어떤 노래였느냐. "새야 새야 유신새야 / 푸른 창공 높이 날아 / 조국 중흥 이룩하고 / 자주 통일 달성하자 / 새야 새야 유신새야 / 너도나도 잘살자는 / 유신 헌법 고수하여 / 국력 배양 이룩하자 / 유신 유신 우리 유신 / 우리 살길 오직 유신 / 유신 체제 반대하면 / 붉은 마수 밀려온다", 이런 유치한 내용으로 돼 있다.


이런 국민 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하니까, 미국에 있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바로 "이것은 국민 투표라는 이름을 내걸어 민의를 조작하는 제4의 쿠데타로 단정한다"고 얘기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 같은 재야 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500만이라고 나와 있는데, 500만 가톨릭 신자들은 국민 투표일인 2월 12일을 구국 기도의 날로 정하고 성당과 교회에서 구속 학생을 위해 기도하고 상오 7시, 10시, 정오, 하오 2시, 4시, 6시에는 일제히 종을 울리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언론 매체에서는 동아일보를 빼놓고는 이러한 비판 활동을 일절 다루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제대로 알려지지는 못했다.

부정으로 얼룩진 국민 투표, 그런데도 박정희는 "신은 나에게 또다시 중책을…"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 직후인 1972년 11월 21일 실시된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는 대리 투표, 무더기 투표 등의 문제가 지적됐다. 1975년 이때는 어떠했나.

서중석 : 2월 12일 국민 투표에는 유권자의 79.8퍼센트가 참여했는데, 유효 표의 73.1퍼센트가 유신 헌법 존속에 찬성했다. 1972년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유효 표의 91.5퍼센트가 찬성한 것에 비하면 국민의 지지가 현저히 줄었다고 평가하는데, 사실 이 73.1퍼센트가 제대로 된 투표 결과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73.1퍼센트는 과연 어떤 성격의 것인가. 그 당시 모든 게 막혀 있는 사회라 전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의 초등학교 교사 허헌구는 양심선언을 통해 부정 선거 획책 과정과 대리 투표 사실을 폭로했다. 또 공화당원 김진환은 27명분의 투표용지로 대리 투표를 했다고 고백했다. (<동아일보> 1975년 2월 14일 자에 따르면, 허헌구는 교장으로부터 투표 통지표를 받아 대리 투표를 했으며 자신 이외에도 5~6명의 교사가 각각 3~4장씩 대리 투표를 했다고 말했다. 또한 투표 4일 전 교무실에서 능서면 부면장으로부터 '학부형들을 찾아다니며 찬성표를 찍도록 권유하라. 야당 성향 학부형은 제외하고, 찬성 권유는 단둘이 있을 때만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김진환은 자신이 가담한 대리 투표에 역시 공화당원이라는 남성 3명과 여성 10여 명도 가담했다고 말했다. '편집자') 공화당원이기도 하고 마을 이장이기도 했던 경기도 평택의 농민은 2월 12일 자 일기에 "국민 투표일. 대통령의 연임을 묻는 국민 투표일. 온 부락민의 투표에 참석하라고 하고 10시에 투표장으로. 투표 종사원으로 일을 보다가", 자신이 투표 종사원이었다는 말인데, "하오 5시에 귀가. 공명선거는 말살하고 대리 투표가 전반이며 현 정부의 홍보 활동으로 개표는 하나 마나다", 이렇게 써놨다. 대리 투표가 이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이뤄졌다는 얘기다. 이 국민 투표가 얼마나 엉터리로 치러졌는가를 이런 예들을 통해 짐작만 할 따름이다.

이렇게 해서 국민 투표에서 통과된 것으로 발표되자 박 대통령이 2월 13일 자 일기에 뭐라고 썼느냐 하면, 이 사람도 일기를 꼭 썼는데, "신은 나에게 또다시 중책을 맡기시다. 신명을 다해 중책 완수에 헌신할 것을 서약하다", 이렇게 썼다고 강준만 교수 책에 나온다. 유신 체제를 계속 헌신적으로 유지하겠다는 얘기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김용호 교수 말대로 이러한 국민 투표라는 것이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정치학자가 아니더라도 일반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던 사실이다. 더군다나 어떠한 반대 운동도 철저히 금압한 유신 체제에서 이뤄진 투표이고, 그뿐 아니라 농민이라든가 공화당원 등 여러 사람이 보여준 것처럼 부정 선거가 지독하게 이뤄진 투표였다는 걸 모를 수가 없는 위치에 있으면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일기를 쓸 수 있는 것인지 참…. 남에게 보여주려고 이런 이야기를 쓴 것인지, 다른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박정희 정권의 민낯 그대로 드러낸 연이은 고문 폭로

ⓒ오월의봄
프레시안 : 부정으로 얼룩진 국민 투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수감된 이들 중 일부가 풀려난다. 이들을 맞이하는 사회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2월 15일 긴급 조치 위반자들 중 일부가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당시 긴급 조치 위반자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이런 식의 재판은 받으나 마나다' 해가지고 항소나 상고를 포기해버린, 그래서 사형이건 무기 징역이건 간에 형이 확정된 경우다. 이 사람들이 2월 15일에 나온 것이다. 이런 경우 말고, '항소하고 상고하는 것도 투쟁이다. 말 같지도 않은 재판 쇼를 하는 상황에서 그런 투쟁을 벌이는 것도 좋다'고 하면서 그렇게 한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이틀 후인 2월 17일에 나온다. 구속 집행을 정지하는 형태로 석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석방이 있을 때 안양교도소건 어디건 간에 출소하는 그 순간에 목말을 태워가지고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한 환영이었다. 어떤 기자들이 "이거 세상이 완전히 돌았네, 돌았어", 이런 얘기도 할 정도로 유신 체제를 거침없이 조롱한다고 볼 수도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출소 후에는 민주 수호 출옥 투사 환영회 같은 걸 여러 군데에서 열어주면서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시골에 내려가면 농악을 울리면서 동네 사람들이 위로 겸 환영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그랬다. '세상이라는 게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예컨대 1974년 4월 정부에서 민청학련에 대해 무시무시한 조치를 내리고 5월에 검찰 발표를 할 때에는 관련자들이 사형당해야 할 것처럼, 정말 굉장한 사건이라고 분위기를 막 몰아갔는데 나중에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고 그랬다.

이처럼 유신 체제에 반대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영웅이 돼서 당당한 모습으로 출소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에서 그걸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다른 신문에도 관련 보도가 조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동아일보는 아주 크게 보도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프레시안 : 이들이 출소한 후 유신 정권의 고문 실상이 현안으로 떠오르지 않나.

서중석 :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된 고문 폭로가 동아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갇혀 있다가 첫 번째로 나온 사람들이 그걸 폭로했다. 이 시기에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석방된 건 아니고 일부는 계속 갇혀 있었는데,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2명은 아무도 석방되지 않았다. 그러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이 어떤 식으로 고문을 당했고 그걸 통해 어떻게 사건이 조작됐을 것인가를 짐작하게 하는 고문 폭로가 잇따라 이뤄졌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2월 22일,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주장은 공소 사실에도 없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니 국민 앞에서 공개 재판을 통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특히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김지하가 '고행…1974'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연재했다. 거기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고문당했는지가 적혀 있다. 김지하는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어느 날 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라고 하면서 하재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이 사람과 통방한 이야기를 썼다.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하재완이 이렇게 말하는 등의 내용인데, 어떤 식으로 이들이 고문을 당했는지를 생생히 전했다.

그리고 2월 28일에는, 신민당에서 '똑똑하고 바른 말을 한다. 장래에 김대중과 김영삼을 이을 만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되다가 1972년 10·17쿠데타 후 연달아 체포돼 지독한 고문을 당한 13명이 공개 회견을 통해 고문 실상을 폭로했다. 이것도 동아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김지하를 구속하기에 이른다. 2월 15일에 석방돼 '고행…1974'를 쓴 김지하는 3월 13일에 연행돼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이때 감옥에 들어가서는 유신이 끝날 때까지 내내 갇혀 있게 된다. 이때 구속된 건 김지하한테는 아주 힘든 진짜 고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김지하는 여러 번 감옥소에 들어갔지만, 이때 제일 오랫동안 갇혀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독방에 갇혀 있게 된다. 초기에는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하면서 감옥소 안에서 큰 활약도 하고 했지만, 장기간에 걸친 지독한 감옥 생활은 김지하의 정신에 영향을 끼쳤다.

기괴한 국가모독죄를 날치기로 신설한 유신 정권

프레시안 : 1960~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지하는 유신 체제 몰락 후, 박정희 정권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지 얼마 안 된 1991년 5월 조선일보를 통해 발표한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반독재 저항 운동에 앞장섰던 김지하를 기억하던 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사례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러한 김지하의 삶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유신 헌법 찬반 국민 투표 한 달 후 박정희 정권은 국가모독죄라는 특이한 죄목을 새로 만들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나.

서중석 : 김충식 기자가 쓴 책에 국가모독죄에 관한 기술이 있는데 그 부분을 간단히 살펴보자. 김지하가 다시 구속된 직후인 1975년 3월 18일,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이 국가모독죄를 신설하는 형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국외에서 대한민국 헌법 기관을 모욕, 비방하거나', 김대중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납치되기 전에 해외에서 유신 헌법을 비판하지 않았나. '왜곡,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대한민국의 안전, 이익 또는 위신을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자는 7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 '외국인이나 외국 단체를 이용해 국내에서 그런 행위를 한 자도 같다', 이런 내용이다. 그러니까 김영삼, 김대중 같은 사람들이 외신 기자와 만나 얘기하는 걸 이제는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김영삼도 미국에서 유신 헌법 찬반 국민 투표에 대해 강한 발언을 하고 그러지 않았나.

공화당과 유정회는 개정안 제출 다음 날(3월 19일), 야당 몰래 의원 휴게실에서 날치기 처리를 해버렸다. 유신 치하에서 양성우 시인이 이 국가모독죄로 걸려들어 고생했다. 양 시인은 '노예 수첩'이라는 시에서 유신 치하 한국을 독재 국가로 표현하고 국민들이 기본권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묘사했다가 국가 모독 혐의와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옥살이를 했다. 유신 체제 붕괴 후 전두환 정권 때에도 국가모독죄로 고생한 사람이 나오고 그랬다. (전두환 정권의 노동 정책을 비판하는 자료나 김영삼의 단식 투쟁 사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외신 기자들에게 건넸다가, 또는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가 국가모독죄로 잡혀간 사례가 있다. 국가모독죄를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낸 1986년 보도 지침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은 보도 지침을 폭로한 이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 누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와 함께 국가모독죄를 뒤집어씌웠다. '편집자')

국가모독죄는 대표적인 악법으로 지목돼, 6월항쟁 이후인 1988년 폐지됐다. 그로부터 27년 후인 2015년 헌법재판소는 국가모독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해 "국민들의 비판이나 부정적 판단에 대해 국가의 '위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형사 처벌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과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된다"며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 기자 회견을 하는 동아투위 구성원들(2001년 7월 9일 모습). ⓒ연합뉴스


자유 언론 요구하다가 대거 축출된 동아·조선일보 언론인들

프레시안 : 유신 정권이 국가모독죄를 날치기하기 직전, 자유 언론 운동에 앞장서던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이 대거 쫓겨나는 큰 사태가 일어나지 않나.

서중석 :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일보에도 광고 사태 이상의 커다란 압력을 넣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대규모 해직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1975년 2월 28일 동아일보사 주주 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임원진이 대폭 개편되면서 이동욱 주필이 취임하게 된다. 이동욱 주필은 취임 인사말에서 "위계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언사나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면서 사내 집회를 금지했다. 3월 8일 동아일보사는 경영난을 이유로 일부 기구를 축소하면서 18명을 전격 해임했다. 이것으로 자유언론실천선언과 광고 사태를 거쳐 1975년 봄에 일어나는 대량 해직 사태의 문을 열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전인 1974년 3월 동아일보 구성원들이 노조를 만들었을 때에도, 사측은 노조 설립 신고 다음 날 13명을 전격 해고한 바 있다. '편집자') 이에 맞서서 기자들은 즉각 복직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결의했다. 경영진은 12일, 17명을 또 무더기로 추가 해임했다. 150여 명의 사원들은 편집국, 방송국에서 제작 거부 농성에 돌입했다. 농성이 시작되자 재야인사, 성직자, 문인, 정치 지도자, 교수, 학생 등이 찾아와서 격려했다. 3월 15일에는 편집국장 송건호가 기자들에 대한 무더기 해직 사태에 책임지고 사의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3월 17일 새벽 3시를 조금 지난 때, 일단의 인물들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농성자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폭력에 의해 밀려난 언론인들은 그다음 날 유명한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 출신으로 쫓겨난 권영자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동아투위 구성원들은 3월 18일부터 동아일보사 앞 침묵시위로 하루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8시 30분부터 9시 20분까지 동아일보사 정문 좌우에 도열해, 출근하는 제작 참여 사원들한테 유인물을 배포하며 침묵시위를 했다. 그러고 나서 2열 종대로 질서정연하게 열을 지어 신문회관까지 침묵 행진을 하고, 회관 3층 복도에서 아침 총회를 했다. 동아일보사 앞에 도열해 침묵 행진까지 하는 이러한 일과를 9월 17일까지 6개월 동안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비가 오는 악천후에도 계속했다. 이분들의 그런 모습을 당시 나도 여러 차례 봤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동아투위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동아일보사가 권력과 야합해 배신했으며 박정희 정권이 악랄한 언론 탄압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한국 언론의 비민주적 행태를 고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강제로 축출된 언론인들이 이렇게 동아일보사 문 앞에서 투쟁하고 사측의 문제점을 비판하자, 동아일보사는 3월 27일에 또 12명을 해임하는 등 해임, 무기 정직 처분을 거듭하게 된다. 그 결과 3월 8일부터 4월 11일까지 동아일보사로부터 해직 또는 무기 정직 처분을 받은 사람이 동아투위에서 낸 <자유 언론>에는 131명, 다른 책에는 132명에 이르는 것으로 수록돼 있다.

프레시안 : 이 무렵 조선일보에서도 기자들이 쫓겨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나.

서중석 : 조선일보의 경우 동아일보보다 참여 숫자가 적긴 했지만,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 언론 실천 투쟁을 전개할 때 조선일보 기자들도 언론 자유 수호 특별 대책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랬는데 조선일보사에서는 1975년 봄 동아일보 대량 해직 사태가 일어나기 전, 그러니까 1974년 12월 18일 백기범, 신홍범 두 기자를 해임했다. 그다음 날 편집국 기자 100여 명이 비상 총회를 열고 해임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러면서 기자들과 회사 사이에 일단 타협이 이뤄졌는데, 시간이 지나도 두 기자에 대한 해임 철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1975년 3월 6일 기자 100여 명은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조선일보사는 3월 7일 한국기자협회 조선일보 분회장인 정태기를 비롯한 집행부 5명을 모두 파면했다. 그것에 이어서 계속 파면해서 11일까지 모두 16명을 파면하고 37명에게는 무기 정직의 징계를 내렸다. (백기범과 신홍범, 두 기자가 해임된 계기는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를 통해 들어온 유정회 의원 전재구의 기고 문제였다. 일방적으로 유신을 찬양하는 이 기고가 게재된 것에 대해 편집국장에게 항의한 두 기자는 곧 해임됐다. 그 직후 기자들이 농성에 들어가자, 김윤환 편집 부국장은 해임된 두 기자를 3개월 이내에 복귀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돌아온 건 두 기자의 복귀가 아니라 더 많은 기자들을 축출하는 조치였다. 한편 전재구는 김종필·김형욱과 육사 8기 동기로, 5·16쿠데타 후 중앙정보부 간부로 일하다 유신 쿠데타 후 금배지를 단 인물이다. 김윤환은 유신 체제 말기 유정회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을 거치며 여권 실세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대표적인 조선일보 출신 정치인이다. '편집자')

기자들은 회사 정문 앞에 모이려 했으나 경찰 제지 때문에 실패하고 21일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한다. 조선투위는 동아투위와 연대해 언론 자유 수호 투쟁 위원회를 결성한 뒤 계속해서 동아투위와 함께 언론 민주화 운동을 굳세게 펼쳐나간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구성원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언론 통폐합으로 해직된 기자들과 더불어 1980년대에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창립, 월간 말과 국민주 언론 한겨레 창간 등에서 주춧돌 역할을 한다.


한편 동아 광고 탄압 사건 및 대량 해직 사태를 조사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2008년 "중앙정보부 및 문화공보부 등 당국은 자유 언론 실천을 주장하는 기자들을 해임 또는 무기 정직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복직도 막았으며, 재취업도 방해하였다"며 "전대미문의 동아 광고 탄압과 언론인 대량 해임은 유신 정권의 언론 탄압 정책에 따라 자행된,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 침해 행위였다"고 밝혔다. 또한 진실화해위는 "동아일보사는 (…) 동아일보사의 명예와 언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왔던 자사 언론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의 요구대로 해임함으로써 유신 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며 "피해자인 해직된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피해 회복을 통해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동아일보사에 권고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이러한 권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이를 각하했지만, 2013년 대법원은 '소송 대상이 된다'며 1·2심 재판부의 판단을 뒤집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 시작된 재판에서 대법원은 2015년, 진실화해위에서 2년간 수집한 증거를 추론과 추측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고 동아일보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의 이 판결은 박근혜 정부 들어 거듭된 사법부의 과거사 역주행 판결 중 하나라는 비판을 받았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쉰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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