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전국 모든 중학교에서 자유학기제가 실시된다. 그런데 '자유학기제'는 2012년 대선 이전에는 교육계에서 거의 논의된 바가 없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도 교육공약 가운데 자유학기제와 비슷한 '행복한 중2 프로젝트'를 내세웠던 것을 볼 때, 자유학기제는 그간의 중요한 민심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민심에 민감한 정치권의 시각에서 보면 자유학기제가 교육 문제로 힘들어하는 부모 계층의 유권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슈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중학교 단계에서 자유학기제 같은 획기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대학입시 개혁과 이에 따른 고등학교 교육혁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시도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교육의 핵심적인 모순이 대학입시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대학입시가 뿌리 깊은 학벌체제와 대학서열화, 더 나아가서 노동시장의 문제와 복지제도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많은 모순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은 제대로 손대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입시와 고교 교육과정을 건드리는 개혁들은 또 다른 모순을 낳는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 사회구조적으로 얽힌 문제점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삶에 대한 목표나 아무런 동기부여도 없는 학생들에게 입시교육만 강요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좌절만 더 안겨주고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무기력한 학습 포기자만 양산할 뿐이다. 그렇기에 입시 때문에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자기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 여기서 얻은 생명력으로 자기 꿈을 찾아가도록 돕자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 자유학기제라는 공약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배경이 된 건 아닐까.
그런데 실제로 뜯어보면 자유학기제는 깊이 있는 연구에 바탕을 둔 정교한 정책이 아니라, 대선 교육공약으로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교육계 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 개념을 도입하자는 것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박근혜 캠프 내에서도 자유학기제 공약은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다. 그리고 정부기관인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 2013년 6월 자유학기제 정책을 위한 국제 포럼을 준비하면서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 영국의 '갭이어' 관련 담당자나 전문 학자를 초빙한 것을 볼 때 이 같은 외국의 사례들이 자유 학기제 공약의 모델이 된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자유학기제 시행에 앞서, 정확한 개념과 내용을 정립하기 위해 청와대와 교육부 차원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이때 논의의 핵심은 자유학기제 방향을 중학교 교육과정의 개혁으로 잡을 것인지 아니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의 전환학년제로 도입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 논의의 핵심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긴 논의 끝에 청와대와 교육부는 자유학기제의 개념과 내용을 전환학년제가 아닌 교육과정 개혁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때 미국의 대표적인 교육과정 개혁 실험이었던 '8년 연구' 모델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자유학기제는 중학교 단계에서 한 학기 동안 모든 학생들에게 적용되는 교육과정으로, 우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로 대표되는 집필고사를 없애서 시험에 얽매이지 않고 교과의 본질에 맞는 수업을 할 수 있게 했다. 기본교과(예체능이 아닌 교과)에서 4시간 정도를 축소하고 여기에 기존의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결부시켜 자율과정을 대폭 확대했다. 그리고 이 자율과정은 동아리 활동, 예체능, 선택 프로그램, 진로 탐색 중심 등 학교의 실정에 맞게 선택해서 운영하게 했다. 자유학기제를 단순히 '시험 없는 학기'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엄밀히 말하면 평가는 하되 점수나 등수로 매기는 게 아니라 활동 내용과 그 과정에서 발견된 학생들의 특성을 서술로 표기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학기의 성적은 고입 내신에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
자유학기제가 깨뜨린 금기들
자유학기제 방향을 교육과정 개혁으로만 국한시킨 것은 지금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확산 속도를 조금 늦추더라도 교육과정 전반의 개혁과 더불어 전환학년제의 가능성까지 고민하면서 병행 실시했다면 더 풍성한 결과들을 만들어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또 하나 자유학기제 정책의 아쉬움은 과도하게 성급히 추진했다는 것이다. 물론 현 정부는 자유학기제를 임기 내에 안착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학기제 정 책은 여야가 함께 동의하고 국민적 지지가 있는 정책이기 때문에 현 정부에서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정부까지 이어가며 제대로 기반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자유학기제가 의미 있는 교육적 성과를 가져오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자유 학기제가 우리 교육에 던진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자유학기 제가 가져온 변화는 그 이전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바꾸어내지 못했던 우리 교육의 많은 금기들을 깨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매우 혁신적인 변화인데도 사회적인 저항이나 파장을 거의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시행하고 있다는 것도 자유학기제의 특성이다. 도무지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기존의 성역들을 깨뜨리며 새로운 교육의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는 영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간·기말고사로 대표되는 정기 지필고사를 없앴다는 것이다. 교육에서 평가는 교육의 목표가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그 방법은 다양한 것이 정상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중등 교육에서 중간·기말이라는 정기 지필고사는 교육의 최종 목표였다. 그러다 보니 수업 또한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이거 시험에 나온다! 밑줄 쫙!" 하면서 한편으로는 수업 의도를 왜곡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사의 창의성을 떨어뜨려 가르치는 이의 역할을 교과지식 전달자로 전락시킨 주범이었다. 그런데 비록 한 학기이긴 하지만 자유학기제는 과감하게 중간·기말 고사를 없앰으로써 정기 지필고사가 절대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교과가 추구하는 본래의 목적에 따라 수업을 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성취를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하는 형태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둘째, 국·영·수로 대표되는 주지과목의 시수가 줄어들고 대신 예체능 과목과 체험학습, 선택교과가 확대되었다. 비단 국·영·수뿐 아니라 교과 시수를 조정하는 문제는 각 교과와 그를 둘러싼 학계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와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싸움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국·영·수' 주지과목에 대한 시수는 일종의 성역이었다. 그런데 자유학기제에서는 아이들의 전인적인 성장과 진로탐색을 위해 국·영·수 중심의 주지과목을 축소하고 입시와 무관한 예체능과 체험학습, 선택교과 시간을 확대한 것이다. 이런 시도는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아니고 이미 시행되고 있는 '교육과정 20% 증감'의 재량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20% 범위 내 증감의 자율권이 지금까지는 국·영·수 시수 확대의 도구로 활용되어왔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번에 국·영·수를 줄이고 예체능 및 선택교과의 확대를 이끌어낸 자유학기제의 힘은 실로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교사에게 자율적인 교육과정 편성권과 평가권을 주면서 교사별 평가체제가 가능해졌다. 국가가 기본적인 교육과정의 틀을 제시하지만 원칙대로라면, 그 교육과정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교사의 고유한 권한이다. 그리고 가르친 자가 가르친 내용을 평가하는 것도 교육학의 가장 기본이다. 그런데 지금껏 교사들은 교육과정이 아닌 교과서의 내용을 충실히 전달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평가도 자신이 가르친 내용과 무관하게 교과서의 내용을 평가해 왔다(물론 교과서 위주로 가르쳤기 때문에 가르친 내용을 평가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교과서 내용을 벗어나 창의적으로 가르친 교사의 경우 그 내용을 평가할 수가 없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교사에게 교육과정 편성권과 평가권을 주고 교사별 평가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자유 학기제에서는 정기 지필고사를 없애고 수행평가만 실시하되, 그 결과를 계량화된 숫자가 아닌 서술로 기록하게 해서 기존에 교사를 억누르던 족쇄를 일순간에 풀어버렸다. 그런 변화를 통해 모든 교사에게 실질적인 교육과정 편성권과 평가권이 주어지고 교사별 평가도 가능하게 되었다.
넷째, 선택교과가 확대되면서 아이들은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교사들은 새로운 교과를 개설하거나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중학생들이 자신의 흥미와 관심, 진로에 따른 교과를 선택해 심도 깊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원하는 교과를 개설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발달에 맞는 교과를 직접 구상해 교육과정을 설계할 기회가 생겼으니, 교육과정 전문가로서 실질적인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런 권한은 동시에 의무와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교사를 성장시키는 건강한 부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교육을 학교에만 가두지 않고 지역사회로 확대해 마을과의 협력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부'란 교실 안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한정해왔다. 지역사회 속에서도 학교는 섬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자유학기제에서는 직업 혹은 진로 체험을 강조하면서 지역사회와 연결을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던 학교 주변의 야채가게, 커피숍, 미용실, 병원, 소규모 공장이나 기업, 관공서와 관계를 맺고, 지역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아이들의 진로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지역사회에서도 처음에는 관심을 갖지 않다가 조금씩 교육적 책임감을 갖기 시작했다. 선택 교과를 개설할 때도 아이들은 원하지만 학교 안에서 교사가 감당할 수 없는 분야가 많다 보니, 지역사회의 전문가나 장인들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아이들의 배움을 위해 학교와 사회가 협력하는 경험들이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
자유학기제의 의미, 어떻게 살려갈 수 있을까?
아직은 시범단계라 학교 현장에서 자유학기제의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2015년까지 자유학기제 시범학교나 자원 학교의 실태를 살펴보면 학교 구성원들의 준비 정도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이었다. 꽉 막힌 틀을 넘어 새로운 교육을 시도해보려는 교사들이 있는 학교에서는 자유학기제의 틀을 활용해 다양한 교육혁신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다. 반면 이런 주체들이 없는 학교에서는 벌써 교사들 사이에서 1학년이 기피 학년이 되었고, 시험 없는 수업을 버거워했으며, 진로체험 장소를 찾느라 허둥지둥했다. 이 제도가 시간만 낭비하는 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는 곳도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자유학기제라는 제도가 가진 잠재력을 얼마나 구체적인 현실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교사와 학교의 기획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교사들은 아주 세밀하게 규정된 교육과정, 점수화된 평가체제, 공문에 의해 통제되는 관료체제 속에서 교육기획력을 키울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유 학기제라는 상당히 폭넓은 자율권이 주어졌음에도 억압적인 환경 가운데서 몸부림을 쳐왔던 일부 교사들을 제외하고는 교육적 상상력과 기획력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일부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교육기획력이 살아난 곳도 있지만, 대다수 학교에서는 교육청의 지시를 문자 그대로 따라가기 급급한 상황이다.
그러니 교육당국은 학교의 자율적 환경을 제시하고 자발적인 시도 들을 격려하며, 교육기획력을 키워줄 수 있는 연수들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원단체들 또한 좋은 사례들을 공유하며 서로의 교육적 상상력을 북돋울 수 있는 자리를 통해 교사들의 성장을 도모해 가야 할 것이다.
학교의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협조와 관심도 필요하다. 비록 교육계가 오랜 입시와 관료체제 하에 과도하게 경직되어 있어서 현실적인 내용을 채워가는 데 더딘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학교만의 몫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학부모가 함께 내용을 채워가고 견인해야 하는 영역이다. 특히 부모들은 지역사회의 자원에 대해 교사들보다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내실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선택교과 개설과 관련해서도 교사들은 자신의 전문 영역을 넘어서기에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가진 학부모나 지역사회 단체들이 자원을 추천하거나 자원해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학생을 둔 부모가 해야 할 일은 가정에서 자유학기제의 취지를 잘 살려 호응하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자유학기제를 '시험이 없는 학기' '놀아도 되는 학기'로만 생각할 수 있고 부모로서는 이 부분이 염려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기에 더욱 자유학기제란 교육의 본질에 맞게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배움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임을 잘 설명할 필요가 있다. 교과와 관련해서도 배운 내용을 삶에 적용해보거나 그와 관련해 흥미와 관심이 더 가는 부분을 심화시켜보도록 격려하고 연결해줄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선택한 선택과목이나 진로 체험과 관련해서도 주말이나 방학을 활용해 조금 더 심화된 학습과 체험으로 이끌어주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자유학기제는 그동안 일상적인 교육의 틀에서는 좀처럼 바뀌기 어려운 것들을 바꾸고 있다. 물론 박근혜 정부로서는 이 정책이 우리 교육에 미칠 함의가 어느 정도인지 깊은 고찰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동안 우리 교육계의 오랜 숙원을 해결할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건 사실이다. 이 상자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이제 교육계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지금은 부담스럽고 힘든 과정일지라도 자유학기제가 균열을 내기 시작한 교육적 금기들을 짚어보면, 이 정책은 교육의 전체적인 변화를 견인하고 아이들의 내적 동기와 힘을 키워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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