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올 한해 본 공연 중 뒤늦게나마 기록을 남기고 싶은 무대가 있었다. 10월 4일 장충동의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일본 백제춤의 귀향' 공연이 그 중 하나이다. 망국 후 왜로 건너간 백제 왕족을 기려온 일본 규슈 미야자키현 한 신사에 보존돼온 춤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무용가 국수호 씨(전 중앙대 교수)는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전한 무악을 찾아보는 답사 중 일본의 백제촌이라 불리는 규슈 미야자키현 남향구(南向區, 난고구)마을에서 전승돼온 백제신악(神樂, 가구라)을 주목했다.
의자왕 휘하 백제의 중요인물로 짐작되는 정가왕(禎嘉王)과 그 아들 복지왕(福智王) 일행은 망명 직후 672년 일본의 천지천황이 죽고 천무천황이 왕권을 잡는 과정에서 일어난 '임신(壬申)의 난' 때 풍랑 속에 북규슈로 피난했다. 정가왕은 난고마을 미카도(神門)에, 장남 복지왕은 여기서 떨어진 히끼(比木)마을에 각각 자리 잡았다. 이들은 의학과 농업기술을 비롯해 불교, 천문, 건축, 예절과 문화 등 선진문명을 일본 주민에게 전파하며 존경받았다. 이후 정가왕은 신라 추격대와 싸우다 전사했다. 마을에서는 미카도 신사를 세워 그를 미카도대명신으로 받들었다. 복지왕도 죽어서 히끼신사의 수호신이 되었다.
한일문화교류회의 박전열 위원은 "왕의 호칭에 대한 의미는 한국과 일본이 다르다. 한국 역사서에 정가왕과 복지왕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들은 의자왕의 왕자일 수도 있지만, '왕처럼 훌륭한 사람'의 의미를 부여한 백제인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지역과 관련 있는 인물을 내세워 신사의 수호신이자 축제의 신으로 받드는 것이 패턴이다"고 했다.
아들 복지왕 측에서는 생전에 일행을 이끌고 히끼에서 90킬로미터(km) 떨어진 미카도의 아버지 정가왕을 방문해 효를 다하는 의례와 제사를 행했다고 한다.
"복지왕이 해마다 먼 길을 걸어 아버지 정가왕을 찾아와 상봉하는 예절은 일본인에게 효의 행동과 가르침을 보여주며 감동시킨다. 그에 덧붙이는 의례와 질서, 춤의 미의식, 백성들과의 관련, 문화의 여러 모습이 사람을 설득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1000년하고도 수백 년간 지속돼 주민들의 애호를 받는 축제가 된 것이다"는 일본 측의 설명이 있었다.
난고마을에서는 추운 동짓달에 행해지는 이 행사를 1300년 넘게 지켜오며 놀이적 요소가 더해진 마을의 축제 '시와스마쓰리'로 만들었다. 1월 하순, 18명의 정해진 일행이 차가운 바닷물에 목욕재계한 뒤 히끼신사의 복지왕 상징물을 받들고 이동, 마중 나온 미카도 마을 사람들과 길 가운데서 만나며 의례가 진행된다. 지금은 히끼마을과 난고마을 두 지역 간을 걷지 않고 자동차로 이동해 종래의 8박 9일 행사가 2박 3일로 압축되었다.
제사와 의례가 행해지는 미카도 신사에는 복지왕 일행을 맞아 추위를 녹이는 모닥불이 서른 군데 이상 피워져 불기둥을 올리고 있다. 제관들은 제례 용구를 반드시 왼쪽 어깨에 걸머진 채 이동한다. 흰 종이와 꽃 같은 붉은 모자로 장식된 복지왕의 혼백 상징물은 성스러운 것으로 아무도 열어볼 수 없다. 미카도 신사에 들어온 뒤 제관 두 명만이 참석해 혼백을 싼 흰 종이를 위에서부터 7장째까지 갈아줌으로써 해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의식 또한 축제의 한 과정이다.
국수호 씨는 이날 공연에 대해 "백제의 정수는 많이 희석되었겠지만, 그래도 백제인들을 위한 신무로서 지켜진 부분이 있고 그 정신은 크게 보이는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닌 움직임으로 판단되어 몇 편을 골라 무대에 올리고 한국 관객에게 보이게 되었다"고 했다.
무대 위에 사방 9미터(m) 크기의 공간을 잡아 네 귀퉁이에 대나무를 세우고 금줄을 쳤다. 일본 현지의 공연무대도 이 크기라고 한다. 대나무는 정화의 의미를 담아 오늘날의 무속과 민속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장치이다. 일본의 두 신사에서 모두 15명의 제관 - 춤 보유자들이 왔다. 무대 한편에는 제단이 차려져 정가왕과 복지왕의 위패 상징물이 오르고 몇 가지 떡이 차려졌다.
이날 소개된 8편의 가구라춤 중 백제왕 부자와 직접 관련된 '부자의 상봉', '왕에게 바치는 고귀한 춤', '이별 및 정화 장면' 등 3가지 춤이 공연됐다. 상봉의 춤은 정가왕과 복지왕의 신체 상징물 위패를 제단에 모신 뒤 정화하는 의식의 가구라이다. "신비로움과 고도의 예술성이 전승되는 이 가구라 신악은 축제 과정 중 가장 중요하며 성스러운 의식이다"고 박전열 위원이 소개했다.
방울과 부채를 든 두 남성이 엇갈리듯 스치며 발 전체를 바닥에 대고 끌면서 신체를 이동하는 디딤새가 의례적인 분위기를 냈다. 사에키, 무라다 두 제관이 추었다. 음악은 북과 피리 두 가지만 따랐다. 간디, 나카모토 등 출연자들이 춤과 음악을 번갈아가며 맡아 연주했다.
백제왕 부자에게 바치는 정재무(궁중무)는 유일하게 여성 제관이 추는 가구라였다. '고귀한 분에게 고귀한 것을 드린다'는 의미라고 했는데 방울과 혼백을 싼 종이를 들고 대체로 움직임이 빠르지 않으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냈다. 일정을 모두 끝내고 마지막 정가왕과 복지왕이 헤어지는 춤은 흰옷을 입은 두 남성이 방울과 부채를 들고 추었다. 우리의 살풀이춤처럼 주변의 액을 내쫓고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정화의 의미도 겸한다. 이들 세 편의 가구라가 '백제춤의 귀향'을 말하는 대표 춤이다.
일본 신사의 춤 어떤 점을 백제와 연계시켜 보는지를 국수호 씨가 설명했다.
"발뒤꿈치를 디뎌서 버선코를 올린 다음 바닥 전체를 딛고 몸을 이동시키는 디딤새는 한국춤과 상통한다. 박자는 빨라도 동작은 느린 움직임으로 가기 때문에 백제시대의 궁중 예악이 이렇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일본 신사에서 제사에 등장하는 움직임이 어느 지역의 경우나 대충 이러하다. 우리의 종묘제례악도 느리다. 왕 앞에서 추는 춤 - 정재무는 빠른 것이 없다.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춤이 이번 백제춤의 귀향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의 축제 전 과정에는 백제 왕족이 이곳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호족의 무덤을 찾는 의식도 빠지지 않으며, 두 마을 사람들이 간직해온 정가왕 일행의 이야기를 전하는 33개 춤 중엔 무인의 용맹을 보여주는 활춤과 칼춤이 있었다. 활춤은 경쾌한 움직임이고, 칼춤은 칼을 휘둘러 자리를 정화시키면서 실제로 베어지는 날카로운 도검 두 자루의 칼날 부분을 맨손으로 잡고 추었다. 수십 년간의 훈련을 거쳐 이뤄지는 고난도의 칼춤으로, 머리장식이 칼날에 베어져 떨어지도록 얼굴 가까이 칼을 대고 추었다. 귀신이 복을 나눠주고 풍년을 기원하는 일본의 민속 무용도 무대에 올랐다. 일본 건국신화를 나타낸 춤도 나왔다.
8개 춤이 추어지는 중간에 제단에 차린 떡을 관객들에게 나눠주는 음복례(飮福禮)가 있어 떡을 얻어먹었다. 일본 현지에서는 긴 시간 진행되는 의례라 관객들에게 틈틈이 여러 번의 음복을 행하고 날이 추우니까 하얀 일본 떡에 청주, 과자, 우동 등을 먹는다고 했다. 서울에 와서는 여러 켜로 갖은 소를 넣은 팥 시루떡 세 가지를 제단에 올렸다.
백제 유민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짐작게 하는 마지막 의례가 더 있었다. 2박 3일의 일정을 끝내고 두 마을 사람들은 헤어지면서, 서로의 얼굴에 검댕칠을 한다. "슬픔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검댕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라고 일본에서 온 제관들이 전했다. 그리고 떠나며 소리치는 이별인사는 '오사라바- 살아서 봐'라는 뜻의 외침이다.
난고마을의 시와스마쓰리는 한국의 부여군 은산리에서 백제 멸망 당시의 두 충신 복신과 도침을 기리는 은산별신제와 동일한 배경을 지닌다. 두 가지 제(祭) 모두 1350년을 지켜 내려오는 마을의 제이다. 1980년 3월 은산별신제를 취재했는데, 이곳은 백제멸망 당시의 격전지였다. 동네주민 중에서 화주와 대장을 뽑고 제물을 마련하며 오랜 전통의 무녀가 신내림 등, 제를 주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집집마다 대문 앞에 황토를 뿌리고, 산에 가서 제에 쓸 나무부터 베어오고 미리 만들어 절에 맡겨둔 꽃을 받아오는 행사가 화려해 사람들이 구경을 많이 왔었다. 전장의 장수처럼 말을 탄 제관들과 옥색 도포를 입은 마을 남정들, 화려한 옷차림의 무녀와 마을 주민들이 은산천 둑길을 따라 걸어가던 모습이 더할 나위없는 한국적 풍경이었다. 춤과 음악도 곁들였으나 특별히 복신과 도침을 위한 춤의 의례는 없었다.
여자들은 제에 그리 나서지 않았다. 다 만들어 놓은 제물도 남자들이 제당까지 날랐는데, 금기를 위해 모두 입에 백지를 물고 제물 한 그릇씩을 받들고 행렬을 지어 갔었다. 깃대로 세운 나무에 신이 내려 방울이 소리 내지 않으면 제관들은 다시 찬물목욕부터 해야 했다. 이때 참석한 민속학자 임동권 박사는 "저 엄청난 정성은 누구 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동네가 잘되라고 하는 거예요. 대단하죠"라고 했었다.
백제춤이 있는 시와스마쓰리를 간직한 일본의 난고마을 또한 인구 2000명이 사는 산촌마을이다. 한국 땅을 여행하다 보면, 임진왜란 때 또는 무슨 사화 때 낙향해 숨어 살려고 들어왔다는 조상 대대로 이어 사는 마을을 심심찮게 본다. 그런 곳은 대개 외부에서 들어가는 길이 험하고 나무숲으로 가려 그 안에 마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백제 역사의 끝을 이루는 대관사전투나 주류성전투 등을 생각하면 착잡해진다는 사람이 많다. 피가 몇 자나 고여 흐르고 우물이 모두 핏빛이 된 익산 대관사전투에서 무열왕은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했지만, 아들 문무왕이 전장에서 즉위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백제 측에서는 부흥을 위해 싸운 복신 도침 부여풍 등이 역사에 전한다.
난고의 축제를 전부 다 본 것은 아니어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행사가 1350년을 지내며 한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변화됐는지 인상만으로도 흥미롭다. 시간과 재력과 서로 다른 정서가 합쳐져 만들어진 예술이기도 하다. 은산별신제나 난고마을의 축제나, 겉으로 드러난 것은 놀이를 겸한 의례였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백제가 멸망했는데도 1300여 년간 존속된 문화에 대한 외경이었다. 은산별신제는 복을 추구하는 후손들의 흥겨운 느낌이 강했는데 난고마을축제의 부분공연은 멸망해 떠나온 조상을 잊지 않으려는 애절한 느낌이 저변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날 무대를 찾은 인사들로부터 몇 마디 감회를 들어낼 수 있었다.
"백제왕 부자의 상봉을 춤과 음악으로 만들어 지켜온 저력이 대단해 보인다"고 전직 언론인이자 댄스스포츠 국제심판인 유우봉 씨가 말했다. 조각가 정보원 씨는 '일본에 이런 고대한국 전통이 간직되어 있어 반갑다', 박전열 위원은 "1년내 조용한 난고마을에서는 이 축제로 이웃사람과 오가며 정신적 물리적 활기를 얻는 듯하다. 사실상 축제의 형식은 이 일대 여러 고장의 축제와 거의 같은 패턴이다. 난고마을은 백제마을을 표방하고 있지만 백제왕을 내세우는 부분은 축제 과정 중 작은 일부이고 민중적 놀이의 축제로 즐기는 행사이다. 한일관계의 부침에 따라 그 비중을 매겨가며 존속해 온 것으로 안다. 이번 공연은 한일수교 50주년을 기념해 문화 교류의 한 프로그램으로 선택된 것이다"고 했다.
춤을 추는 이들은 어려서부터 수업을 받아 몸에 익혀 추다가 40대 전후해서 중추적 활동을 하고 제관도 된다. 그러나 이곳도 후대에 계승하는 일에 어려움이 있어 이웃마을도 나서 거들고 있는 중이라고 박 위원이 전했다.
백제사를 다룬 공연예술이 몇 가지 있었다. 극작가 정복근 씨는 서초동 '예술의전당' 벽과 노천을 무대로 잡아 무술 장면을 활용한 '백제 멸망사' 희곡을 썼다. 말이 멸망사이지 사실은 백제인의 어떤 기개를 무술 장면으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공연은 성사되지 않았다. 국수호 씨는 1999년 국립무용단의 '백제춤 -그 새벽의 땅' 공연에서 '비천무'를 안무했다. 북을 치며 움직이는 모습 같은 불교조각과 음악, 의복 등 미술적 자료에 근거해 만들어낸 춤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