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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할리우드는 손오공을 소환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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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할리우드는 손오공을 소환하지 못할까?

[유라시아 견문] 서유기 : 구도와 득도의 길

신서유기

나영석 PD를 잘 몰랐다. <무한도전>을 편애했기에 <1박2일>에는 정을 주지 않았다. <꽃보다~>시리즈나 <삼시세끼>는 더 낯설었다. 외국에 머물며 국내 예능까지 챙겨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일시에 관심이 꽂혔다. 그가 <신서유기>를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한참 서유기에 빠져있던 무렵이었다.

무릎을 쳤다. 지금 이 시점에 시안으로 가서 예능을 만든다? 그것도 TV가 아닌 인터넷 플랫폼으로? 최신 미디어에 동방 고전의 모티프를 얹어서 새 콘텐츠를 생산한다! 나 PD가 一帶(일대)니 一路(일로)니, 유라시아의 지각 변동을 고려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때가 맞았다. 그래서 더 신통했다. 숙소에서, 카페에서 <신서유기>를 몰아서 보았다. 21세기 서역행이 선사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과연 온라인(On-Line)은 새천년의 신대륙, 신천지였다.

하더라도 영판 새 현상만은 아니다. <서유기>의 변주와 차용은 그 자체로 오래된 전통이다. 20세기에도 줄곧 미디어의 변화에 발맞추어 재탄생하고 재인용되었다. 만화로는 토리야마 아키라(鳥山明)의 <드래건 볼>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1984년 <주간소년점프>에 연재를 시작하여, 장장 10년을 지속한 대작이다.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후지TV의 만화영화로도 제작되었고, 극장판 애니메이션까지 선보였다. 태평양 건너 할리우드에서는 실사 영화로도 만들었다.

국내에선 허영만의 만화 <미스터 손>(1989년)이 먼저 떠오른다. 한국방송(KBS)에서 방영되어 40%대의 시청률을 자랑했던 <날아라 슈퍼보드>(1990년)의 원작이다. 손오공의 여의봉은 쌍절곤으로, 저팔계의 삼지창은 바주카포로 변형되었다. 사오정은 말귀를 못 알아먹는 한국적인 캐릭터로 분신하여 명랑 만화의 성격을 가미했다.

<마법 천자문>도 빠트릴 수 없겠다. 이 어린이용 한자 교재 또한 손오공을 캐릭터로 활용하여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서 입지를 굳혔다. <서유기>를 차용한 게임 또한 적지 않으니 가히 OSMU(One Source, Multi Use)의 대표 격이라 할만하다. 견줄 만한 또 다른 고전으로는 <삼국지>가 유일하지 싶다.

실은 2015년, 중국에서도 신서유기가 돌풍을 일으켰다. 3D 애니메이션 <서유기>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뮬란>과 <쿵푸 팬더>가 세웠던 기존의 흥행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 뮬란도 쿵푸 팬더도 중국의 문화유산을 할리우드에서 재치 있게 변주하여 재가공한 문화 상품이었다. 마침내 중국에서도 자신들의 고전을 뉴미디어의 문화 콘텐츠로 재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쩐지 일대일로라는 국책의 동향과 전혀 무연해 보이지 않는다. 옛 길의 복원과 함께 고전의 현대화에도 불을 지핀 것이다. 유럽의 르네상스란 중국이 전수해준 인쇄술에 그리스 고전을 얹어 일으킨 것이었다. 이번에는 중국이 캘리포니아산 디지털 미디어에 동방의 고전을 접목시킨다. 중국이 혁명의 단계를 지나 중흥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새삼 실감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문학사의 4대 명저로 꼽히는 <서유기>조차도 실은 재활용과 재창조의 산물이었다. <서유기>는 명나라 작가, 오승은(吳承恩)의 작품이다. 명대에는 인쇄 산업이 호황을 구가했다. 농사보다 책장사가 훨씬 이문이 남았다. 출판 편집자가 신종 직종으로 각광을 받았다. 적기에 천 년 전 고전을 차용하고 재구성하여 <서유기>라는 희대의 '장르 문학'을 창조했던 것이다. 그래서 원본과 원판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에 맞겠다.

서유기에 앞서 서역기가 있었다. 현장법사의 위대한 성지 순례기, <대당서역기>이다.

▲ 투루판. ⓒ이병한

▲투루판 야경. ⓒ이병한

▲ 투루판 시장. ⓒ이병한

<大唐西域記>

투루판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방에 자리한다. 사막은 내륙의 바다, 모래로 된 바다였다. 망망하고 막막하다. 끝이 가늠되지 않는다. 때때로 폭풍도 분다. 모래 바람이 파도처럼 일어나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다. 기온마저 살인적이다. 한참 때는 80도에 육박한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고속도로를 달려도 수월치가 않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낙타를 타거나, 걸어서 다녔다. 상인들이었고, 교인들이었다. 유라시아의 물질과 정신의 교류를 촉진하는 매개자였다. 두 발로 모래바다에 비단길을 놓은 것이다. 중국과 이란, 인도는 그렇게 연결되었다. 그 꼭짓점에 투루판이 있었다.

투루판은 지금도 '세계 도시'이다. 골목 구석구석에서 난(Nan)을 팔고 있다. 중앙유라시아와 북인도에서 즐겨 먹는 일용식이다. 시장의 풍경도 동아시아의 장마당보다는 서아시아의 '바자르'에 가깝다. 페르시아풍 양탄자가 널려 있고,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는 근사한 칼을 구할 수도 있다.

굳이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가게에 발만 들여도 차 한 잔을 대접한다. 환대의 문화를 몸에 익힌 유목민의 기질이 남아있다. 역사적으로도 투루판은 혼종 도시였다. 중원에서 이주한 중국인들과 사마르칸트 출신의 소그드인들이 모여 살았다. 중국인들은 이곳에서 먼저 호악을 듣고 호선무를 보았을 것이다. 소그드인 또한 이곳에서 처음 중국 문화를 접했을 것이다. 중원과 서역의 융합, '장안의 봄' 또한 이곳에서 출발했다.

현장법사도 투루판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축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당나라는 '대당제국'에 모자랐다. 629년, 겨우 창업기였다.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형제들을 살해하고 등극한 직후였다. 일종의 쿠데타였다. 즉위를 둘러싼 잡음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관심을 밖으로 돌려야 했다. 대외 팽창 정책을 펼쳤고, 그 첫 목표가 북방의 위협 돌궐(투르크)이었다.

돌궐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하기 위해서 국경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통행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현장은 그 계엄령을 어기고 여행을 감행한 것이다. 그를 이끈 것은 國法(국법)이 아니라 佛法(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장안을 몰래 빠져 나온 그는 혈혈단신 고비사막과 기련산맥(치롄산맥) 사이에 난 하서회랑을 걷고 또 걸었다.

복병은 고창(高唱)국이었다. 고창국은 투루판에 자리했던 왕국이다. 당시 국문태(麴文泰)라는 한인(漢人)이 다스리고 있었다. 국왕은 천축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곳에 남아 불법을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법까지 어기고 고국을 떠난 마당에 청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단식까지 불사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 불법을 설파하겠다는 약조를 하고서야 여행을 재개할 수 있었다.

망외의 소득도 없지 않았다. 4명의 사미승과 법복 30벌, 황금 100량과 은전 3만과 비단 500필을 제공받은 것이다. 게다가 돌궐의 군주들에게 전달하는 소개장까지 써주었다. 당시 투루판은 페르시아 세계의 동쪽 끝에 자리한 가한(Kaghan)의 동맹국이었다. 그의 소개장이 유목세계를 통과하는 일종의 '비자'가 된 것이다.

고창을 출발한 현장은 타클라마칸 사막, 천산산맥을 가로지르고, 타슈켄트를 거쳐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모래 폭풍이 일고,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관음보살'을 되뇌며 전진을 거듭했다. 천신만고 끝에 천축에 도착한 현장은 인도의 전역을 두루 다니면서 각지의 불적(佛跡)을 탐방하고 고승들을 만나 토론을 벌인다.

약관 28세의 현장이 죽음을 불사하고 천축으로 향한 이유는 크게 셋이다. 첫째는 성지 순례이다. 불타가 나고 자란 성스러운 고장을 직접 방문하고자 했다. 둘째는 유학이다. 당시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중구난방이었다. 정확하고 엄밀한 번역이 부재했다. 마땅한 스승 또한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본고장에서 불학의 정초를 닦고자 했다.

무엇보다 그가 고뇌했던 철학적 난제는 '인간의 成佛(성불) 가능성'이었다. 과연 모두가 해탈에 이를 수 있는가? 만인이 불타가 될 수 있는가? 현장의 평생 화두였다. 그래서 불학의 메카였던 갠지스 강 근처 나란타 사원에서 5년을 배우고 익힌 것이다. 유학생이었지만 불심에 터한 향학열은 발군이었다. 산스크리트어를 익혀서 원전을 독파하고 암송했다. 그를 유난히 아꼈던 고승들이 나란타에 머물러 학맥을 이어주기를 청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현장은 귀국을 선택했다. 애초 돌아오기 위한 출타였다. 천축행의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중생의 구제였기 때문이다.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하여 유학과 순례를 단행했던 것이다. 즉, 소승보다는 대승이었다. 홀로 아라한에 이르는 것으로는 족할 수가 없었다. 속세로 나아가 보살행을 실천해야 했다. 구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을 淨土(정토)로 전환시키는 변혁에 있었다. 그래서 달달 외운 불교 원전을 잔뜩 짊어지고 돌아온 것이다.

훗날 무거운 책 지게를 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상징이 되었다. 별명도 '경전상자(經笥)', 당대의 '걸어 다니는 사전(Walking Dictionary)'이었다. 귀국 후에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여생을 경전 번역에 헌신했다. 밤낮을 불문하고 촌음을 다투어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한자로 옮겼다. 그 전에는 한문에 능숙치 못한 서역인이 주로 번역을 했다. 그래서 번역 투가 심하고, 뜻 또한 명료하지 않았다. 현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제대로 된 한역 불경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의 초인적인 집념으로부터 불교는 동아시아 정신 세계의 거대한 지반을 이루게 된다.

그가 돌아온 해는 645년이었다. 장장 16년의 대장정은 전대미문, 전인미답이었다. 그의 귀국 소식에 온 장안이 들썩였다.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던 당 태종마저 몸소 성대한 환영 행사를 준비했다. 138개국의 생활상, 역사, 지리와 종교 등을 기록한 <대당서역기> 또한 수많은 설화와 전설을 파생시켰다. 대당제국 때 이미 <대당삼장법사취경기(大唐三藏法師取經記)>나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와 같은 민간 설화가 등장했다. 이후 동아시아에서 맥이 끊어지지 않고 등장하는 '서유기류'의 원천이었다.

▲ 화염산. ⓒ이병한

<西遊記>

화염산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투루판과 고창 고성(古城)을 오가는 길에 길게 자리했다. 수직으로 파인 수많은 주름들로 이루어진 붉은색 산줄기가 기기하고 묘묘하다. 서역인은 '붉은 산'이라는 뜻의 '키질 탁'이라고 불렀다 한다. 너무나 밋밋한 이름이다. 중국인들이 일컬었던 화염산(火焰山)이 훨씬 제격이다. 멀리서 보노라면 정말로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느낌이다. 환상 문학이자 탐험기이며 액션물이기도 한 <서유기>의 무대로도 안성맞춤이다.

<서유기>의 주인공은 단연 손오공이다. 구미에서 <서유기>를 번역할 때 원숭이를 제목(Monkey King)으로 내세웠을 만큼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캐릭터가 살아 있다. 마력에다 마법까지 겸비한 다재다능한 말썽꾸러기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도에도 원숭이 장수 하누만(Hanumn)이 있다는 것이다. 힌두교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myaṇa)>에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라마를 돕는 원숭이 장수가 바로 하누만이다. 지금은 가네쉬와 쌍벽을 이루는 인도의 대표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서유기>가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널리 애독되었다면, <라마야나>는 인도를 중심으로 남아시아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라마와 삼장, 하누만과 손오공은 신기하리만큼 닮았다.

그래서 손오공과 하누만의 상관관계에 대해 학계의 설이 분분한 모양이다. 손오공이 하누만을 차용한 것인지를 따지는 게 그리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서유기>가 <대당서역기>에 바탕해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불교 설화나 인도 신화가 삽입되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중국과 인도, 불교와 도교 등 지역과 시대를 넘나들어 멀티 소스를 하나의 서사로 集大成(집대성)한 작품이라고 간주하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創作(창작)을 과도하게 추키는 것도 근대의 편견이다. 述而不作(술이부작)의 태도는 동방의 오래된 미덕이었다.

배경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서사의 궤적이다. <서유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손오공의 탄생과 천궁에서의 소동이 1부라면, 삼장법사의 생애를 설명하는 부분이 2부이다. 그리고 삼장법사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을 제자로 삼아 서역으로 여행하는 이야기가 3부를 구성한다.

백미는 단연 3부이다. 분량 면에서도 8할을 넘는다. 고로 <서유기>는 손오공이 삼장을 만난 이후에 전개되는 성장과 성숙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손오공은 바윗돌에서 태어나 동물로 살아가다가, 수련을 통해 막강한 힘을 얻지만 정작 그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요마가 된다. 그러다 서역 여행을 통해 다른 요괴를 물리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德性(덕성)'을 몸에 익혀가는 것이다. 탁한 기운을 맑게 가꾸고, 거친 기질을 어질게 길들여간다.

성장과 성숙의 서사는 공간적 기표로도 분류된다. 서유기는 천계-지상-하계로 삼분되어 있다. 천계는 신성한 공간이다. 하계는 욕망이 들끓는 원초적 공간이다. 지상은 천계와 하계 사이의 세속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읽힌다. 하계가 무의식이라면, 지상은 의식의 세계이다. 그리고 천계는 자아를 넘어선 진아(眞我)의 여여한 경지라 할 수 있다. 즉 서유기는 그 자체로 존재의 근원으로 진입하는 求道(구도)의 여정이다. 수성(獸性)을 거두고 인성(人性)을 획득하고 신성(神性)에 이르는 得道(득도)의 과정이다.

그래서 손오공은 '반영웅적 영웅'이다. 멀리는 헤라클래스부터 가깝게는 할리우드의 슈퍼 히어로와는 전혀 다른 영웅상을 제시한다. 압도적인 괴력으로 세상을 홀로 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통제하고 절제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힘을 발산하기보다는, 수행을 통하여 각성하고 덕화시킨다. 武(무)를 文(문)으로 감싸 안기, 중국의 쿵푸와 인도의 요가에 담겨있는 '아시아적 가치'가 손오공의 성장기에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고로 <서유기>는 선이 악을 이기고, 재난에 처한 세계를 영웅이 구해낸다는 천진난만한 아동물이 아니다. 몸의 통제와 마음의 절제, 도덕의 수련을 역설하는 심오한 성인물이다. 과연 인간이 불타가 될 수 있는가? 남(Being, 존재)에서 됨(Becoming, 생성)으로 거듭날 수 있는가? 현장법사의 일생의 화두가 천년 후 SF 소설에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원본이, 근본이 중요한 까닭이다.

▲ 사막 고속도로. ⓒ이병한

如反掌(여반장)

근대의 여행기는 대저 선교(Mission)이다. 처음에는 天主(천주)를 전파하고, 나중에는 民主(민주)를 설파했다. 그래서 정복과 전복(Regime Change)이 일관된 서사였다. 문명화, 근대화, 민주화를 복음처럼 외웠다. 작품으로도 반영되었다. 멀리는 <로빈슨 크루소>부터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지나 <인디아나 존스>까지 흡사하다.

독립된 개인을 드높이고, 자아와 자유를 극대화한다. 자아의 극복이 아니라 자아의 실현이 서사의 축이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는 중세라는 암흑기로 가두고, 남의 과거와 현재는 야만으로 접수해갔다.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계몽의 빛에 터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오만과 편견이 자라났다. 이성을 맹목하고, 과학을 맹신했다. 自省(자성)이 부족했다. 무지와 아집이 맹위를 떨쳤다. 서부 개척의 대서사는 求道(구도)와 得道(득도)를 구했던 서유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소산이었다.

손오공이 이성과 계몽의 단계에 머물 때도 있었다. 그의 如意棒(여의봉)은 뜻대로, 자유자재로 늘고 준다. 구름(筋斗雲)을 비행접시처럼 타고 다니기도 한다. DNA 복제술도 탁월하다. 털을 뽑아 수많은 분신을 만들어 낸다. 생명과학과 기계공학의 총아이다. 그럼에도 날고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아무리 빼어난 능력을 가졌다 해도,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인간이라는 근원적인 한계, 그 원초적인 고뇌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성에 대한 과신, 과학에 대한 맹신, 계몽의 서사를 일거에 허무는 擊蒙(격몽)의 죽비를 내리친다. 이 통쾌하고도 의미심장한 한 판 뒤집기의 상징이 바로 如反掌(여반장)이다. 반전시대의 메타포로 삼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기가 막힌 아이템이다.

소승에서 대승으로 가는 길에 <서역기>가 있었다. 에고(Ego)에서 참나(眞我)로 가는 길에 <서유기>가 있었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길을 떠나는 까닭은 늘 道(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새천년, 신세기, 새 길을 내는 새 역사 또한 구도와 득도와 무관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王道(왕도)의 실현이 없다면 일대일로 또한 손바닥 뒤집기(如反掌), 말짱 도루묵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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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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