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상가상으로 제주 서남방 해역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 협상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동안, 양측의 군사 활동은 증가하고 있다. 최근 중국이 EEZ 담판을 요구하고 나선 데에는 한국이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미국 편에 서는 것에 대한 견제구라는 시각도 강하다. 더구나 내년부터 제주 해군 기지가 본격 가동될 예정이다. 미국은 제주 기지를 사용하겠다는 입장이고, 중국은 좌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논다.
한마디로 복합적인 지정학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이다. 지혜의 핵심은 지정학적 위기를 지경학적 기회로 전환하는 데에 있다. 이건 우리가 하기 여하에 따라 충분히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에 성공하면 '헬조선'을 '웰(Well)조선'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지경학의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있다.
똑똑, 새로운 지경학이 한국의 문을 두드린다
먼저 북한에서 들리는 소리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곧 망할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최근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이나 탈북자들은 전혀 다른 얘기를 전해주고 있다. 식량난은 상당 부분 극복했고, 경제 사정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전언이다. 특히 김정은은 선군(先軍) 정치에서 선경(先經) 정치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점진적인 시장 경제의 도입, 농수산업 개혁, 경제 특구 확대, 과학기술 우대를 핵심축으로 삼아 김정은식 개혁 개방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김정은의 이런 모습에서 중국 개혁 개방의 기수 덩샤오핑(鄧小平)의 데자뷔를 느낄 수 있다. 앞서 열거한 북한의 개혁 개방 조치는 덩샤오핑 시대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덩샤오핑은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인공위성을 의미함)'을 마오쩌둥(毛澤東)의 최고 업적으로 내세우면서 이를 개혁 개방의 토대로 삼았다. 양탄일성 덕분에 강력한 군사적 억제력을 보유한 만큼, 이제 경제 발전에 주력하자는 의미였다. 김정은의 병진 노선도 이러한 논리 구조와 대단히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상컨대, 내년 5월 36년 만에 열릴 당대회는 김정은식 개혁 개방을 공식화는 자리가 될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의 동북 3성 개발 및 러시아의 동방 정책과 맞물려 북방 경제의 새로운 잠재력을 잉태하고 있다. 북방에서 새로운 지경학의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건 한국의 새로운 100년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해당한다. 수백 년간의 지정학적 딜레마를 지경학적 기회로 전환해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인 셈이다.
신 한반도 지경학의 세 가지 축
새로운 한반도 지경학은 세 가지 축으로 이뤄진다. 남북 경제 협력 활성화와 유라시아 대륙으로의 진출-환황해 경제권-환동해 경제권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세 가지 축은 고도의 연결 고리를 갖고 있고, 지금까지 한국 경제의 중심축이었던 남방 경제권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방 3개국에서 일고 있는 기운은 이러한 구상이 결코 헛된 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태동하고 있는 환황해 경제권도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 황해는 중국 경제의 심장부일 뿐만 아니라 북한 경제 특구의 서쪽 축이다. 또한 신의주-단둥을 중심으로 북-중 경협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고, 발해만에는 상당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한국의 서해 및 서남해 경제권과 융합시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는 것이다.
환동해권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선 이미 작은 실험이 진행 중이다. 남북한과 러시아의 물류 협력 사업인 '나진-하산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최근 북한은 나진 선봉을 종합 경제 개발 특구로 지정해 대규모의 개발에 나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북-중-러의 경제 협력도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한국이 이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일본의 동참도 이끌어내면 동북아 5개국이 공동의 번영을 모색할 수 있는 경제적 기회가 동쪽 바다에 넘실대고 있는 것이다.
지정학에서 지경학으로
물론 이러한 지경학적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지정학적 위기를 관리하고 예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핵심은 군사 위주에서 경제 우위로의 발상의 전환에 있다. 먼저 서해의 화약고로 불리는 NLL의 평화적 관리와 경제적 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 가령 남북한이 NLL을 '통일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인 선'이라고 합의하고, 비무장 평화수역 및 서해 경제협력 특별지대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제주기지 역시 민항 위주로 운용해 미국 군함이 아니라 국내외의 크루즈 선박이 올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중국과의 EEZ 협상에 나서면 우리의 발언권도 강해질 수 있다. 중국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데에는 한-미 동맹이 제주 해군 기지를 대(對)중국 견제·봉쇄용으로 삼을 가능성에 대한 경계의 뜻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래로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이에서 벌어진 지정학적 대결의 희생양이 되어왔다. 이제 500년간 이어져 온 지정학적 사슬을 끊을 때가 됐다. 북방에서 드려오는 노크 소리와 삼면의 바다에서 넘실대는 기회를 잡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대륙과 해양을 두 날개로 삼아 공동의 번영과 평화를 향해 웅비해야 할 역사적인 전환에 나서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11월 26일자에 기고한 칼럼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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