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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군인들은 학생들을 '전쟁 포로'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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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의 군인들은 학생들을 '전쟁 포로' 취급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9> 유신 쿠데타, 스물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 전후 사법부, 정치권, 군부, 언론이 각각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살폈다. 이번엔 학생 운동을 살폈으면 한다. 유신 쿠데타에 가장 적극적으로 맞설 만한 세력이 어디였을까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학생 운동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시기까지 학생 운동이 해온 역사적 역할을 봐도 그렇고, 노동 운동이 아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때이기 때문에 학생 운동이 맡아야 할 역할이 그만큼 더 막중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유신 쿠데타 후 한동안 학생 운동의 조직적인 저항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왜 그랬던 것인가.

서중석 : 유신 체제에 대해 마지막으로 강력하게 제동을 걸 수 있었다고 할까, 비판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하면 그건 바로 학생이었다. 사실 박정희 집권 18년간 박정희를 제일 괴롭히고 강하게 비판한 세력은 줄곧 학생 운동 세력이었다.

그렇지만 유신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에는 그렇게 반대 투쟁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했다. 그전에 학생 운동 세력을 철저히 평정했다고 할까, 때려잡았기 때문에 그렇게 됐던 것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학생 운동 세력이 더 이상 학원 내에 존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타격을 입었던 것이 유신 쿠데타가 일어날 그때의 상태였다.

대학 수업 시간의 약 20퍼센트를 교련에? 반발 자초한 박정희 정권의 대학 병영화

프레시안 : 1960년 4월혁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에도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등에서 학생들은 역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했던 학생 운동이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가.

서중석 :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학생들이 어떤 식으로 싸웠고 또 무력화됐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이 일어난 1968년에 주민등록증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향토 예비군이 설치되지 않나. 그해 12월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졌는데 특히 학생, 공무원들은 이걸 달달 외도록 강요를 받았다. 그런 식으로 국가주의, 권위주의에 복종하게끔 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에는 복고주의적인 면도 들어 있었다. 그런 복고주의에도 순종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일제 말에 그렇게 달달 외도록 강요했던 황국신민서사, 그리고 1950년대에 이승만 정권이 그렇게 외우도록 했던 '우리의 맹세'가 국민교육헌장으로 다시 등장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국민교육헌장에서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같은 것이 철저하게 비판의 대상이 됐다. (1950년대에 학교에서는 조회 시간에 '우리의 맹세'를 외치게 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 통일을 완수하자", 이런 내용이다. <편집자>)

그러면서 학생들을 더 강하게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박정희 정권이 내놓는데, 그게 바로 교련이라는 것이었다. 1968년 4월 정부는 1969년 신학기부터 남자 고등학교 2·3학년 학생들하고 ROTC(학군단) 소속이 아닌 남자 대학생들한테 군사 교육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고 나서 각 시도에서 시범 고교를 선정해 시범 훈련을 시켰다. 1969년에 들어와서는 서울의 고교 및 대학의 전 학년에 걸쳐 군사 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면서 교련이 여학생을 제외한 남학생들에게 정규 과목으로 이때부터 강행된다. 1970년 2학기에 가면 이제 여고생, 여대생도 교련을 이수해야 하게 됐다.

교련 강화라는 것은 대학 병영화를 그만큼 강화해서 대학 사회를 질식시키고, 대학에서 개성적인 활동 또는 비판적인 사고를 철저히 추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교련 강화에 학생들이 반발했지만, 정부는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1970년 12월에 오면 문교부가 대학 교련 교육의 시행 요강이라는 걸 발표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문제가 아주 심각했다.

프레시안 :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오늘날 젊은 독자들 중에서는 '분단 국가이니 학생들에게 교련 교육을 몇 시간 정도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까지 거부하는 건 대학생들이 자유만 누리겠다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그게 그렇지가 않다. 당시 문교부가 발표한 시행 요강을 보면, 그 내용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체주의 국가, 군국주의 국가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뭐냐 하면 대학 4년간 전체 수업 시간의 약 20퍼센트에 해당하는 711시간 동안 교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사 교육을 시킬 사람으로 현역 군인을 대학에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대학 전체 수업 시간의 약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교련을 받으라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전 세계에 이런 식으로 한 데가 있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되니까 1971년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당연히 이것에 대한 반대 운동이 학생회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게 된다. 처음에는 전국 대학 공동 선언문 같은 걸 낸다든가 학생 총회를 여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그러다가 그해 4월에 들어서면서 시위 투쟁으로 가게 된다. 1971년 4월에는 1969년에 있었던 3선 개헌 반대 학생 데모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다. 4월 2일 연세대생들이 교련 강화 반대를 외치면서 신촌 로터리로 진출했다. 6일에는 서울대 상대, 고려대, 성균관대 학생들이 가두 진출을 시도했다. 이어서 고려대생들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격렬한 시위 투쟁을 전개했다. 4월 13일과 14일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중앙대, 감리교신학대 등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전개됐다. 지방에서도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에서 시위를 벌이거나 성토대회를 열거나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4월 14일 서울대 사범대에서 살벌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뭐냐 하면, 교련 반대 시위를 하던 서울대 사범대생들이 던진 돌이 지나가던 대통령 경호 차량을 맞힌 것이다. 이러니까 경호를 담당하는 무장 경찰들이 제기동 근처에서 서울대 사범대로 막 난입해서 남녀 학생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잡아갔다. 그래서 사범대생 58명이 일시 연행되고 그랬다. 이때 분위기가 험악했다. 사범대생들이 깜짝 놀라고 무서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주 험악한 분위기였다.

4월 15일에는 고려대생이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3500명이나 모였는데, 경찰이 헬리콥터를 동원해 교내에 최루탄을 투하하는 바람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연세대, 외국어대, 한양대, 서강대 그리고 부산대, 충남대, 전남대, 청주대 등에서도 이날 시위가 일어났다. 그 후 4월 20일과 21일에 영남대와 강원대 등에서 시위가 전개되는데, 이때쯤 되면 데모는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대통령 선거일인 4월 27일이 며칠 안 남은 때였기 때문에 일종의 휴전 비슷한 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공명선거 쟁취 운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전국 각지로 가서 선거 참관 운동을 벌였다. 그런 와중에 보안사령부에서 사건을 하나 터트린다.

대선 앞두고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터트린 김재규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이때는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이었는데, 거기서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는 것을 터트린다. 이건 학생 운동을 위협한 면도 있었지만 사실은 대학 바깥의 사회를 더 겨냥한 것 아니냐, 이렇게 볼 수 있다. 대선 때마다 등장하던 그런 공안 사건을 터트려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한테 유리한 국면을 만들려고 한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사건에서는 서승, 서준식 형제 등 나중에 다 합쳐서 50여 명이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그중 17명이 기소됐다.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서승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난로의 기름을 몸에 끼얹고 분신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서승은 갇힌 지 19년 만인 1990년에야 풀려난다. 동생 서준식도 17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7년을 만기 복역한 1978년에도 서준식은 풀려나지 못했다. 강제 전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호 관찰 처분을 받아 10년 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1988년 비전향 장기수로는 처음으로 출소한 서준식은 1993년 몇몇 동료들과 함께 인권 단체를 만든다.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인권 운동 단체 중 하나인 인권운동사랑방은 그렇게 탄생했다. <편집자>)

이런 사건은 재일 교포 학생들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1950∼1960년대만 하더라도 재일 교포들이 일본에서 굉장히 심하게 차별을 받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젊은 학생들일수록 민족의식이라는 게 유난히 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게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조국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필요로 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그 조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지 않았나. 남한과 북한이 심하게 대치하는 국면이었지만 그래도 재일 교포들로서는 남한에도, 북한에도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북한의 선전, 꼬임에 빠졌다고 일부에서 주장하기도 하지만, 북한 상황도 알고 싶고 해서 북한에도 가보는 이들이 있고 그랬다. 그러다가 나중에 남쪽으로 유학을 와 가지고 조국이라는 것을 느껴보고 그러면서 진지하게 학문도 하려고 한 사람들을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으로 걸려들게 해서 사형도 선고하지 않나.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이런 일로 걸려들어 사형 선고까지 받고 그랬다. 이들 중에서 근래에 재심을 신청한 사람들은 무죄 판결을 받고 있다.


▲ 1971년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휘말린 서승은 19년이라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사진은 1990년 2월 28일 풀려난 서승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 ⓒ연합뉴스

프레시안 : 4월 27일 대선이 끝난 후 학생들은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학생들은 바로 부정 선거 규탄에 돌입했다. 일부 학생들은 '대선에서 참관인도 해봤는데 부정 선거가 정말 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5.25총선에 참가하려 하느냐'고 하면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라는 재야 단체와 함께 총선 거부 투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총선 거부를 요구하며 신민당사 농성을 벌이다가 그중 8명이 구속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 무렵 일본에서 사토 에이사쿠 수상이 방한하고 자위대 간부들도 방한할 것이라고 발표됐다. 그러자 6월에 들어가서 학생들은 사토 에이사쿠 수상과 자위대 간부들의 방한 반대 운동을 벌인다. 그러면서 방학을 맞게 된다.

방학이 끝나자마자 규모가 큰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학생들은 방학이 끝나자 다시 교련 철폐 투쟁을 벌인다. 이미 8월 하순에 고려대, 서강대, 연세대, 그리고 서울대의 몇 개 단과 대학에서 교련 수강 거부 운동을 폈다. 처음에는 성명서 등을 통해 각 대학의 학생들이 교련 반대 운동을 하다가 9월 하순 연세대생 데모, 카드 시위를 필두로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9월 28일부터 시위가 벌어지는데, 큰 시위는 그때부터 10월 13일 사이에 주로 벌어진다. 보름 정도 시위가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그전과 비교하면 이 시위 규모가 크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초강경 태세로 대응했다. 이것은 12월 6일 국가 비상사태 선언으로 다 연결되는 것이다.

타오르는 저항의 불길, 위수령으로 내리누른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국가 비상사태 선언에 앞서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을 발동한다. 위수령을 발동할 때까지 학생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10월 5일에 큰 사건 세 가지가 일어났다. 우선 전에 이야기한 10.2 항명 파동으로 김성곤, 길재호가 바로 이날 공화당에서 축출을 당한다. 다른 하나는 이날 새벽 1시 30분경 수도경비사령부 제5헌병대 군인들이 고려대에 들어와서, 철야 농성 중이던 학생 5명을 수경사로 불법 납치, 구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직접적인 계기는 고려대에서 학생들이 9월 30일과 10월 4일,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부정부패 원흉을 처단하라는 내용의 벽보를 붙인 것이다. 이때쯤 되면 교련 철폐와 부정부패 원흉 처단, 그러니까 부정부패 반대 운동이 결부되는데 10월 4일 고려대에 붙은 벽보에는 부정부패 원흉으로 지목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거론돼 있었다. 예컨대 이후락, 김진만 같은 유명한 부정 축재자들의 이름을 써놨는데 거기에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이름도 있었다. 그러자 수경사 군인들이 그렇게 고려대에 난입한 것이다.

이게 국가 기강이 있는 나라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만약 법적인 조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라면 법에 따라 조치를 해야지, 어떻게 군인들이 마음대로 학교에 난입해 학생들을 붙잡아다가 구타하나.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이런 행위가 과거부터 방치, 조장돼온 것과 연관되는 것 아닌가. 그런 행위를 해도 괜찮다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니겠느냐, 이 말이다. 하여튼 이때 고려대 김상협 총장이 강경하게 항의했다. 10월 8일에는 고려대에서 긴급 비상 학생 총회가 열렸다. 이날 학생들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아주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10월 5일 김성곤과 길재호 사건, 고려대 사건과 더불어 일어난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사건은 원주에서 열린 부정부패 규탄 대회다.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해서 원주교구에서 많은 천주교인과 시민들이 7일까지 부정부패 규탄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부정부패 추방을 넘어 중앙정보부 해체, 반공법 폐기까지 요구했다. 천주교 원주교구의 시위를 계기로 부정부패 추방 운동은 개신교와 가톨릭 청년 학생 단체로 퍼져나간다. 이 사건은 천주교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는 시발점이 됐다.

그런 속에서 10월 7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 학생들이 부정부패 추방 시위 투쟁을 격렬하게 벌였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중앙정보부 철폐, 부정부패 특권분자 처단, 민중 생존권 보장, 학원 탄압 관계자 처단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월 11일, 12일에 가면 연세대, 성균관대, 동국대, 동아대, 부산수산대에서 무장 군인의 학원 난입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3일에도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연세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 전국의 14개 대학 학생 대표가 모여서 규탄 대회를 했다.

정부는 초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10월 12일 국방부 장관과 문교부 장관은 교련 수업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겠다는 내용의 공동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수강을 거부했다고 해서 강제 징집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야말로 초강경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그것에 이어 14일 문교부는 전국 총·학장 회의를 열고 학생들을 철저히 지도하라고 하면서, 허가 없이 간행물을 발간하는 주동 학생들을 엄단하겠다고 강조했다.

드디어 10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9개 항목으로 된 '학원 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 법령'을 발표하고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그 9개 조항은 '학원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도 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라', '앞으로 학생들의 여하한 불법적 데모, 성토, 농성, 등교 거부 및 수강 방해 등 난동 행위는 일절 용납할 수 없다. 이러한 행동을 주도한 학생은 전원 학적에서 제적하라', 이런 것들이었다. 대통령이 학생들의 움직임을 '난동 행위'로 단정하고 초강경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대학들에 군이 투입된다.

▲ 위수령 발동을 보도한 <경향신문> 1971년 10월 15일 자 1면. ⓒ<경향신문>


전쟁 포로 다루듯이 학생들을 짓밟은 박정희의 군인들

프레시안 : 위수령 발동 후 대학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서중석 : 10월 15일 서울대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로 가득 찬 27대의 군 트럭이 헌병 차량의 호송을 받으며 문리대 정문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이날은 서울대 개교기념일이어서 학생들이 대부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별 충돌이 없었다.

문제는 이보다 1시간 전쯤 수경사 소속 무장 헌병 200여 명이 20여 대의 군 트럭에 나눠 타고, '싸이카'로 불리는 오토바이 2대와 9대의 장갑차까지 몰고 고려대로 진입하면서 벌어졌다. 군인들은 앞에총 자세로 학생들에게 접근해서 학생들을 붙잡아 손을 머리 뒤로 하게 했다. 그러니까 전쟁 포로처럼 하게 한 건데 그 후로도 계속, 특히 1980년 광주에서도 군인들이 많이 하는 짓 아닌가. 어쨌건 그렇게 손을 머리 뒤로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숙인 채 꿇어앉게 했다. 머리를 드는 학생에게는 총 개머리판과 야전 곡괭이 자루가 막 날아갔다. 여자 옷도 찢기고 남학생들 머리엔 선혈이 낭자했다고 그런다. 이걸 쳐다보던 학생들이 돌을 던지자, 군인들은 최루탄으로 응수했다. 학생들이 여기저기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숨자, 군인들은 학교 건물 유리창을 깨면서 그 안에다 사정없이 최루탄을 쏴댔다. 군인들은 물론 방독면을 쓴 상태였다. 그러면서 강의실, 휴게실, 창고 할 것 없이 싹 뒤져서 학생들을 끌고 나왔다. 이날 정오 무렵 시작된 학생 체포 작전은 오후 6시경에야 끝났다고 한다.

10월 15일 7개 대학(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경희대, 외국어대)에서 연행된 학생들은 모두 1889명에 이르렀다. 군대는 10월 23일까지 각 대학에 주둔했다. 군인들이 철수할 때까지 전국 23개 대학에서 174명이 제적 처리됐고, 35개 대학에서 교련 미수강자 6322명을 비롯한 1만3505명이 학적 이동자로 병무청에 신고됐다. 그리고 문제가 된 서클이 6개 대학 74개, 폐간된 학생 간행물은 4개 대학 13종, 학생 자치 단체 기능이 정지된 곳이 7개 대학이었다. 1960년대 중반이나 1967년 6.8 부정 선거 반대 데모 때나 1969년 3선 개헌 반대 데모 때는 학생회 간부가 학생 운동을 하는 사람들하고 좀 다른 경우가 꽤 있었는데, 1971년에는 중요 대학 학생회를 운동권 학생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학생 자치 단체 기능이 정지된 대학 7개라는 것도 그것하고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튼 이렇게 많은 학생이 제적된 것에 대해 한 야당 의원은 "일제 때 항일 운동 시기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개탄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학생 운동권은 수사 기관에 검거돼 아주 심하게 고문을 당한 다음에 강제 징집을 당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이때 강제 징집을 당한 사람은 어느 정도 되나.


서중석 : 그런 사람이 몇 명인지는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다만 7.1동지회, 그러니까 1971년에 쫓겨난 학생들이 만든 이 단체에서 나온 자료에는 177명이 제적되고 100여 명이 강제 입영된 것 아니냐고 돼 있다. 이 100여 명에겐 아스피린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때 그렇게 불렀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ASP, 그러니까 보안사에서 이 사람들한테 붙인 딱지로 보이는데 병적부에 Anti-Student Power, 즉 반정부 학생 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걸 우리가 잘 먹는 약의 이름인 아스피린으로 일반 사람들은 부르고 그랬다.

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 후 학생들을 이런 식으로 강제 징집한 건 이때 처음 있는 일이었나.

서중석 : 딱 잘라 말하기가 애매한 면이 있다. 1971년 이전에도 학생 운동을 하다가 원치 않은 시기에 군대에 가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나만 해도 1971년 이전에 사실상 강제 징집을 당했다고 볼 수 있긴 한데, 그때는 강제 징집이라는 형태로 이뤄진 건 아니었다. 겉으로는 법적인 수속을 밟는 식이었다. 그리고 6.3운동이 전개된 1964년, 그리고 1965년에도 학생 운동을 하다가 군대에 끌려가는 일이 꽤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와 달리 1971년 이때는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강제 징집이 첫 번째로 이뤄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1971년 이때 끌려간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들 전방 소총 부대에 배치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군대 내에서 여러 사람과 연락했는데, 다 그런 부대에 있더라. 1971년 이전에 군대에 가게 된 나 같은 경우 전방이긴 해도 병참 부대에 배치됐다. 그러니까 1971년 이전에 군대에 끌려간 사람들에게는 그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1971년 이때 강제 징집된 사람들은 다들 전방 소총 부대에 배속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신 쿠데타 직후 학생들은 저항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대규모 연행, 제적, 강제 입영 등으로 학생 운동은 그야말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그런 식으로 학생들을 제적하고 강제 입영을 시키고 여러 간행물을 폐간시키고 하면서 11월에 가면 중앙정보부가 서울대 내란 예비 음모 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한다. 서울대생인 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이렇게 네 사람과 사법연수생이던 조영래 등이 폭력 시위를 통해 정부 기관을 습격, 전복한 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및 학생 대표들과 혁명위원회를 구성한다는 등의 9단계 국가 전복 계획을 추진했다고 하면서 이들한테 실형을 선고했다. 다 유명한 사람들이다.

하여튼 1972년 10월 17일을 맞이했을 때 대학생들은 유신 쿠데타가 어떤 쿠데타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다시 시위로 나아가는 모습은 그로부터 1년 후, 그리고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기준으로 하면 2년 후가 되는 1973년 10월 2일이 돼서야 나타난다. 그날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위를 벌이는데, 이걸 시작으로 여러 대학에서 다시 투쟁을 벌이게 된다.

다시 말해, 서울대건 어디건 유신 쿠데타가 났을 때 학생들 어느 쪽도 저항할 수 없었다. 언론도, 야당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이처럼 어느 곳도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가 자신감을 가지고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서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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