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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키스탄의 꿈과 '중국몽'은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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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키스탄의 꿈과 '중국몽'은 만날 수 있을까?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실크로드 역사 단상 ③

파리 테러 참사로 G20 회의가 열리는 터키에 우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집단의 위협이나 최근 앙카라의 테러가 아니더라도 터키는 이미 한국인에게 편안한 지역만은 아니다. 얼마 전 터키의 반(反)중국 시위대가 한국인을 중국인으로 오인하고 공격한 사건 때문이다. 그 시위는 타이로 망명을 시도한 위구르족을 타이 정부가 중국으로 송환하면서 빚어졌다. 위구르족과 터키 사람들이 무슨 사이기에 위구르족이 중국에서 겪는 고난 때문에 터키 사람들이 시위를 할까? 이 질문에 오늘날 중앙아시아를 이해하는 열쇠가 있다.

터키는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나라들과는 판이한 역사 인식을 가진 나라이다. 우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현재의 국경 안팎에서 민족사를 이어 왔다고 믿는다. 중국은 현재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모두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다 우리뿐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와 마찰을 빚어 왔다. 반면 터키는 기원전부터 현재의 몽골 일대에서 활약한 흉노를 자국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유목민을 선조로 둔 나라답게 역사 인식 자체가 지역적 이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흉노를 선조로 기술하는 나라는 셋이 있다. 터키, 몽골 그리고 헝가리이다. 아직 학술적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 나라들이 흉노를 자기네 역사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나름대로 근거가 없지 않다. 그렇게 볼 때 오늘날 터키라고 불리는 지역에 터키인이 들어간 것은 빨라야 서기 10세기 이후의 일이고, 히타이트라든가 비잔틴 제국이라든가 하는 그 지역의 이전 역사는 터키의 역사가 아니라 선사(先史)가 되는 셈이다. 1492년 이전 아메리카의 역사가 현대 아메리카 대륙 각국의 선사인 것처럼 말이다.

▲ 터키의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의 영전에 바친 꽃들. 과거사가 어떻든 근대 터키는 케말 아타튀르크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강응천

흉노는 몰라도 서기 6세기 북아시아에서 유목 제국을 일으킨 돌궐(突厥)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터키인, 즉 투르크인의 역사이다. 한자 발음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돌궐은 투르크의 음차이다. 돌궐 이전에는 철륵(鐵勒)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남아 있는 돌궐 문자 비문을 보면 철륵과 돌궐을 모두 투르크로 읽고 있다. 이러한 돌궐인(투르크인)은 역사 속에서 아질(阿跌), 혼(渾), 설연타(薛延陀), 회홀(回纥) 등 다양한 종족으로 존재했다. 그들이 이합집산을 통해 오늘날 터키,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의 독립국가와 타타르스탄, 사하 등 러시아 연방 내의 자치 공화국을 이루고 있다.

이런 투르크인의 나라를 '투르키스탄'이라고 한다. 이 말은 8세기 아라비아인이 펴낸 지리학 저작에서 중앙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뜻으로 쓰였다. 이후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힌디-우르드어 등으로 쓰인 각종 역사 문헌, 비문, 외교 문서, 경제 문서, 문학 작품 등에서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18세기에 이르러 동부 투르키스탄이 청에 병합되면서 그 이전까지 한 덩어리로 인식되던 투르키스탄에 변화가 생겼다. '동투르키스탄'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까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던 서부는 '서투르키스탄' 또는 '협의의 투르키스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들어 히바(우즈베크), 부하라, 코칸트 세 나라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때 서투르키스탄은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동투르키스탄은 중국령 투르키스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오늘날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독립 국가의 이름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으로 정해 놓고 있다. 한자로 쓰면 '동돌궐공화국'이다. 마치 그 옛날 당 태종에게 굴복한 동돌궐의 부활을 시도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들이 제정한 국기는 터키 국기와 매우 유사하다.

이 같은 분리 독립의 지지자들은 동투르키스탄(신장위구르자치구)이 예로부터 독립 국가였다고 믿는다. 18세기 이전에는 중국에 직접 예속된 적이 없고 그나마 1881년까지는 조선, 베트남과 비슷한 지위였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인 병합은 1881년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한 무제가 서역도호부를 설치한 이래 신장은 중국 통일 민족 국가의 불가분한 구성 부분이었다고 주장한다. 1884년 청나라의 좌종당(左宗棠)은 동치제에게 "타민족에게 핍박받던 고토에 새로 돌아가야 합니다(他族逼處,故土新歸)"라는 상주를 올렸다. 그에 따라 청 조정은 이곳에 신장 성이라는 행정 기구를 건립했고, 그 후 오늘날까지 일시적인 급변기를 제외하면 신장은 중국의 일부로 자리 매김 되어 왔다.

이처럼 극단적인 역사관의 차이 때문에 최근 들어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분리 독립 운동은 폭력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1990년대 이래 심각한 폭동이 종종 일어났다. 1997년 2월에는 우루무치에서 연쇄 버스 폭발 사건이 발생하고, 카자흐스탄 국경 가까운 이닝 시에서도 많은 사람이 희생된 충돌이 있었다. 위구르족 청년이 탈레반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은 사례도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 직전인 8월 4일에는 카스 지구에서 테러가 일어나 경찰 16명이 죽고 16명이 다쳤다. 이듬해 7월 광동에서 위구르족이 구타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우루무치 시 등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탈리아 G8 확대 정상 회의에 참석하려던 후진타오 주석이 급거 귀국할 만큼 급박한 사건이었다.

신장위구르자치구 곳곳의 도시에는 인민해방군이 진주해 치안을 유지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부(首部)인 우루무치의 중심 상가를 방문했을 때, 그 앞에 배치된 탱크 앞에서 중화기로 무장한 채 경비를 서고 있는 군인은 앳된 얼굴의 한족 청년이었다.

과연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나아가 '투르키스탄'의 앞날을 어떻게 될까?

우루무치 공항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두 중국 소녀와 동석했다. 둘 다 막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참이었는데, 한 명은 위구르족이고 한 명은 한족이었다. 그들은 둘 다 중국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컸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은 미국 대학이 더 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경험을 해 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정도라면 상위 계층에 속하는 아이들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외부 세계에 갈등의 상대방으로 알려진 두 민족의 소녀가 두 손 꼭 잡고 유학을 떠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중국으로 돌아올 지 미국에 눌러 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대학을 마치고 우루무치에 돌아온 이후의 삶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 삶의 양태는 몇 년 후 신장, 나아가 중국,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의 미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 우루무치 중심 상가인 바자르. ⓒ강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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