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설 수 없는 예산·법안 전쟁이 시작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10일 국무회의를 열고 사실상 야당에 선전포고를 했고, 새누리당은 예산안과 법안을 연계해 처리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박 대통령이 밀어붙이고 있는 경제 활성화 법안 및 노동 관련 법안 처리에 야당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 예산안 처리를 보이콧하겠다는 의미로까지 읽힌다.
집권 여당의 예산안 보이콧 시사는 초유의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박 대통령의 10일 국무회의 발언을 보면 답이 나온다.
박근혜, 내년 총선 앞두고 "국민 여러분, 국회에 진실한 사람만 선택해달라"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국민 심판론'을 내세웠다. 유승민 원내대표 숙청 파동 때 나왔던 어법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는 법안들은 19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국회가 이것을 자동 폐기한다면 국민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매일 민생을 외치고 국민들을 위한다고 했지만 정치적 쟁점과 유불리에 따라 모든 민생법안이 묶여 있는 것은 국민과 민생이 보이지 않는다는 방증이 될 것"이라며 "이제 국민 여러분께서도 국회가 진정 민생을 위하고 국민과 직결된 문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도록 나서주시고, 앞으로 그렇게 국민을 위해서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법안이 처리되지 않을 경우, 내년 총선에서 국민이 국회를 심판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야당보다 여당에 더 무겁게 다가오는 발언이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찍어낼 때도 박 대통령은 "국민의 심판"을 외쳤다. 이는 곧바로 '비박(非朴) 물갈이론'으로 이어졌었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청와대발(發) TK 물갈이론'이 파다하게 퍼져있다. 여당 의원들의 간담이 서늘할 만하다.
박 대통령은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우리의 노동 개혁이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라는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노동 개혁 5대 입법이 반드시 통과돼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조속히 처리돼야 할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동개혁 법안,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이 오랫동안 방치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논의가 없어서 아쉽다"며 "이것은 국민들의 삶과 대한민국 경제를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이라고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 때마다 법안을 통과시켜달라고 사정하는 것도 단지 메아리뿐인 것 같아서 한탄스럽다. 모든 것을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 국회의 모든 법안을 정체된 상태로 두는 것은 그동안 말로만 민생을 부르짖은 것이고, 국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총선 앞두고 다급한 새누리당, 집권여당이 '예산안 보이콧' 시사
상황이 이러니 새누리당은 다급해졌다. 2016년 예산안 처리 법정 시한을 20일가량 앞둔 가운데, 정부-여당이 예산안과 5대 노동법 등을 연계 처리하려는 뜻을 내비쳤다.
야당이 새누리당의 당론인 노동법(파견법·기간제법·근로기준법·고용보험법·산재보험법)과 소위 경제 활성화법(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관광진흥법·국제의료사업지원법), 그리고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의 정기국회 내 처리에 협조하지 않으면, 새누리당 또한 2016년 예산안 심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엄포다.
새누리당 김정훈 정책위의장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야당이 내달 2일까지 야당 안이 반영된 예산안이 통과되고 나면 남은 경제 활성화법, 노동법,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강 건너 불 보듯 할 것이 뻔하다"면서 "이런 마당에 여당만 예산안 처리에 속도를 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부-여당이 꼭 필요로 하는 경제 활성화법, 노동법 등도 연계해서 같이 처리해야 한다. 야당이 정부-여당이 필요로 하는 법안 처리에 협조하지 않으면 예산안 법정 시한도 의미가 없다"면서 "최악의 경우 이번에 꼭 처리해야 할 경제 활성화법, 노동법 등은 반드시 연계해 같이 처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 정책위의장이 언급한 '경제 활성화'법 중 하나인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의료 영리화' 법안으로 지적되어 왔다. 또 5개 노동법은 파견직과 기간제 등 비정규직의 대량 확산과 주당 법정 근로시간의 연장 등을 부르는 '노동시장 개악'을 골자로 하고 있어 야당과 노동계의 반발을 사던 상황이다. 게다가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제대로 된 법안 심사를 거치지도 않았다.
새누리당의 이 같은 예산안-법안 연계 처리 압박은 새누리당이 번번이 '악법'이라고 비난해 온 국회 선진화법에 힘입은 것이다. 현행 국회법에 따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오는 30일까지 예산안 심의를 끝내지 않으면, 국회가 심사한 예산안이 아닌 국회에 제출된 '원안'인 정부 예산안이 본회의에 자동 부의 된다. 이런 탓에, 이른바 '예산 정국'은 어떤 식으로건 여당에 훨씬 유리하게 조성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말하면, 국회 예결특위 심사 등을 통해 부적절하게 편성된 정부 예산을 증액 또는 감액 심사해 온 야당으로선 '시한 내 심사'를 통해 정부안의 본회의 자동 부의를 꼭 막아야 하는 처지다. 그러나 이처럼 '통과 저지' 또는 '원안 처리 불가' 방침을 세웠던 여당 발(發) 법안이 예산안에 연계될 경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새누리당의 이번 '법안-예산안' 연계 처리 압박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 고시 직전 새누리당이 보였던 태도에 비추어 '이율배반'적이란 비판도 나온다. 당장 새정치민주연합의 '교과서·예산안 연계' 처리 가능성이 거론됐던 지난달에만 해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전혀 별개 문제(교과서)와 (예산을) 연관시키는 이런 국정 발목잡기는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야당을 비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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