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제주도에 있는 조그마한 카페입니다. 제주도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즐겨찾는 풍광좋은 관광지도 아니고, 바다나 오름이 곁에 있지도 않은 중산간에 있는 조용한 시골마을입니다. 문 밖에 나가 앉으면 그 앞으로 지나다니는 자동차보다 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를 더 많이 보는 것 같을 정도이니, 말 그대로 한적하고 조용한 그런 마을. 그 마을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으니, 마을만큼이나 이 카페도 사람들 발길이 드문 그런 곳이랍니다. 친구네가 차려 운영하던 이 카페를 저희 감자네 식구가 우연찮은 기회로 당분간 맡아 꾸려가고 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동료작가 김해원 선생님에게 '을들의 국민투표'에 대한 소개와 제안을 받았습니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마음대로 해고를 할 수 있게 하는 '개혁', 동료들끼리 충성경쟁을 강요하게 하는 '개혁',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늘리고 55세 이상의 숙련 노동자들을 제한없이 파견으로 쓸 수 있게 하는 '개혁'. 지난여름부터 이 나라 정부가 반드시 실현시키겠다는 '노동개혁'은 노동자들에겐 그야말로 재앙과 다름없는 어둑컴컴의 미래.
아마도 이 땅에서 갑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개혁'이라 할 만한 것이긴 하겠습니다. 필요할 때만 싼값에 뽑아 쓰다 내버려도 좋은, 쥐어짜고 또 짜고 더 이상 짜낼 것이 없으면 마음대로 잘라버리더라도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어지는. 그네들에게는 손쉬운 해고라는 칼자루와 차등임금이라는 목줄을 다 가지게 되는 거니 이 얼마나 혁명적인 개혁이겠는지.
아무래도 이 나라는 누구에게나 존엄이 있고,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저마다의 소박한 꿈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는 곳은 되지 못 하는가 봅니다. 박근혜 정부의 선거 슬로건이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였던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곳은 오로지 당신의 꿈만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었고, 당신의 얼굴 뒤에 숨어 배를 불리는 갑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나라는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이 아니라 '갑'들만이 꿈을 이루는 대한'갑'국이 되었습니다. 을들에게는 그 어떤 존엄도, 행복도, 꿈도 허락이 되질 않는.
갑들의 나라 '대한갑국'에서 을들의 투표가 제안되었습니다. 이 나라 한 줌의 '갑'들이 아닌, 이 나라 대다수 힘없는 '을'들의 뜻을 묻는.
그래서 여기 제주도 중산간의 조용한 마을, 조그만 카페에도 '을들의 국민투표' 투표소를 마련했습니다. 처음 제안 받았을 땐 적잖이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을들, 더 많은 시민들에게 박근혜 노동개혁의 실상을 알리고, 바닥 민심을 모아내려면 이런 발길 드문 카페가 아니라 시내 복판이거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기껏 투표소를 차리고 투표함을 갖다 놓았는데 먼지나 뒤집어쓰는 초라한 투표소가 되고 말면 어쩌나 하는 걱정.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투표소를 설치하는 일이 오히려 이 운동에 힘을 빼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인적 드문 시골에서조차 꿈틀거리는 민심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될 수 있다면 투표참여자가 얼마 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10월 14일, 제주도 애월 중산간의 조그만 카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에서도 '을들의 국민투표소'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이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도 꽤나 많은 분들이 투표에 참여하고 있어요. 실행위원 한 분이 직접 제주까지 내려와 투표기구를 전해주고 가던 첫날, 제주에 캠핑하러 온 커플이 아침 커피를 마시러 들어왔다가는 첫 투표자가 되었습니다. 아직 투표소를 제대로 세팅해놓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지요. 그다음에는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이 자기는 주소가 여기가 아닌데 투표를 해도 괜찮냐면서 선거인명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웃에 사는 아기 엄마들이 함께 왔다가 아기들을 안고 줄을 지어 투표를 하였고, 교복을 입고 들어서는 여고생도 투표를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읍내에 있는 미용사 분이, 이웃에서 집을 짓고 있는 인테리어 기술자들이, 혼자서 제주 여행을 다니던 앳된 아가씨가…. 여기에서 제가 한 일이라곤 누군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국민투표 제안 유인물을 한 부씩 건네는 게 다였어요. 아, 아니구나. 주방에서 칼질을 하거나 손을 물에 담그고 있을 때 들어오는 손님들에게는 그런 소개조차 하질 못했는데, 유인물을 건네거나 하질 않더라도 먼저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선거인 명부에 이름을 쓰는 분들이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
모두 이 나라 '대한갑국'에 살아가는 우리 을들이었습니다. 아, 지금 하고 있는 건 단순히 서명운동이 아니라 투표 형식의 캠페인이니 어느 쪽에 투표했을 거라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는 거긴 하겠네요. 하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건, 이 투표 형식의 캠페인 참여가 낯설어 처음에는 서명운동이라 여기고 선거인명부에 이름부터 쓰지만, 투표용지를 받고나면 하나같이 그렇게 물었으니까요.
"비정규직을 늘리는 거에 반대하는 거면 어느 쪽에 투표하면 되나요?"
"정부 정책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어디에 찍으면 되죠?"
카페에 휴대폰 송신이 잘 안 되어 중계기를 설치해주러 오신 기사 분들도 투표에 참여하셨습니다. 더운 볕을 맞으며 지붕 위로 아래로 땀을 절절 흘리고 내려오신 분들께 차마 투표 얘기는 꺼내지 못한 채 음료수 한 잔씩을 내드리고 있자니, 일을 다 마친 기사 분들이 서로 "이거 투표하고 가자", "박 부장이 먼저 해" 하면서 역시 자발적으로 투표소 안에 들어갔습니다. 혹시 몇 마디라도 붙여보고 싶어 "기사님들도 통신사 직영이 아니라 협력업체에서 일하시는 거 아닌가요?" 하고 물으니 그렇다 하십니다. 그러면서 박근혜 노동정책의 문제에 대해 오히려 저보다도 더 깊이 있게 걱정하며 설명을 하세요. 그 모습에 이번에는 혹시 노동조합 활동 같은 걸 하시는지 물었더니 그렇지는 않다네요. 그러나 이미 현실에서 노동자가 처한 처지와 조건을 몸으로 부딪고 있는 분들은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며 절망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우리 다음 세대가 정말 걱정이라."
사십 대 후반으로 보였으니 이르면 대학생 자녀를 두었거나 아니면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아비들이었을 겁니다.
정수기 필터를 청소해주러 다녀가던 청년도, 커피 원액을 공급해주는 거래처 사장님 내외도, 외식업중앙회에서 점검을 다녀가던 직원도, 카드 단말기를 교체해주고 가던 기사님도, 제주 초가집 보수를 하러 다녀가던 문화재보수기술자 선배와 후배도, 그리고 제주에 내려와 귤농사를 지으며 귀촌해 살고 있는 식구도, 생협에서 협동조합 일을 하고 있는 아내와 인테리어 목수인 부부도, 제주방송에서 피디로 일을 하고 있는 분도, 카페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는 여행객들도, 하나 같이 투표 참여 제안을 귀찮아하거나 성가셔하지 않고 기꺼이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어느 앳된 아가씨들은 요즈음 이 카페 앞을 지나다니며 '을들의 국민투표' 포스터를 보았다며, 회사에 나가지 않는 일요일에 일부러 찾아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차를 시키고 카페 다락방에 올라가 노트북을 켜고 무언가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하던데, 아마도 어떤 자격시험이나 정규직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는 이 나라, 존중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부당 처우에도 언제 잘리게 될지 몰라 불안하기만 한 나날의 삶, 대한'갑'국에서 살아가는 '을'들의 삶.
앞서 얘기한 것처럼 여기는 아주 한적하고 인적드문 중산간 마을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만 마을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중 예술인들이 이웃하여 살아가고 있기도 하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고백을 하자면 그 분들의 이름에 기대어 '을들의 국민투표'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어요. 하지만 대중 앞에 이름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그 나름으로 커다란 무게의 조심스러움이 있다는 걸 알기에, 아무리 절박한 대의 앞에서라도 표현이나 참여방식에 대해서는 그분들의 선택을 무엇보다 존중해야 하겠지요.
카페에 자주 들르시곤 했으니, 카페 한 가운데에 놓인 투표함을 못볼 수가 없겠지요. "기범씨, 이게 뭐야?”"하고 먼저 물어보기에 나름껏 대답을 말씀드리니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투표소에 들어가 선거인명부를 쓰고, 투표용지에 기표를 했습니다. 인증샷을 허락받아 사진을 찍으려니까 포즈를 예쁘게 잡아주시기도 했는데, 한 가지 당부를 하시는 거예요. 마음으로는 십분 지지하고, 그래서 투표에도 망설임없이 참여했지만 언론이나 매체 같은 곳에 올리는 것만큼은 하지 말아달라고.
그런데도 저는 미련을 놓지 못하고 이런 얘길 붙여보긴 했어요. "OO 님이 함께 참여한 거를 알면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될 거예요, 그리고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도 더 널리 알릴 수 있게 되기도 하고…." 그래요, 그 분이라고 그걸 몰라서 그럴까요. 그러나 아마 제가 더 조르고 그랬다면 앞으로는 이렇게 자필 서명을 하면서 조용히 참여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귀하고 소중한 걸.
우리 마을 이웃 가운데에는 지난 해 많은 이들이 시청한 드라마 '미생'에서 주요 조연으로 연기한 배우 분이 살고 있기도 한데, 그 연기자 분의 가족들도 기꺼이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이 ‘대한갑국'의 현실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삶의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낸 드라마였던만큼,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가 주요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을들의 국민투표'에 참여하는 일은 또한 의미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엊그제 주말에는 서귀포 뮤직페스티벌에 공연을 하러 내려온 싱어송라이터들이 감자네 카페에 다녀가면서 투표소를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음악으로 많은 청년들에게 사랑받는 이아립, 시와, 강아솔 씨였어요. 같은 청년 세대로서 무대에 서면서 삼포, 오포 세대로 살아가는 청년들의 아픔에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뮤지션들.
그래요, 어떤 유명인이 참여를 했건, 이름없이 소박하게 삶의 현장을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을'들이 참여를 했건 그 한 표 한 표가 모두 귀하고 소중했습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을'의 아픔을 절실하게 겪고 살아가는 우리 '을'들의 목소리야말로 그 아픔과 절실함은 더하겠지요. 카페에서 중계기를 설치하고 가면서 투표하고 가셨던 통신사 협력업체의 기사님들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일이 정말 걱정이다"하고 절망 가득한 한숨처럼 내쉬던 말처럼, 노동자들이 살아갈 내일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이미 지금도 청년과 노동자들에게는 지옥과 다름없는 '헬조선'의 현실 위에, 그것도 모자라 '죽어라 죽어라'하는 정책을 내놓고는 그걸 '노동개혁'이랍시고 관철을 고집하고 있는.
이 조용하고 한적한 제주 중산간 마을에서도 투표소에는 우리 '을'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처음 투표소를 설치할 때만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민중총궐기를 앞두고 있는 11월 12일까지 투표소를 유지하려 하고 있는데, 이미 투표용지는 다 쓰고 여섯 장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의 맨 아래, 뚝 떨어져있는 섬의 촌마을에서도 이렇게 '을'들은 암담한 노동현실을 숨막혀하고 있습니다. 이 '대한갑국'의 땅에서 우리 '을'들의 바람은 아주 작고도 당연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땅은 '갑'들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갑들의 배를 불리려 아무렇게나 쥐어짜다 버려도 좋은 '을'의 삶이 따로 있지는 않다는, 여기는 대한'갑'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선언이자 절규.
('을'들의 #국민투표 영상뉴스 바로가기 ☞ : '을'들의 국민투표 영상뉴스 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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