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가시화할 도구가 필요하다. 바로 '여론조사'다.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는 언론의 보도를 만나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여론조사 보도의 영향력
1990년대 중반, 정치에서 대규모 군중동원 유세가 사라지면서 여론조사가 선거의 주요 변수로 등장했다. 언론에서 여론조사가 자주 활용된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았다. 주로 경마식 보도가 문제가 됐다. 언론사가 직접 비용을 지불해 실시한 여론조사의 경우, 특정 후보를 유리하게 하는 편향보도 또한 자주 도마 위에 올랐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론조사 인용 보도의 한계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여론조사는 여전히 시민들의 정치적 선택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 유권자들이 선거의 시류에 편승해 표를 주는 현상)나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 패자에게 표 던지기. 여론조사 결과에서 뒤처지는 후보에게 표를 주는 현상)가 대표적이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를 인용한 보도의 영향력이 큰 것은, 순위를 매기는 일 자체가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에 대해 연구했던 사회심리학자 레온페스팅거는 "인간은 자신의 태도와 의견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려는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 스스로도 기사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여론조사를 적극 활용한다. 강미은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1997년 저서 <여론조사 뒤집기>(개마고원 펴냄)에서 여론조사 보도는 '신뢰도'라는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인기 있는 보도기법의 하나라고 말했다.
"'다수의 의견'이라는 점과 과학적으로 보이는 통계 숫자 덕분에 여론조사 결과를 실은 기사는 신뢰도 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불완전 인용
여론조사 보도의 첫 번째 문제는 '불완전 인용'이다. 필수적으로 써야 할 항목을 빠트린 불완전한 기사가 많다. 예컨대, 단순하게 결과가 '몇 퍼센트(%)'라는 것에만 집중해서 표본오차나 조사방식, 응답률 등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다. 하지만 이런 변수에 따라 조사 결과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 불완전하게 인용된 여론조사 결과는 신뢰성이 무너진다.
불완전 인용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짧은 지면과 시간 안에 수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이 크게 작용한다. 대부분의 여론조사 결과 보도를 보면, 한두 가지 이상의 정보가 누락되어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독립 기사로 쓸 때는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빠짐없이 포함해야 한다. 어떤 여론조사 보도가 신뢰할 만한지 알고 싶다면, 보도에서 여론조사 실시 기관·표본 집단·응답률·조사 시기·조사방법·표본오차율 등이 빠지지 않았는지 살피면 된다.
입맛 따라 달라지는 해석
△ 교사 62% "史觀 다양하지만… 역사 교육은 하나로 해야"(<조선일보> 10월 13일 자)
△ 고대·경희대 역사전공 교수들도 "국정 집필 거부"(<한겨레> 10월 15일 자)
위 기사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에서 회원 4599명을 대상으로 자체 실시한 집단 내 설문조사의 결과다. 하지만 매체에 따라 해석이 정반대가 되기도 한다.
<조선>은 "교총에 속한 교사들의 62%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찬성한다"고 썼고, <한겨레>는 "대학의 역사전공 교수들은 집필 반대를 하고 있고, 일선의 교사들은 교총이 62%의 찬성을 근거로 국정화를 공개 지지하는 것에 허탈감을 느끼며 교총 탈퇴를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다른 논조의 신문이나 방송을 비교할 여유가 없는 시민들이 특정 매체만 지속적으로 접한다면, 편향된 사고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표제를 뽑을 때는 과장을 피해야
여론조사 결과를 제목으로 인용할 때 마치 그 결과가 여론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도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표본을 부풀리는 방식이 주로 쓰이는데, '특정 지역 학부모의 x%'를 '학부모의 x%'라고 표현하거나, '특정 계층 여성의 y%'를 '여성의 y%'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 수험생 63% "교과서 아닌 EBS로 공부"(<중앙일보> 10월 15일 자)
△ '국정 교과서' 여론 찬반 양분… 역사 교사들은 92%가 반대(<한국일보> 10월 15일 자)
<중앙>은 '종로학원'과 '하늘교육'이라는 교육기관에 의뢰한 결과를 오대로, '수험생의 63%가 역사과목을 EBS 교재로 공부한다'를 제목으로 삼았다. 이는 해당 학원에 다니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일 가능성이 높아 표본의 대표성이 떨어진다. <한국>도 '역사 교사들의 92%가 반대'한다고 했지만, '경기도라는 특정 지역의 역사교과 담당 교사'를 조사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역사 교사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 '노동개혁 찬성 80%' 국민여론이 타협 이끌었다(<중앙일보> 9월 14일 자)
△ 여론조사 가라사대, 믿쑵니까?(<미디어오늘> 10월 16일 자)
노동개혁이 큰 이슈였던 지난 9월 <중앙>은 "노동개혁에 국민의 80%가 찬성했다"고 보도했다. 반면, <미디어오늘>은 "여의도연구원 조사에선 10명 중 8명이 노동개혁에 찬성했"고 "파업이 잦은 울산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선 80%가 넘는 시민이 노동개혁을 지지했다"는 결과를 '국민여론의 80%'로 표현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여론조사, 정치적 상상력을 제한할 수도
여론조사 보도는 때로 한정된 담론에서 여론을 재생산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이런 양상은 선거를 앞둔 시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정치권은 변수를 조금씩 바꿔 여러 번 실시한 뒤, 유리한 결과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정당은 정식 후보 출마에 앞서 당에 유리한 인물을 앞세워 여론조사를 한다. 이를 통해 대중에게 노출된 후보는 '유력 후보'로 인식된다. 정치 신인이나, 지지도가 낮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소외된다.
총선은 6개월, 대선은 2년 이상이 남았지만 언론은 벌써부터 차기 대선후보를 언급하며 이들의 지지율을 조사하고 있다. 주로 언급되는 대상은 새누리당 김무성,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박원순·안철수 정도다. 그중에서도 <한국경제>와 <조선일보>는 여야 대표인 '김무성 대 문재인'을 부각해 보도하고 있다.
△ 김무성 46.1% > 문재인 40.8% 대선주자 양자대결…리얼미터 조사서 첫 역전(<한국경제> 10월 15일 자)
△ 김무성, 차기 대선주자 양자대결에서 문재인 처음 앞질러(<조선일보> 10월 15일 자)
△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박원순-14%, 김무성-13%, 문재인-11%, 안철수-9%(<굿데일리 > 10월 18일 자)
하지만, 이런 보도는 언급된 인물만을 주요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대중도 자신이 생각했던 적임자가 처음에는 여러 명이었어도 결정 단계에서는 언론이 만든 선택지 안에서 두 명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이런 현상은 주로 양자 대결이 이뤄지는 대통령 선거보다 여러 명의 후보가 경쟁하는 지역구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 선거로 갈수록 심각해진다.
시급한 현안은 내버려둔 채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을 무비판적으로 보도하는 것 또한 생각해봐야 한다.
△ 인기투표식 여론조사 '반기문 현상'도 기획?(<주간경향> 2014년 11월 1101호)
이 기사는 정치권이 기준 없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대권후보군에 포함해 여론과 언론을 악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당-여론조사 업체-언론이 연결되어 있는 여의도의 생태상, 이런 여론조사 보도가 정치권의 기획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여론조사는 무당층의 무비판적 대세 추구를 낳는다고 비판했다.
여론조사 보도, 버리지 말고 '잘'하자
현재 여론조사 보도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여론조사 결과의 신뢰성을 보장하는 필수 항목을 누락하거나 언론사의 논조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실제 여론조사 결과와 다른 제목 뽑기도 문제가 된다. 그로 인해 대중은 편향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자유로운 정치적 담론을 제한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론조사 보도는 다양항 방식으로 발전해야 한다. 정당은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선출에 유력한 후보를 내고, 유권자는 선거의 흐름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는 '잘' 사용한다면, 건강한 정치 풍토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은 정치실험공동체 '정치발전소'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으로, 소위 '정치 후진국'이라 평가받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 혐오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정치와 시민의 삶을 가깝게 할 수 있는 정치기사란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은 '좋은 정치 기사'를 판별하는 팀 나름의 기준을 만들기 위해 지난 석 달 간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정치 보도가 △반정치주의를 부추기지는 않는지, △정치적 갈등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그리지는 않는지, △의회 민주주의의 역할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진 않는지, △정치권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편견을 강화하지는 않는지 등 문제의식을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은 지난 세 달 간의 세미나를 통해 얻은 문제의식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는 기회를 가져 보려 합니다. 총 10회에 걸친 '정치 기사 뒤집어 보기' 연재를 기획한 이유입니다. 정치와 시민의 삶을 가깝게 만드는 정치 기사가 많아지길 기대하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정치발전소 홈페이지 http://politicalpowerplan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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