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픈 '세월', 보듬으며 함께 살아가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픈 '세월', 보듬으며 함께 살아가기

[민들레] "이 잔인한 세상을 변화시켜주세요"

마을에서 만나는 아이들

'공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공간에 따라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세월호 참사로 250여 명의 아이를 잃은 마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인지. 큰 사회적인 사건도 다 층위가 다르게 체험된다는 것을 그 공간 안에서는 더 절실하게 느낀다.

유가족들의 인터뷰집인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지음, 김보미 그림, 창비 펴냄)을 기록할 때도 나는 피를 흘리면서 글을 썼다. 누구나 세월호 참사로 충격을 받고 마음의 고통을 받았겠으나, 그 마을 안에 있어서 더 강력하게 타격을 받았다. 감각도 변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일들도 더 크고 섬세하게 느껴지곤 했다.

우리 아파트 자동문을 나서면 자주 마을 아이들 10여 명이 도란도란 앉아서 놀고 있곤 했다. 한번은 한 아이가 손에 작은 건빵 봉지를 들고 있었다. 아이에게 장난으로 하나 달라고 했더니 선뜻 꺼내서 건네줬다. 뭘 주는데 망설임 없는 그 작은 행동이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신선했다. 또 한 아이는 음료수 캔을 들고 있었는데, 동생뻘쯤 되는 아이가 "형아, 나 한 모금만"이라고 하니까 그 아이 입에 음료수를 넣어주었다. 옆에 앉은 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나도" 그러니까 그 친구 입에도 음료수를 부어줬다. 그 모습을 본 그 옆에 아이도 또 그 옆의 옆 아이도 서로 달라고 했다. 아이는 그럴 때마다 다 음료수를 입에 흘러 넣어주었다. 음료수는 금세 바닥이 나 버렸다. 아이는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음료수를 자신의 입에 털어 넣고는 캔을 버리려고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좋아서 나는 그 캔을 대신 버려주겠다고 받아들었다.

희생된 아이들도 7~8년 전에는 이 아이들처럼 이렇게 놀았을 것이다. 뭘 주는데 망설임이 없었을 것이고, 친구들 입에 음료수를 부어줬을 것이다. 동네 김밥집을 가면 그 아이들이 보였고 북카페에 가도 그 아이들이 친구들과 모여 숙제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故 박현섭 군은 올해 단원고 명예 3학년이 됐다. 현섭이 역시 "이 아이들처럼 이렇게 놀았을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헤매면서 길을 찾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살았던 마을이기 때문에 나는 글만 쓰고 있을 수가 없었고, 무언가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뭔가가 뭔지 나도 알 수가 없어 지금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이 새로운 뭔가가 낯설고 두렵기도 한데, 지금은 몸이 먼저 나가고 있어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치유와 성장을 위한 공동체'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기억을 모으고 있는 '기억저장소'에 참여하고, 250여 명 아이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도 같이 하고, 갈등 해결을 위한 워크숍에도 가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교육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헤매다가 보면, 뭔가 실체가 잡힐 것도 같다. 계획도 없다. 2주년 지낼 때까지 그렇게 헤매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보려고 한다.

나는 상처 입은 부모님들이 부르면 달려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세월호 참사가 난 지 1년 4개월이 지나고 있다. 희생자 부모들이 원하는 건 이뤄지지 않고, 정부는 공룡처럼 거대했던 사건을 구겨서 점점 작은 도롱뇽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부모들은 지금 그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 상처와 아픔과 고통이 가벼워지기는커녕 더 진하게 육체로 눌어붙어 깊게 내려앉고 있다. 배신감까지 더해져 그게 영혼으로 깊게 침투하고 있다. 눌어붙기 전에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충분히 애도를 했더라면 이렇게 깊게는 파고들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다른 상처로 전환되고 있다. 한 어머니는 남아 있는 딸의 변화를 말하면서 고통스러워했다. 책임감이 강하고 그렇게 선했던 딸이 동생이 죽은 후 이상하게 변했다고 한다. 이유 없이 상대편에게 욕을 하고 무슨 말을 하면 버럭 화를 내면서 '나도 콱 죽어버릴까?' 하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고 했다.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세상 떠버릴까?', 그런 말을 중얼거리곤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자신도 아픈 어머니가 무너졌다.

어떤 어머니는 함께 잠을 자면 아직도 악몽을 꾼다. 딸아이를 잃어버려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결국은 못 찾고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는 꿈이다. 그녀의 손에는 묵주가 꼭 쥐어져 있었다. 부모들뿐만이 아니라, 48명의 제자를 잃은 선생님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다고 했다. 1주년이 지나자마자 학교에서 희생자들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서 지낼 수 있는 학교 안의 작은 공간을 없애버렸다고 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면 쉬곤 했던 곳이었다. 남겨진 아이들은 갈수록 더 힘든데, 쉴 수 있는 작은 공간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어떤 어머니는 세월호 이전부터 좀 아프기는 했지만, 딸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더 심해져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갔다했다. 트라우마 센터에서도 그분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그렇다고 아픔이 큰 세월호 가족들이 돌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게 정신분열로 아픈 어머니를 그대로 두기 그래서, 한 작가랑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와 만나서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피노키오 연극놀이도 하곤 했다. 그분은 아프기 전에는 길에서 생활하던 노숙인을 집으로 데려와 대접해줄 정도로 선한 분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머니가 상태가 안 좋아져서 옆에 있는 나를 공격했다. 느닷없이 닥친 상황이라 많이 놀랐다. 그 어머니랑 함께 안산 화랑유원지 정자 위에 올라가 2시간 동안 계속 바람에 흔들리는 연꽃과 연잎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걸 어머니는 정말 좋아했다. 민감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분이었다. 우리랑 만날 때는 옷도 예쁘게 차려입고 오기도 했다. 그래서 마음이 많이 좋아진 걸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단순히 그분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분을 대하는 전문지식과 그런 갑작스러운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도 익혀야겠다. 다른 부모님들이 그동안 그분이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 때 얼마나 많이 견뎌줬는지, 내가 직접 겪어보니까 이해가 됐다.

하지만 부모님들이나 나나 가장 밑바닥에 서 있는 그분과 함께 모든 걸 견뎌야 한다.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이 병들었다고, 작다고, 가진 것 없다고, 멋이 없다고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는 삶을 살아 참사가 일어났는데 우리가 또 그런 삶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손잡고 함께 견디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와중에 패트리샤 선생이 한국을 방문했다. '치유와 공동체 성장을 위한 안산 0416 공감 사랑방' 모임에서 '이웃 대화 진행자' 프로그램을 할 때 인연을 맺었던 분이 소개를 해줬다. 패트리샤는 니콰라과 내전 때 처음 그 지역에 가서 피해자들을 돌봤던 분이다. 니콰라과를 시작으로 르완다 학살 현장, 동티모르 전쟁, 아프리카 내전 등 세계 40개국에서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25년간 해온 분이다. 그분은 피해 현장에 있어 보니 피해자들을 돌보는 사람도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돌보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대리 외상, 이차적 트라우마, 공감 피로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치유와 회복도 중요하지만 그 옆에서 돌봐주고 있는 여러분들의 치유도 아주 중요하다. 피해자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치유를 할 수 있어야 피해자들을 더 잘 돌볼 수 있다."

▲ 안산에 찾아온 패트리샤의 치유와회복을 위한 워크샵. ⓒ민들레

선생은 한국에 머무는 닷새 동안 이 말을 강조하여 우리처럼 피해자들의 옆에 있는 사람들을 포용해주고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었다.

한번은 선생이 엘살바도르에서 활동할 때인데, 너무 힘든 사람을 만나 그분과 대화하고서 팔이 마비돼 4주간 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흡수해버려 몸이 마비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지키면서 피해자들을 돌보는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마지막 날, 그녀가 안산에 왔다. 안산에서 그동안 세월호 유가족들, 생존 학생들, 형제자매들을 돌보던 많은 활동가들이 그녀와 함께했다.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마음껏 나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예전에는 유가족이 힘든데 내가 뭐가 힘들다고 이렇게 엄살을 떠는가 싶어서 내가 힘들어도 그 마음을 보살펴주지 못했는데, 이제는 피해자들만큼은 아니라도 그에 못지않게 그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힘들다는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나뿐만 아니라 피해자 곁에서 많은 일을 도와주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그러자 세월호 유가족들뿐만이 아니라, 한 집 걸러 아이들이 세상을 뜨면서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을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마음이 어떠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는 안산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도 안산시민들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돌봐주지 못한 마음들이 냉소나 경멸로 변할까봐 걱정이 된다. 유가족들과 서로 상처 주고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부모들은 그런 안산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중심지역인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동명상가에서 매주 금요일 주민들과 만나고 있다. 예상 외로 주민들의 반응이 좋아 움츠렸던 부모님들의 마음이 활짝 폈다. 어떤 중학생이 시원한 비타500 두 개를 사서 드시라고 주자, 어머니들 눈에서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안산시 희망마을 추진 사업단'에서 마을주민 1000명에게 세월호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많은 주민들이 세월호 참사 이후 이웃의 소중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고 답을 했다고 한다. 주민들 마음 안에 자연스럽게 이웃과 공동체의 소중함이 자리 잡고 있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을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세월호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여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뿌리 내리기를 바란다. 초기에 아이 잃은 고통이 너무 커서 다 잊으려고 마을을 떠난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 중에는 어느 날 자신이 정신을 차려보니까 예전에 아이와 살던 집 계단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분도 있다.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들의 유일한 흔적이 남아 있는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마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 새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며칠 전에 안산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활동가들이 모여 '마을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피해지역 중 하나인 와동에서 공동체를 고민하고 있는 '와리마루'와 유가족과 형제자매들을 돌보고 있는 '우리함께' 그리고 유가족들의 기록을 모으고 있는 '기억저장소', '안산온마음센터', '안산시 희망마을 희망사업추진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유가족 대표로 예은이 엄마와 영만이 엄마도 참여했다.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절로 아이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을 잘 돌봐주세요. 저희들이 왜 죽었는지 밝혀주세요. 저희들을 죽게 한 이 잔인한 세상을 변화시켜주세요." 예은이 엄마가 말했다. "안산의 공동체는 다른 지역 공동체하고는 달라야 한다. 아이들이 죽어가면서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들이 담긴 수준 높은 공동체여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걸 배우러 안산으로 올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이 안산으로부터 작은 변화를 일으켜 그 작은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것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아픈 마음을 달래며 만든 수공예품. ⓒ민들레

천천히, 아픔을 껴안으면서


세상은 아이들을 희생시킨 시스템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 심지어 우리 마을에서조차도. 수많은 커피전문점과 대형슈퍼 등 자본 위주로 일상이 돌아간다. 아이들이 바라는 세상과 현실로 돌아가는 세상의 간격은 멀기만 하다. 그 간격을 좁히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민과 노력이 들어갈 것인가. 또 어떤 잔인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그래도 나는 멈춰 서서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는 가장 기본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요즘 같은 뜨거운 햇볕에도 미수습자(실종자) 가족들은 청와대가 있는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으로 가서 '아이들을 찾아달라'고 피켓시위를 한다. 다른 유가족 어머니들은 그런 가족들을 도와주기 위해 역할을 나누어 매번 함께 간다. 실종자 가족을 승용차에 태우고 서울까지 오가며 유가족들 안에서도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실종자들 가족과 어떻게든 함께하려고 노력한다. 간단하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부모님들은 제주도 강정마을에도 갔다. 가서 고생하는 강정마을 사람들과 며칠을 함께 걸었다. 부부 중에 어머니는 실종자 가족과, 아버지는 제주도 강정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분들도 있었다.

마을 안에서 부모들은 인문학 공부도 하고 있다. 젊은 인문학자들과 결합하여 세상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울면서 쫓아다녔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차분히 길게 갈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부모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자신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엄청 눈물을 흘렸다. 왜 진즉 자신들은 그런 문제를 알지 못하고 살았던가, 후회하기도 했다. 또 인문학을 통해 자신들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기도 하면서 자신의 세계에 갇혔던 시선을 확장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도 하고 있다.

어머니들끼리 모여 동네 안에 작은 공방도 만들었다. 여러 가지 색실로 예쁘게 수도 놓고 아이들을 위한 그림도 그린다. 아버지들은 목공을 하고, 축구회를 조직해 공도 찬다. 일상을 살아가야 하니까, 죽을 수만은 없으니까. 그렇게 함께 의지하면서 힘을 얻어 또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걷는다. 주위 사람들을 감싸 안으며 더 넓은 길을 향해 가고 있다. 천천히, 다른 수많은 아픔을 껴안으면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민들레>)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