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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접수한 일제, 북촌과 서촌을 짓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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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접수한 일제, 북촌과 서촌을 짓밟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충무로, 남대문 찍고 북촌으로 질주

디벨로퍼.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 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시행사, 혹은 개발자를 말합니다. 이름 그대로 부동산을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해외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디벨로퍼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디벨로퍼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디벨로퍼들, 정확히 일제 시대 때 활동했던 디벨로퍼들에 대한 평가도 비슷합니다. 집 장사꾼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도 제기됩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인의 경성'을 지켜낸 사람들이라는 평가입니다.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가 현재의 북촌, 인사동을 포함해 서울 전역에 근대 한옥 단지를 개발한 정세권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근대의 디벨로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1)
"경성은 일본의 '게이죠'다"
▲ '일본인의 북진과 부정책도 북촌주력'. ⓒ(<조선일보> 1928.11.22.)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정착하기 시작한 시점은 19세기 후반으로, 그들의 거주 지역은 일본공사관이 위치하였던 진고개 일대(현재 예장동에서 충무로 1가에 이르는 지역)였다. 당시 반일 감정이 높았던 사회 분위기로 말미암아 신변 안전에 유리한 공사관 주변에 주거지를 정했다.1)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은 지속해서 팽창하는데, 1895년 청일 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인들이 당시 서울 남부 지역에 자리 잡았던 중국인 상권을 몰아내면서, 일본인들의 공간적 범역은 진고개를 넘어 남대문로 일대로 확장된다. 그리고 1896년 일본영사관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로 이전하면서, 경성 남부 지역에서의 일본인 세력은 더욱 공고해진다.2)

러일 전쟁의 승리와 한일 강제 병합으로 마침내 조선에서 지도적 위치를 확보한 일제는 경성 남부 지역을 그들의 전용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1910년대 중반(1917년)에 이르러서는 본정(충무로), 대화정(필동) 뿐 아니라 남대문로 1, 2, 3, 4가까지 대부분의 필지가 일본인 소유로 넘어가게 된다.
▲ 일본인 거류지(추정(1885~1894, 1904~1909). ⓒ김종근, 「서울 중심부의 일본인 시가지 확산」, 2003 재정리
위 그림에서 보듯이, 식민지 지배층인 일본인과 피지배층인 조선인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명확히 분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계천 이남 남촌 지역은 일본인 그리고 청계천 이북 북촌 지역은 조선인에 의해 점유된, 분절된 경성이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이 지속함에 따라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수도 지속해서 증가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경성 지역에 일본인 주거지 부족이라는 도시 문제를 일으켰다. 만약 새로이 경성에 유입된 일본인들이 (기존 일본인들이 장악한) 경성 남부 지역에만 몰려 산다면, 한정된 공간에 새로운 주택 수요가 더해져서 주거 환경이 과거보다 더 열악해질 것이고 주택 가격과 토지 가격은 큰 폭으로 상승할 것이다. 종국에는 해당 지역이 부유한 일본인들 위주의 지역이 되고, 자금 사정이 풍족하지 않은 일본인 계층은 외곽 지역으로 빠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계 인구 급증에 대한 적절한 대안은 기존의 경성 남부 지역을 넘어 새로운 지역으로 일본인 거주 지역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의 일환으로 진행된 정책은 경성 북부 지역-청계천 이북 북촌의 조선인 거주지역으로의 일본인 주거지 확장이었다.

하지만 북촌 지역에 일본인 주거지를 확보하는 것은 과거와 다른 접근 방식이 요구되었다. 초기 남산 일대에 일본인 거주 지역을 개발한 것은 미개발 지역을 개발하는 방식이었고, 남대문 주변의 중국인들을 몰아낸 것은 청일 전쟁 승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청계천 이북 지역은 조선인들이 조선 왕조 600년에 걸쳐서 사는 전통적인 도시 지역이었다. 따라서 제아무리 일제가 새로운 통치 세력으로 군림한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조선인을 대거 몰아내고 일본인을 위한 신규 단지 건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본인 급증을 대비를 해야 했다. 일제는 이를 위해 도시 계획 정책 필요성을 공론화함과 동시에 일제의 통치 기구를 청계천 이북에 위치시킴으로써 세력권을 주변 지역으로 확장하는–어찌 보면 간접적 개발 전략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매력적인 토지는 바로 과거 조선이라는 국가가 소유했던 그리고 현재는 일제가 소유한 국공유지였다.

1920년대 들어, 일제는 1921년 총독부와 경성부, 재조선 일본계 상공인 그룹과 함께 경성도시계획연구회를 설립하였고, 1922년 조선건축회는 <조선과 건축>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여 서구 도시 계획 이론을 식민지 조선에 전파한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경성부에 임시도시계획조사계를 설립하여 도시계획조사사업을 시작하였고, 신문 지상에는 도시 계획 관련 쟁점들이 공론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일본인 주거 지역과 시가 지역의 도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으로 조선인의 환경 문제 해결에 주안을 두지 않았다.3)

공론화 과정과 더불어 일제는 통치 기구의 청계천 이북 이전을 추진하는데, 1910년대 중반 총독부 경복궁 이전 계획을 설립하여 1926년 경복궁에 총독부를 건설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통치 기구의 토지(예를 들어, 총독부 개발 지역)를 기존 조선인 거주지에 건설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조선인 토지를 매입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고 그 매수 과정마저도 심각한 반대에 부닥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경복궁, 경희궁 등 궁궐은 물론 왕실이나 국가 관련 시설이 있었던 대규모 필지가 일제의 관심 지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없어지고 일본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기에 기존의 국공유지는 일제가 실질적으로 마음대로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궁궐과 국가 시설 부지는 일반 조선인의 거주지와 물리적 경계가 분명하고, 도시의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환경과 분리된 데다, 비교적 녹지가 확보된다는 점에서 일본인 관사의 입지로 안성맞춤이었다.4)

통치 지구의 이주와 더불어 통치 기구에 부역하는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인접 지역에 확보하는 작업이 동반되었다.

"총독부가 남촌으로부터 북촌으로 옮아온 지가 겨우 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오늘에 벌써 총독에 따라다니는 관공리(官公吏 : 관광서 직원)는 물론 상인들까지 날마다 남촌에서 북촌으로 올라오고 있어 날이 갈수록 그 수가 격증하여 이제는 조선 사람이 대부분이 살던 북촌에도 일본인의 그림자가 점점 농후하여 간다… 과거에 시가미(市街美 : 시가지를 가꾸는 일)나 도로 확장 등에 별 큰 힘을 들이지 아니하던 북촌 일대에 경성부(京城府)는 갑자기 재정에서 무리하면서 거액의 돈을 넣어 (일을 진행하고 있다.)"5)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경성부청이 덕수궁 옆 신청사로 이전함과 동시에 적선동, 통의동, 청운동과 효자동 지역에는 총독부와 경성부의 관사, 그리고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직원숙소가 세워진다. 이어 1926~1928년에 걸쳐 연건동, 동숭동에 경성제대가 자리를 잡으면서, 동숭동, 이화동, 명륜동, 혜화동 지역에 경성제대 교수와 직원을 위한 관사와 사택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는 정동에 재판소, 1934년 광화문에 총독부 수신국 분관 등이 잇따라 자리를 잡게 되었다.
▲ 경성 지역 관사 건설. ⓒ김명숙 「일제시기 경성부 총독부 관사에 관한 연구」, 2003

그림의 1~7(경복궁 주변)과 57~60 (경성제대 주변) 지역은 청계천 이북 지역에 대단지로 건설된 일본인들을 위한 관사들로 1920년 이후에 건설되었다. 현재도 경복궁 주변 서촌 지역에는 과거 관서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적산가옥들이 존재한다. 위 그림 7번 지역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을 위한 관사가 지어진 곳인데, 그 주변에 아래와 같은 적산가옥 촌이 현존한다.6)

▲ 관사 추정 적산가옥. ⓒ김경민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은 조선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총독부가 경복궁 내로 이전되어 기존 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일본 사람들의 세력이 일조에 북부로 이전하게 되면, 그때의 조선 사람의 생활 근거지는 다시 동쪽으로 또는 서쪽으로 쫓겨나거나 (구축(驅逐)되어), 혹은 청량리로 혹은 마포 등지로 또 혹은 멀리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그 생을 구하러 이사하게 될 것은 물론이다. 아! 이 어찌 도태구축의 암담한 사실이 아니리오."7)

1) 홍성찬 「한말, 일제초 재경 일본인의 은행 설립과 경영」, 『한국사연구』제97호, 1997
2) 손정목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 일지사, 1996
3) 박세훈 「1920년대 경성도시계획의 성격: 「경성도시계획연구회」와 '도시계획운동'」, 『서울학연구』 제15호, 2000
4) 김명숙 「일제시기 경성부 소재 총독부 관사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4
5)「일본인의 북진과 府정책도 북촌주력: 돌아보지 않은 곳에 새로이 거액을 경주」 『조선일보』, 1928.11.22 (제목에서 말하는 ‘돌아보지 않은 곳’이라 함은 북촌지역을 말한다.)
6) 김명숙•전봉희 「일제강점기 경성부에 지어진 관사의 단지적 성격」,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 계획계/구조계』 제23권 제2호, 2003
7)「멸망하야가는 경성 <중, 전3회> 조선이 다 이러타」 『동아일보』, 19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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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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