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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쪽부터 섬뜩했다!"

[몸의 일기 ④] 남는 건 책밖에 없더라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기. 타인의 은밀한 기록이 눈앞에 펼쳐질 때의 기분은 상상만 해도 짜릿합니다. 그래서 기회만 온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임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이죠. 그런데 여기 자신의 일기를 통째로 공개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 일기에는 열두 살 때부터 여든일곱 살까지 그 남자의 내밀한 기록으로 빼곡합니다.

그 남자의 첫 몽정(13세), 첫 섹스(23세), 첫사랑(26세), 첫아기(28세). 그의 첫 외과 수술, 즉 코 막힘과 코골이의 원인이 되는 코 안의 용종 제거 수술(27세), 오른팔 안쪽에 생긴 첫 검버섯(44세), 노안에 난생 처음 쓰게 된 안경(45세), 처음으로 본 손자(53세),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처음으로 망각한 일(62세).

이뿐만이 아닙니다. 49세 때 갑자기 찾아온 이명과 친구 되기, 60세가 넘어서면서 평생을 갈 것 같았던 아내와의 욕망이 사그라진 현상. 알츠하이머에 대한 공포, 손자의 동성애를 접한 70대 할아버지의 당혹스러움, 오랜 친구들과의 이별 그리고 갑작스런 손자의 때 이른 죽음. 그리고 시간 앞에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육체.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기.

그렇습니다. 이 남자의 일기는 보통의 일기와 다릅니다. 우리가 그간 엿보았던 대부분의 일기는 내면의 정신 상태를 기록한 것이죠. 그런데 이 일기는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몸'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그 몸의 일기를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되죠. 그 남자의 몸에는 사랑, 갈등, 관계, 과학, 역사 등 세상의 온갖 것들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그 남자의 몸의 일기를 엿보면서 한 남자의 자아를 찾아가는 긴 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온갖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덤이고요. 이 특별한 일기를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가 <몸의 일기>(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로 펴냈습니다. 페나크가 누구냐고요?

페나크는 '말로센 시리즈',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 <소설처럼>, <학교의 슬픔> 같은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팬을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페나크가 일기 형식을 빌려서 '소설인 든 소설 아닌 소설처럼' 써내려간 작품이 바로 <몸의 일기>입니다.

<프레시안>과 문학과지성사는 이 <몸의 일기>를 먼저 읽은 여덟 명의 독후감을 매주 화요일, 금요일 두 차례씩 연재합니다. 20대의 젊은 작가, 40대의 의사, 60대 70대의 노(老)작가까지 다채로운 빛깔의 독후감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네 번째 독후감의 주인공은 40대 후반의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입니다.

▲ <몸의 일기>(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한 사람에 대해 아는 방법으로 일기를 보는 것만 한 게 없다. 경력은 피상적이고 자서전은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일기야말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담았을 테니까. 그렇기에 한평생 쓴 일기를 보는 것은 그 사람을 아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다니엘 페나크가 쓴 <몸의 일기>는 한 남자('그')가 80여 년간 살면서 쓴 일기 형식의 소설인데, 이 일기를 통해 주인공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을 적어본다.

첫째, '그'는 대체로 내성적이다. 이건 무서운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데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다. 오죽하면 12살 때 쓴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의 첫 번째 항목이 '엄마'일까?(27쪽) 내가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도 날 미워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일 텐데, 그나마 내가 비뚤어지지 않은 것은 한결같이 날 지지해주신 어머니의 힘이 컸다.

'그'에겐 아버지가 그 역할을 했다. 전쟁 후유증으로 산송장이나 다름없었고 '그'가 1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쳤고, 그때 얻은 지식은 '그'가 비교적 무난하게 일생을 살 수 있는 원천이 됐다.

"내가 어떤 종류의 학생이었을지는 상상에 맡기마. 내 지식의 깊이나, 내가 책처럼 쓰고 말한다는 사실보다도 선생님들이 특히 감탄한 건 바로 (…) 완벽한 글쓰기였다." (62쪽)

둘째, 지적이다. '그'에게 가장 감탄한 건 임신이 의심되는 자신의 딸에게 <닥터 지바고>를 꺼내 여주인공이 임신한 대목을 읽어주었을 때다. 딸은 아빠가 점쟁이 같다며 놀라고, 둘은 힘껏 껴안는다(311쪽, 57세). 이런 아버지, 정말 멋있지 않은가? 나이가 들어도 변치 않는 실험정신도 '그'가 지적이라는 증거. '그'는 새롭게 알게 된 게 있으면 실험해보곤 했는데, 예컨대 토론 모임이 지겨워 하품이 전염되는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하품을 한다.

"그러자 하품이 퍼져 나갔다. 참가자의 3분의 2에 이르기까지." (221쪽, 37세)

60대가 돼도 이런 실험 정신은 여전하다. 영화에 나오는 이가 면도솔에 커피를 묻혀 얼굴에 바르는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 해보는데, "피부의 모공이 수축되는 느낌. 게다가 20분도 넘게 좋은 향이 났다"(322쪽, 61세)고 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흔히 '젊게 산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모두 얼굴에 커피를 바르자.

셋째, 이건 가장 부러운 점으로, '그'는 잘생겼다. 그걸 알게 된 계기는 다음 구절이었다. 파티에 참석했는데 이상형의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생각한다.

"그 여자(모나)는 바로 내 여자였다!"(174쪽, 26세)

나였다면 그저 생각만 하고 말 텐데 '그'는 달랐다.

"그로부터 석 달간 모나와 나는 침대를 떠나지 않고 있다." (175쪽)

찍은 여자와 잘되는 그가 부럽다. 19세 때는 자신이 "눈부시게 아름다운"이라고 표현한 친구 여동생이 그를 유혹하기 위해 같이 춤을 추자고 권하고, 심지어 그날 밤 그가 자는 방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그래서 난 '그'가 매우 잘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추측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인 티조의 다음 얘기로 증명됐다.

"게다가 얼굴까지 잘생겼지. 꼭 형 같은 스타일이었어."(251쪽)

나도 눈만 좀 더 컸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재미있게 책을 읽던 중 277쪽부터 책 내용이 섬뜩했다. 지금 내 나이까지는 서로의 삶을 비교해보며 읽는 재미가 있었지만 그 이후는 내가 걷지 않은 미지의 세계인 데다, 대부분이 내가 앞으로 겪어야 할 두려운 일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오늘 아침 신용카드의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328쪽, 62세) "전립선이 비대해지면서 (…) 오줌이 제대로 흘러 나가지 못하는 바람에……"(397쪽, 73세)

하지만 제일 두려운 건 다음이었다.

"탐정소설을 읽느라 세 시간씩이나 긴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366쪽, 67세)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에서 '지금 같은 추세로 책을 읽으면 80세까지 5292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습니다'라는 통계 수치를 받은 적이 있는데, 67세만 돼도 책 읽는 게 어렵다니! 눈이 밝고 체력이 버텨줄 때 한 권이라도 더 읽자. 남는 건 책 밖에 없더라.

(40대 후반의 남성 서민 교수는 단국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기생충학을 가르치며,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대 재학 시절부터 기생충에 관한 방송 대본을 쓰는 등 기생충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으며, 지금까지 온·오프라인의 여러 매체에 칼럼을 써왔습니다. 지은 책으로 <집 나간 책>(인물과사상사 펴냄) <서민의 기생충 열전>(을유문화사 펴냄) 등이 있습니다.)

다니엘 페나크(Daniel Pennac)는…

▲ 다니엘 페나크. ⓒCatherine Hélie/Editions Gallimard
본명은 다니엘 페나키오니. 1944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에는 열등생이었으나, 그 시기에 독서에 남다른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 니스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26여 년간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3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말로센 시리즈'와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에서 보여준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넘치는 표현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밖에 강압적인 독서 교육을 비판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깨우치는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 펴냄), 열등생이었던 어린 시절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학교의 슬픔>(문학동네 펴냄) 등의 에세이와 소설, 시나리오를 발표했으며, 한 남자가 10대부터 80대까지 몸에 관해 쓴 일기 형식의 소설 <몸의 일기>는 2012년에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1995년부터 교직에서 물러나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정기적으로 교실을 찾아다니며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미스터리 비평상(1988년), 리브르앵테르 상(1990년), 르노도 상(2007년)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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