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가 손수 민서의 바지를 벗겼다. 속옷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무섭고 당황스러웠지만, 한의사는 '진료'라고 했다. 엄마 없이 혼자 오는 날에만 이런 진료를 받았다. 진료를 가장한 명백한 성희롱. 민서가 중학교 1학년 때 겪은 일이다.
지금 민서는 중학교 3학년이다. 시간이 흘렀어도 끔찍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티 없이 자라날 십 대 소녀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짐이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민서는 굳이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다신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내린 어려운 결정이었다. 민서는 12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NPO지원센터에서 열린 '환자 샤우팅' 행사에 참석해, 많은 청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졌지만, 울먹이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성추행 이후 우울증에 자해까지…"사는 게 싫었어요"
민서가 한의원을 찾은 건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이었다. 총 16~17번 진료를 받았는데, 그 중 열 번 정도는 부모님이나 오빠 없이 혼자 갔다. 한의사는 종종 '누구랑 왔느냐'고 물었다. 부모님과 왔다고 하면 일반적인 진료를 했다. 혼자 왔다고 하면 직접 옷을 벗겨준 뒤 "수기 치료"(손으로 몸을 만져 신체의 이상을 해소하거나 병이 낫도록 하는 법)라며 민서의 몸을 만졌다.
"기분이 나쁘고 아니다 싶었는데도 말을 못했어요. 그냥 이것도 치료야, 하고 자기 최면을 했어요."
'이상한' 진료가 계속되자 병원 가는 게 꺼려졌다. 만약에 다음에 엄마랑 같이 갈 때 엄마한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 봐 그저 가기 싫다고만 했다. 몇 번이고 기어코 버티자, 엄마가 화를 냈다. "그렇게 안 가면 네가 장애인이 돼도 엄마는 책임 못 져." 결국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도 민서도 모두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공황장애가 왔고, 민서는 불면증과 우울증이 왔다. 심리 치료를 받느라 자주 학교를 빠지니 자연스레 친구들에게서 소외됐다. 꾀병 부린단 얘기도 심심찮게 들렸다. 선생님들은 민서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여전히 약을 먹느냐'고 물었다. 친구들의 시선이 몰렸다. 학교 생활은 말 그대로 지옥 같았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자해를 했다. 처음엔 팔을 손톱으로 긁다가, 더 심하게 상처를 냈다.
힘들었지만 참았다. 힘든 만큼 그 한의사 아저씨가 벌 받을 거란 생각으로 살았다. 그런데 1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다. 분명 판사와 법이 지켜줄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을 믿었는데,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고생했던 게 무너진 것만 같고 제 존재에 대해서도 혼란이 왔어요. '나는 뭐지'. '왜 하필 나였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아무리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환청이 들렸어요. '네가 멀쩡한 사람 인생 망쳤다'고요. 사람들이 쳐다보면 다 내가 '그런 일'이 있어서 쳐다보는 것 같고…. 그냥 사는 게 싫었어요."
"진료 빙자한 성추행, 관련 법 만들어 방지해야"
민서가 쏟아내는 이야기에 참가자들은 분노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피해자 상담을 위해 참석한 전문가들은 조언에 앞서 어른으로서, 의료인으로서, 혹은 법조인으로서 미안함을 느낀다며 민서에게 대신 사과했다.
권용진 국립중앙의료원 기획조정실장은 "실제 이론에 근거한 의료 행위인지 알 수 없지만, 설령 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있더라도, 상처받을 가능성 있는 환자에게, 더욱이 부모의 동의 없이 성추행이 될 수 있는 행위를 한 것은 그 자체로 비윤리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법적으로도 다투겠지만, 대한한의사협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해서 한의사들 스스로 이런 행위가 정당한지 판단해 (입장을) 공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인재 변호사는 "(해당 한의사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났을 것"이라며 "그러나 의료인의 지위를 이용해 수기 치료라면서 추행을 하는 것은 일반인이 하는 추행보다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자단체연합회는 민서의 용기 있는 고백에 힘입어, 가칭 '진료빙자성추행방지법' 제정을 준비 중이다. 의료인이 성추행 우려가 있는 신체 부위를 진료할 때에는 환자에게 진료할 부위와 진료 이유를 알려야 한다는 게 단체의 주장이다. 아울러, 환자가 원치 않으면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고지하는 걸 의무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이런 법이 있다면 환자의 성추행 오해도 방지하고 의료인의 정당한 진료를 보장할 수 있어 환자와 의료인이 서로 신뢰할 수 있을 것"이라며 법안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왜 우리 사회가 민서를 이 앞에서 이야기하게 했나. 안타깝다. '종현이법'을 만들 때처럼 여러분이 도와주시기를 부탁한다"고 했다.
민서는 "법을 만든다고 해도 피해가 줄어들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며 "그래도 많은 사람이 알아줬으면 좋겠고, 이런 일을 겪어도 창피해하지 말고 당당하게 얘기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은 환자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하고, 해결책을 공동으로 모색하자는 취지로 한국환자단체연합회가 매달 개최하는 '환자 샤우팅' 행사에 나온 사연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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