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겉과 속 모두 바뀌어야
오늘날 정치 체제의 핵심은 정당이다.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살펴보면 개혁의 대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당 존립의 외적 결정 요소인 정치 제도다. 국민의 선택 중 절반을 사표로 만들어 버리는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의 선거 제도, 지나치게 대통령에게 편중된 권력 구조, 국회에 대한 정부 우위의 권력 배분, 점차 공공성을 잃어가는 정부 운영, 그리고 서로 헐뜯지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협력하는 '적대적 공생'을 보여주는 보수 양당제 등이 이런 외적 개혁의 대상이다. 특히 정치권과 국민 사이에 다양한 소통과 참여의 통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며, 그 중간 매개체로서 정당의 역할과 기능을 최대화해야 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정당 자체도 개혁의 대상으로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 정치의 장을 바꾸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조직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정당이기 때문이다. 정치 제도 개혁은 정당이 실제로 국회에서 법안을 개정하거나 새롭게 제정해야 가능하다. 따라서 정당 자체가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제도 개혁 자체가 불가능하다.
정치 개혁의 세 가지 경로
그렇다면, 정치 개혁을 어떤 과정을 통해 달성할 수 있을까? 경로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지금의 정당들이 스스로 개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행정부, 언론계, 기업계, 학계 등과 더불어 강력한 보수적 지배 블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양대 정당 중의 하나가 개혁을 위한 내부 균열을 만들어 내리라고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다고 진보 정당들이 국민의 지지가 부진한 상황에서 이런 균열을 만들어내는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재 논의가 뜨거운 독일식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라는 선거 제도의 개혁이 헛바퀴를 도는 것이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시민운동이 현실 정치의 행위자들로 하여금 정치 개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강력한 시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기존의 정당들을 가치와 정책 중심의 정당으로 탈바꿈시키면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시민운동이 끌어낼 수 있는 인적 자원과 재정적 자원은 한계가 있어 정치 개혁 시민운동 자체가 대중화되기 어렵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민운동의 규모가 성공적일지라도 기존 정당들이 개혁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100만 촛불'이 '명박산성'을 허물지 못한 예가 대표적이다.
셋째, 시민운동이 정치 운동을 추동시켜 개혁적 정치 세력을 현실 정치의 장으로 들여놓는 것이다. 시민운동 세력이 스스로 정치 세력으로 전화(轉化)하거나, 자신들을 대리할 정치 세력을 만들어 정치 개혁의 투사가 되게 하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조건과 상황을 놓고 보면, 이 방법이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물론 새로운 정치 세력이 정당이 되고, 이 정당이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럼에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옳다.
새로운 대한민국, 복지 국가 정당으로 시작하자
정치 개혁의 경로 중에서 새로운 정당을 선택하면, 기존의 낡은 정당들과 달리 가치와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이어야 한다는 주문을 가장 자주 접하게 된다. 단순히 가치와 정책을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집권해서 세상을 바꿀 역량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사실, 지금까지 여러 세력들이-예를 들어,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노동당, 개혁당, 정의당, 녹색당, 청년당 등-새로운 가치와 정책을 주창하며 현실 정치의 장에 들어가려고 시도했고, 일부는 들어가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스러울 정도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거나, 비판하던 기성 정치권에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치와 정책에 기반을 둔 정당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대안이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정치 개혁을 추동할 새로운 정당은 당원들을 확보하고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 국민 다수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공감할 수 있는 매력적인 내용들을 담아야 한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넓은 의미의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정당, 즉 복지 국가 정당으로 귀착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국민 다수의 이익에 근거한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복지 국가 정당을 성공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국민으로부터 의미 있는 참여와 지지를 얻고, 현실 정치의 장에서 개혁의 투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복지 국가 정당은 국민 다수에 초점을 맞추어 가치와 정책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국정을 운영하는 전체적인 틀, 즉 복지 국가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제시해야 하며, 그에 대해 국민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 다수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원리와 가치를 가장 근원적인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적극적 자유, 기회와 조건의 평등, 공공성, 협력과 협동, 연대, 정의, 인간 존엄 등의 가치가 복지 국가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이런 원리와 가치에 기반을 두고 미래 비전을 만들고 정책 패키지를 내놓아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의 핵심은 바로 '복지 국가 정당이 추구하는 목적은 국민 다수의 이익에 있다'는 점이다. 이때의 이익은 단순히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것 등을 모두 포함한다. 즉, 국민의 삶에 있어서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이로운 것'을 담는다. 국민 다수가 일생을 살면서 마주치는 '이로운 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원리, 가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예를 들어, 가치 자체가 '국민 다수에게 이로운 것이기에 소중하고 실현해야 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국민 다수가 공유하는 이익을 달성하고자 하기 때문에, 복지 국가 정당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논리적인 연결 고리를 가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새로운 복지 국가 정당이 기존의 여야 정당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지점이며, 이 때문에 국민 다수는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할 새로운 복지 국가 정당을 지지할 것이다.
조직 구성과 운영은 철저히 민주주의적으로
복지 국가 정당은 철저하게 민주적인 기준에 의거하여 구성되고 운영되어야 하며, 당원과 국민 다수에 친화적인 정당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기준으로 대한민국을 운영할지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당내 민주주의를 최대화할 수 있는 정당이어야 한다. 당원이 공천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주체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참여와 소통의 통로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마련해야 한다. 정당 내의 모든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며, 당원과 국민이 필요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참여와 소통의 통로는 단순히 '밑에서 위'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밑으로'도 흐른다. 후자를 위해서는 특히 정당 내의 연구소, 보좌진, 지방 의원들의 역할이 막중하다.
조직과 운영의 민주적 시스템은 지금 한창 제기되는 '민생 우선주의'나 '먹고사는 문제의 최우선화' 등과 직결된다. 이런 민주적 조직과 운영 시스템을 갖추면, 당원과 국민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먹고사는 문제를 참여와 소통의 장에 올리게 된다. 정당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의도가 있고, 실제로 그런 제도적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상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제기하면, 여기에 다른 당원들도 대응하면서 서서히 공동의 의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의제는 연구소와 보좌진들의 협력을 통해 하나의 정책 대안으로 완성된다. 결국 민생과 관련된 정책 대안들이 지속적으로 쏟아져 나오며, 이 대안들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100점짜리 한국형 복지 국가를 만들 수 있다.
복지 국가 정당은 정체성 유지가 생명이다
복지 국가 정당은 무엇보다도 가치와 정책들로 구성되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수적이다. 국민이 정당과 정치에 대해 갖는 불신이 큰 상황에서 새로운 정당은 이를 극복할 방안을 애초에 제도화시켜 출범해야 한다.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을 마련하고, 당원과 국민이 참여하고 소통할 구조를 형성하더라도, 이를 제도적으로 강제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소수의 모리배에 의해 정당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당원들이 가치와 정책, 민주적인 절차와 소통 구조를 정체성으로 삼고, 이를 기준으로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결정과 행태들은 과감하게 배척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정체성을 지키지 않으면 출당 조치를 수용한다는 서약서 제도, 정체성 위원회의 설치, 의원의 결정과 활동에 대한 정체성 평가, 당원 소환제도 등이 가능하다. 이런 조치들은 지금의 정당이 보여주는 '무책임 정치'를 근저에서 불가능하게 하고, 정당에 대한 신뢰를 대폭적으로 강화할 것이며, 나아가 국민의 신뢰가 새로운 복지 국가 정당이 정치 개혁을 주도해갈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복지 국가 정당은 다수-소수 프레임이 필요하다
여기에 복지 국가 정당을 통한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 정당과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들을 보태야 한다. 실제 정치 세력화의 과정은 기득권이 있는 정치 세력들과의 경쟁을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기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하다. 복지 국가 정당에 필요한 전략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프레임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새롭게 구성하고 제시하여 일반적으로 통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프레임은 '다수 대 소수'의 프레임이다. 일반적으로 지배 블록을 만드는 소수의 엘리트층이나 기득권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다수의 힘'이다. 쪽수가 많은 진영이 이긴다는 게임의 룰이 들어서면, 소수의 엘리트나 기득권층은 발을 붙일 공간이 없어진다. '국민 다수에게 이로운 것'과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은 다수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의 결과물들이 최종적으로는 국민 다수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소수의 지배 그룹들은 자신들의 권한과 권력 자원들을 그만큼 잃는다.
그래서 소수의 지배 그룹들은 '우민 정치', '포퓰리즘' 등의 용어를 만들어냈다. 우리나라의 지배 블록은 사회복지 확충 요구를 '포퓰리즘'으로 몰아세운다. 국민 다수가 복지 확충을 원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며 틀린 것을 주창하는 정치 세력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물론 다수의 선택이 잘못될 수 있으며, 다수가 생각하는 바가 다수의 이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중장기적으로는 해결된다. 즉, 정책 시행의 결과는 이익이나 불이익으로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국민 다수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이런 결과들을 고려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고쳐나가게 된다.
'이대로는 더 이상 안 된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아마 대다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답답한 상황을 돌파할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이젠 용기가 필요하다.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복지 국가 정당은 지금의 위중한 문제들을 극복하기에 적합한 원리와 가치에 기반을 두고, 구체적인 정책 패키지를 갖추며, 내부에 민주적 의사 결정 시스템이 장착된 정당이다. 이런 새롭고 매력적인 내용들이 다수 국민의 참여와 지지를 받아서 현실 정치판에 구멍을 내고, 기존의 낡은 벽을 깨야 한다. 이런 작업의 밀도가 짙어질수록 불행한 국민의 '행복할 권리'는 점차 회복되고 강화될 것이다. 그날이 최대한 빨리 오도록 해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