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일주일 남짓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농촌 지역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화보에서나 보던 풍경들을 마주하니 입이 절로 벌어졌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가꾸기 위해 기울인 그들의 노력이었다. 농업을 식량 생산뿐 아니라 자연경관과 문화를 지키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농촌경관을 아름답게 가꾸었고, 그것이 쇠라나 모네의 그림에 등장할 것 같은 집과 마을의 풍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농민의 연평균 소득 절반 이상은 보조금, 돌려짓기 등 의무도 많아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 단 10년 만에 경제를 복구하고, 1954년 의회에서 농업에 대한 정책(그린플랜)과 4가지 기본목표를 정했다고 한다.
첫째, 농민도 일반 국민과 동등한 삶의 질을 공유하며 발전에 참여해야 한다.
둘째, 농민들은 일반 국민에게 건강한 식품을 적정한 값에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셋째, 농업을 통해서 국제 식량문제 해결 및 국제 농업 교역에 기여한다.
넷째, 농업을 통해 자연 및 문화 경관을 보존하고 다양한 동식물상을 보존한다.
이런 원칙은 여전히 잘 지켜지고 있다. 이웃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농가와 농촌 교육기관을 방문해 들은 이야기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예 농·산촌 지역은 일정 면적 안에 거주해야 하는 인구수를 법으로 정해 놓고 농민에 대해 다각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독일은 식량자급률이 140퍼센트(%)가 넘는 나라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에 있는 인구 17만의 도시 켐프텐. 이 지역 농업국장을 지낸 하이머 박사로부터 독일과 유럽의 농업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럽연합(EU)은 전체 예산의 50% 이상을 농민들에게 지불하는 보조금으로 쓴다. 나라와 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1ha당 170~280유로(약 21~35만 원)는 기본이고, 바이에른 주 같은 곳에서는 유기농업을 하는 농가에 1헥타르(ha)당 270유로를 더 주는 등 환경에 부담을 덜 주는 농사와 경사가 급한 곳, 응달진 곳, 고도나 방향 등을 고려한 '조건 불리 지역', 농장을 물려받는 후계자나 청년(40살 이하)들에 대해서는 지원금을 더 준다고 했다. 독일 농가의 평균 경작면적이 47ha이고 연평균 소득은 7000만 원가량인데, 이 가운데 보조금으로 받는 돈이 절반 이상인 4000만 원 정도라고 한다. 보조금은 지자체 농업국에서 서류를 검토해 넘기면 EU에서 직접 농가에 지불하는데, 매년 사용한 비료의 양, 축산 농가의 경우 항생제 사용량도 수의사의 처방에 따라 엄격하게 제한하고 반드시 돌려짓기해야 하는 등 농민들이 지켜야 할 의무도 많다고 한다.
농산물 가공·판매, 농민들이 소규모로 쉽게 할 수 있게
농산물을 가공해 판매하는 데 대해 규제는 느슨하게 하고 세금 혜택은 적극적으로 주는 점도 특별해 보였다. 농민들이 만들어 파는 1차 가공식품은 부가가치세를 면제한다. 가령 농민이 우유로 치즈를 만들어 팔면 부가가치세가 안 붙지만 일정 규모를 넘어서거나 치즈에 다른 첨가물을 넣어 2차 가공을 하면 ‘업자’로 분류해 세금을 부과한다.
바이에른 주 일러빙켈 지역 '레가우농민조합'에는 유기인증을 받은 66개 농가가 참여하고 있는데, 이 농가들은 직접 소규모 도축장과 소시지 등 육류가공공장, 직판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연간 소 100마리, 돼지 1천 마리 정도를 도축해 고기와 소시지를 만들어 판다.
도축장은 약 330제곱미터(㎡) 정도나 될까 싶은 작은 규모였다. 일주일에 소 한두 마리를 잡고, 육류가공공장도 소규모 분쇄기와 소시지 제조기계를 한두 명이 부지런히 운영하는 수준이었다. 한국 정부에서 거점별로 대형 도축장을 지정하고 소규모 도축장을 구조조정하는 것을 '경쟁력 강화' 방안으로 추진하고, 위생관리기준만 강조하다 보니 대규모 시설투자가 불가피해 농민들이 선뜻 농식품 가공사업에 나서기 어려운 우리 현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농민들이 스스로 세운 원칙을 지키며 살 수 있을 때, 농촌과 농업은 지속된다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발터 크라이들(63) 씨는 6ha 규모의 상대적으로 작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다. 자신이 농사지은 밀을 마당 한 쪽에 있는 제분실에서 직접 빻아 만든 밀가루, 목조로 된 농가 맨 아래층 우사에 있는 젖소 여섯 마리가 생산하는 우유, 100여 마리 닭이 매일 낳는 달걀로 빵을 만들어 판다.
크라이들 부부는 전국 빵 경진대회에서 다섯 번이나 우승을 차지해 '맛의 왕관' 표시를 내 건 전국 '챔피언'이다. 한국 같으면 맛집 소개 TV프로그램에 등장하고 빵을 사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텐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에 하루만 빵을 굽고 구운 빵이 모두 팔리면 가게 문을 닫는다.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다고 빵 값이 비싼 것도 아니다. "밀가루를 사다가 더 많은 빵을 만들어 팔면 소득을 늘릴 수 있잖은가?" 하는 우리들의 질문에 부부는 "그렇게 하면 스스로 세운 원칙을 지키기 어렵다. 돈이 모든 게 아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크라이들 씨의 25살 막내아들 발터 주니어는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하고 일주일 중 하루는 종일 빵을 굽는다. 아버지의 후계자가 된 것은 자신이 "매우 원했기 때문"이며, 농업 교육은 어떤 면에서 힘든 점도 있지만 힘들게 배워야만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농장 주인들은 자식 가운데 한 명을 '농업후계자'로 지정하고 농장 전체를 상속해야만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식이 여럿이라고 농지를 분할해 물려주면 농장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사유재산권을 일부 제약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농촌 고령화에 대한 고민은 독일도 마찬가지다. 농민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하는데도 농업 후계자들이 매년 3%씩 줄고 있다고 한다.
한국도 전쟁을 겪었고,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어떤 미래로 가서 닿을 것인지에 대한 모색은 부족했던 것 같다. 선거 때마다 농업, 농촌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정부에서 세운 '농업농촌기본계획' 같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농업을 지키고 유지하겠다는 인식이나 목표는 없었던 것 같다. '규모화'를 통해 경쟁력을 갖게 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농업과 농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뿐이지 않았던가 싶다.
유럽 국가들이 왜 "우리가 살기 위해 농업,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 땅에 알프스를 만들 수는 없어도 농민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농촌은 노력하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단, 농업을 사양산업으로 치부하는 시선을 바꾼다면 말이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