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프레시안 : 1956년 대선 결과 이승만 후보가 당선자라는 발표가 이뤄진다. 그렇지만 이것이 당시 상황에 부합하는 결과인가에 대해 그간 숱한 의문이 제기됐다.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다면 이승만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서중석 : 이 선거가 정말 어떻게 치러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선거 운동 규모에서 자유당과 민주당과 진보당이 얼마만큼 큰 차이가 있었는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고, 야당이 선거 운동에서 엄청난 방해를 받은 것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항이다. 그와 더불어 투·개표, 그중에서도 특히 개표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적어도 투표한 것을 개표에서 제대로 반영하기만 했어도 그런 선거 결과가 나왔겠는가 하는 문제다.
이 선거는 개표 부정이 굉장히 심했던 선거로 알려져 있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가 많이 나온 건 아니지만, 진보당은 참관인을 거의 내지 못했고 극히 일부 들어간 경우도 쫓겨났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민주당 참관인들은 조봉암 표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조봉암 표가 삭감돼 이승만 표로 옮겨졌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예컨대 부산 영도구의 자유당 위원장이던 이영언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 있다. 조봉암 표가 너무 많이 나와서, 조봉암 표를 중간에 넣고 그 아래위에 이승만 표를 하나씩 넣는 방식으로 100매 단위의 묶음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걸 샌드위치 표라고 부른다.
이런 방식이 많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 식으로 부정 개표가 엄청나게 이뤄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그것을 사실로 인정할 수 있게 해주는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부정 선거 자인한 최인규의 놀라운 고백
프레시안 : 어떤 것들이 있나.
서중석 : 1957년에 나온 책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에 조봉암이 쓴 글을 보면 표제가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로 돼 있다. 글도 그렇게 썼지만 제목 자체가 '내가 투표에서 이겼는데 개표에서 졌다', 이렇게 돼 있다. 이승만 정권 때 아닌가. 대단한 확신이 서지 않았으면 이렇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홍진기 전기에도 이 문제에 관해 쓴 부분이 있다. 홍진기는 이 선거 당시 해무청장이었지만, 조금 있으면 법무부 장관이 돼서 조봉암·진보당 사건을 다루는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1960년 3.15 부정 선거 직후 내무부 장관이 되는 인물이다. 이 사람 전기를 보면 "남아 있는 여러 개표록을 볼 때 개표 부정이 없었다면 조 후보가 이 후보에게 졌다고 해도 근소한 차이였을 것이라고 일부에서는 생각하였다", 이렇게 돼 있다. 유민 홍진기 전기 간행 위원회에서 펴낸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
제일 놀랄 만한 것은 3.15 부정 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최인규가 5.16쿠데타 후 사형 선고를 받고 옥중에서 쓴 자서전에서 1956년 대선을 다룬 부분이다. 여기서 최인규는 "발표된 것하고 실제 내용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이건 전국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런 현상 때문에 최인규는 충무, 진주, 부산, 여수, 목포, 정읍, 김제, 전주, 대구, 김천 등 조봉암 후보 표가 이승만 후보 표보다 처음에 훨씬 많이 나온 선거구의 군수, 서장들을 불러서 그 원인을 알아보고 싶었다고 썼다. 한마디로, 발표된 내용하고 실제 투표 결과에 차이가 나는 건 전국이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최인규는 전국적인 투표 결과에서 압도적으로 조봉암 후보가 우세할 경우 당선을 선포하도록 묵인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물론 최인규가 이렇게 이야기한 데에는 바로 조봉암 같은 사람을 막기 위해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른 것이라고 변명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4월혁명 후 3.15 부정 선거 관련자로 얼마나 많은 자유당 간부하고 장차관, 경찰국장들이 구속됐나. 그런데 그중에서 최인규만 부정 선거 문제를 분명하게 인정했다. 그걸 보면 최인규는 나름대로 확신이나 솔직한 게 있었고, 최인규가 거짓말을 했더라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선거에서 개표 부정이 굉장히 심했고 그 결과는 얘기하기가 참 어렵다고 적어도 몇 개의 글이나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옥중 자서전에서 최인규는 예컨대 강원도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이 각각 90퍼센트 이상 득표한 것으로 발표됐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군인들의 70퍼센트 이상이 조봉암에게 투표했다는 것이다. 최인규는 이처럼 1956년 상황을 돌아본 후 "(1956년) 5.15선거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는 (1960년) 3.15선거를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편집자')
조봉암은 바람을 일으키고 이승만은 죽을 쑨 이유
프레시안 : 1956년 대선에서 조봉암 쪽은 제대로 선거 운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막판에는 후보 본인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조차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인가.
서중석 : 한마디로 이승만 후보, 이기붕 후보가 정말 인기가 없었다는 건데 우선 이 선거가 전시 체제가 아니라 긴장이 완화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1952년 선거는 전시에 치러진 선거였고 1954년 5.20선거는 전시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글에도 그렇게 나온다. 그런데 1956년에는 아무리 이승만 정권 쪽에서 전시 분위기와 긴장을 고조하려 해도 거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 당시 신문 보도 같은 걸 보면,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고 하면서 긴장 완화 분위기 같은 걸 시사하는 글들이 나온다. 그러면서 '유권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이렇게 나온다. 누구를 찍을지 말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전시 체제에서는 할 수 없던 행동을 유권자들이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있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때쯤 되면 초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상당히 늘어난다. 초등학교 의무 교육이 실시되면서 1950년대 중반쯤 되면 초등학교 취학률이 90퍼센트에 육박하게 된다. 물론 유권자의 상당수는 여전히 문맹자였지만, 이 시기에 교육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서울이나 부산 인구가 대거 늘어난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때 도시화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산업화 없는 도시화였다. 다시 말해 취직할 수 있는 곳 또는 일자리가 별로 없는 도시화였다. 엄청난 빈민, 판자촌이 존재했다. 또한 생활이 그 정도 수준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도시민들은 전반적으로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다. 어쨌건 이렇게 농촌에서 대거 도시로 왔고, 그런 사람들 중 상당수가 신문도 보고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인 사람들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이승만 정권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전반적인 배경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조봉암도, 신익희도 인기가 참 좋았다. 조봉암은 특히 경상도에서 인기가 좋았던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신익희는 서울, 경기도에서 인기가 아주 좋았다. 이런 개인 인기들이 선거에서도 작용했다. 그뿐 아니라 조봉암이 선거 구호와 정책으로 내건 평화 통일, 피해 대중을 위한 정치 같은 주장이 호소력 있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그보다 더 큰 요인은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강한 반감이었다. 이건 서울 같은 데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부터 많이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도강파, 잔류파 문제 같은 게 있지 않았나. 그다음에 이승만의 기만적인 우민 정책도 커다란 반발을 불렀다. 1952년 선거와 1956년 선거의 민의 동원이 가장 대표적이지 않나.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짓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어떤 면에서 도시 사람들한테 역효과를 낸 것 아닌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사사오입과 함께 우의마의가 그렇게 인기를 끌며 1950년대를 풍미한 것은 바로 우민 정책에 대한 강한 반발 아니겠나.
무엇보다도 농민은 농민대로 죽겠고 도시민은 도시민대로 실업이라든가 생활고로 죽겠다는 상태, 즉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얘기해주는 그런 것이 컸다. 이와 더불어 자유당 정권의 횡포, 부정부패가 너무 심한 것에 대한 반발이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문제 인물들 중용한 이승만…국회의원들, 사상 초유의 의원 데모
프레시안 : 1956년 대선 결과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준엄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대선 후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이 대통령은 '정말 그럴 수가 있는가' 싶은 정책을 또 편다. 선거가 끝난 지 불과 6일밖에 안된 1956년 5월 21일 내무부 장관을 이익흥으로 갈아 치웠다. 5.15선거를 주무한 내무부 장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도 볼 수 있다. 새로 내무부 장관이 된 이익흥은 아첨으로도 유명했지만 무엇보다도 일제 때 박천서장을 지낸 사람이다. 해방 후 친일파가 장관이 된 경우가 많고 내무부 장관이 된 사람도 여러 명 있지만, 일제 때 경찰서장을 한 자를 내무부 장관에 임명한 건 이게 처음이다. 그런 면에서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앉혔다. 이것도 사람들을 놀라 자빠지게 한 인사였다. 김종원은 민간인 학살과도 관련이 있었고 거창 학살을 은폐하려 하는 등 숱한 문제를 일으킨 인물 아닌가. 그런데도 그렇게 했다. 어떻게 저런 자를 그런 자리에 앉히느냐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게끔 했다.
이런 인사는 이 대통령의 의도가 명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선거 열흘 후 기자들이 선거 결과에 대해 물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답한 것으로 신문에 발표됐다. "이번 선거 결과로 보아 친일하는 사람과 용공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세상에, 신익희를 찍은 사람을 다 친일하는 사람으로, 조봉암에게 표를 준 사람을 다 용공주의자로 몰고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속상하고 분노가 끓어오른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에 대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건가.
프레시안 : 이승만 대통령이 이익흥, 김종원 같은 사람을 요직에 전진 배치한 후 어떤 일이 벌어지나.
서중석 : 대선 직후의 이런 분위기는 그 후 첫 번째로 실시된 선거에서 바로 나타난다. 1956년 8월 8일 시읍면 의원 선거와 시읍면장 선거가 실시되고, 8월 13일에는 서울시 및 도의회 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그런데 지방 자치 선거일이 결정되자 야당계 입후보 예정자에 대해 검거 선풍이 막 불었다. 대개 갖가지 죄목의 경범죄로 구류 처분을 받게끔 한 것이다. 그런 사례가 아주 많았다고 신문에 보도되고 그랬다. 등록 마감일이 가까워지니까 사복 경찰이 출마 예상자 집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각지에서 등록 서류를 강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남, 부산 같은 데서는 등록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졌다. 실제로 등록한 사람이 얼마 안 된다.
아예 등록조차 못하게 할 정도로 심하게 탄압하니까, 7월 27일 국회의원들이 사상 초유의 의원 데모를 했다. 시쳇말로 '떡대'라고 할 수 있는 김두한, 이철승 같은 사람들을 앞세워 시위를 벌였는데, 62명이나 나왔다. 야당 쪽에서 다 나서다시피 한 것이다. 그러자 내무부 장관 이익흥과 치안국장 김종원이 경찰을 진두지휘해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 소리 질러 가면서 국회의원들을 저지했다. 그러면서 국회의원들과 경찰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지고 의원들이 폭행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서울시경국장이던 박병배는 1976년 7월 13일 자 <동아일보>에 이 사건을 돌아보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박병배는 당시 상황을 "현직 내무 장관과 치안국장이 국회의원을 길거리에서 광견(狂犬) 잡듯이 하였"다고 표현했다. '편집자')
이런 과정을 거쳐 치러진 8.8선거에 대해 한 신문은 "생각될 수 있는 온갖 방법이 천하의 이목을 조금도 꺼려함이 없이 공공연히 대담하게 자행됐다", 이렇게 썼다. 예컨대 대구시의 한 어머니는 혼자서 4장을 찍었고 이 사람의 둘째 아들은 7장, 셋째 아들은 8장을 찍었다고 보도됐다.
환표 사건과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담긴 이승만 정권의 민낯
프레시안 : 8.8선거와 8.13선거 결과는 어떠했나.
8.13선거에서는 투표함 바꿔치기가 전남 함평군, 전북 정읍군에서 사실로 입증됐다. 투표함을 이송하는 도중 형사들이 투표함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환표(換票)를 한 것들이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됐다. 이게 유명한 환표 사건이다.
이 당시 서울시는 까딱 잘못했다가는 우남시가 될 뻔했다. 우남은 이 대통령의 호인데, 1955∼1957년에는 이승만 우상화 운동 비슷한 것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당시 책자 같은 걸 보면 이 대통령을 '민족의 태양', '세기의 위인', '반공의 위대한 지도자', '20세기의 위대한 지도자' 등 여러 가지로 찬양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속에서 남한산성에 이승만 대통령 송수탑(頌壽塔)을, 남산에는 우남정을 세운다. 우남정, 이건 나중에 팔각정이 된다. 또 광화문에는 우남회관을 지었는데, 이게 나중에 서울시 시민회관을 거쳐 세종문화회관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서울이라는 이름은 발음하기가 나쁘다. 외국인들이 발음하기가 힘들어하니 서울이라는 이름을 바꾸자',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자 자유당에서 '그럼 우남시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주장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우남회관을 짓는 것도 지지부진했고 우남시로 이름을 바꾸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서울시 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당선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프레시안 :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자유당 후보를 꺾고 부통령이 된 장면도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서중석 : 선거가 끝나자 그해 9월 28일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이라는 게 또 일어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에 앞서 8월 15일 대통령, 부통령 취임식을 하는데 이때 장면 부통령이 취임사를 읽을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앉을 의자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고 써놓은 것으로 기억한다. 또 이승만 대통령이 행사에 참석한 중요한 사람들을 다 소개했는데 자신은 소개도 안 했다고 한다.
장면 부통령도 그렇게 온유한 사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일을 겪은 장 부통령은 취임식 직후 외신 기자를 만나, 취임사로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해버렸다. 아울러 성명을 발표해 아주 강도 높게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
자유당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자유당은 장 부통령이 "국가의 기초를 뒤흔들려는 발언을 했다"고 하면서 '장면 부통령의 외신 기자 회견 담화에 대한 경고 결의안'이라는 것을 제출했다. 그 원안에는 '장면 부통령한테 국민에 대하여 공적으로 사과하는 동시에 금후 이러한 반국가적 언동을 중지할 것을 경고함', 이렇게 적혀 있었다. 9월 27일,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고 나서 바로 다음 날인 9월 28일 저격 사건이 벌어졌다. 이 저격 사건에서 장면은 손만 다치고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나중에 이 사건과 관련해 치안국장 김종원도 배후로 거론되고 내무부 장관 이익흥도 입에 오르고 그랬다. 4월혁명 이후 김종원, 이익흥 다 구속된다. 2심 재판에서 이익흥, 그리고 자유당 거물이자 서울시장도 지낸 임흥순은 무기 징역을 받았고 김종원은 15년형을 받는다. 하지만 5.16 군사 정부에 의해 이들은 전원 석방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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