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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살인미수는 안 죽여도, '통일'만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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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승만 살인미수는 안 죽여도, '통일'만 말하면…"

[평화통일시민강좌] <3>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2015년은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00년의 한반도는 남과 북 사이에 화해와 교류협력, 평화의 기운이 넘쳐났으며 통일논의가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이후 남북 당국과 민간 교류는 대부분 단절됐고 남북관계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분단 70년, 광복 70년,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다시금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나아가 통일을 모색하기 위해 '평화통일시민행동'에서 '평화통일시민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모두 6회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강연의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세 번째 순서로 지난 6월 6일 서울 시민청 워크숍홀에서 '오월에서 통일로-민주주의와 통일의 함수관계'를 주제로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의 강연이 열렸습니다. '걸어 다니는 현대사'라 불리는 역사학자 한 교수는 한국의 근현대사 과정에서 정치적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통일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한 교수는 "정치적으로 유명했던 사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죽여버렸어요. 이승만을 총으로 쐈던 사람도 사형당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진보당의 조봉암, 민족일보 조용수, 인혁당까지 통일 이야기하니까 빨갱이로 몰고 사형시켜 버렸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유기적인 '함수 관계'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는 분단으로 인해 훼손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남북 화해와 통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오늘 강연의 주제가 '오월에서 통일로' 민주주의와 통일의 함수관계인데요, 사실은 오월도 분단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훼손됐는지를 살펴보며 5월 광주로 가겠습니다.

간첩은 고문해도 되는 거 아니야?

김영삼 정권 시절 내무부 장관을 지낸 최형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YS 진영의 최측근이죠. 동국대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민주화운동하고 야당에서 투사로 이름을 날렸던 이 양반이 내무부 장관이 되었을 때 ‘남매간첩단 사건’이란 게 있었는데, 그게 아주 시끌시끌했어요. 사건이야 안기부에서 담당했지만 내무부 장관이 경찰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으니까 기자들이 찾아가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중에 최형우가 스스로 고문을 시켰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들이 계속 질문을 하니까 이 사람이 '간첩은 고문해도 되는 거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민주화 운동 출신으로 전직 국회의원이자 현직 내무부 장관이며 정권의 최고 실세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민주화 운동 투사이기만 했나요? 자기가 고문 피해자에요. 유신선포 하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시끄럽게 구는 국회의원들 데려다 고문했습니다. 그때 고문당한 사람들 중에 하나에요. 고문당한 야당의원 13명 중에 '나 고문 이렇게 저렇게 당했어'라고 가장 세게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본인이 고문 피해자였던 사람이 간첩은 고문해도 된다고 하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가 가능하겠습니까? 분단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우리가 정말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공안검사들도 항의했다

1963년 7월 대선을 가까스로 이긴 박정희가 어렵게 출범을 했는데 6개월 만에 6.3항쟁이 일어나고 대학생들은 'Again 4.19'를 외칩니다. 학생들이 박정희를 몰아내려고 하니까 군사정권에서 '1차 인혁당 사건'을 터트려요.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해서 검찰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검찰에서 보니까 실제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검찰에서 기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나온 유명한 말이 있죠. '저놈들이 얼마나 지능적인 놈들인데 증거를 남기겠냐, 증거가 없을수록 고도의 빨갱이다.'

그러니까 담당 검사 4명이 전원 사표를 냅니다. 공안검사는 대한민국에서 반공으로 치면 0.00001%에 드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기소할 수 없다'라고 해요. 있는 빨갱이는 혼내야겠지만 소위 '서클' 정도를 기소해봤자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데도 중앙정보부가 밀어붙이고 검찰 상부에서도 밀어붙이니까 중간에서 검사들이 버티다가 사표를 낸 것입니다. 극우 보수이지만 저 정도 자존심은 있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4명 전원 사표는 오보입니다. 한 사람이 안 왔는데요, 최대현이라는 사람입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중앙정보부에 하고 중간에 돌아서죠.

이승만 살인미수는 안 죽여도 통일 말하면 죽여버렸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나서 터진 것이 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여 18시간 만에 사형시켰어요. 이 사건의 의미가 뭐냐면 박정희가 자기 고향을 초토화시킨 것입니다.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렸습니다. 10월 항쟁(1946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 당시 미 군정의 식량 정책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편집자)이 대구에서 일어났고 2.28 투쟁(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는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유세가 계획돼있었다. 그런데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 강제로 등교를 지시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정권 규탄 시위를 벌였다. 이 투쟁은 이후 마산의 3.15 부정선거 항의시위로 이어졌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편집자)도 대구에서 시작됐어요. 대구가 민족민주운동의 아성이었습니다. 그 곳을 초토화 시킨 겁니다.

이분들이 잡혀가고 1년 동안 가족 면회를 안 시켜줬어요. 그런데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났으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가족들이 다음날 찾아갔는데 이미 안에서 사형집행이 된 거에요. 당시 시신을 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화장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고문을 당한 흔적이 남아있고 이분들의 묘가 모이면 안 되니까요.

자, 지금 제가 이런 사건들을 보여드리는 이유는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사형판결이 난 사건들은 전부 통일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반(反)정부만으로는 죽이지 않습니다. 통일문제와 관련된 사람들이 죽는 겁니다. 정치적으로 유명했던 사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죽여버린 거에요. 불발이 돼서 안 나가긴 했지만 이승만을 총으로 쐈던 사람도 사형 안 당했어요. 진보당의 조봉암, 민족일보 조용수, 인혁당 분들까지 통일 이야기 하니까 빨갱이로 몰고 사형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민족을 이야기하면 통일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자, 이제 5월로 가봅시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를 갔지

공수부대가 고시학원 앞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잡아다가 무조건 패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데모하던 젊은이가 아니라 길 가던 젊은이입니다. 이 사람을 계속 패는데 흰 완장을 둘렀잖아요. 잘 보시면 십자가가 있어요. 위생병입니다. 적군이 부상을 입어도 치료해줘야 하는데 저렇게 패고 있는 겁니다. 당시 5월에 제일 많이 불렸던 노래가 있죠.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디를 갔지', 어느 순간 시민들이 돌아서서 맞서기 시작합니다. 설명하기 힘든 대목이에요. 5.18은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끌려가는 시민 ⓒ연합뉴스

백골단하고 맞서신 적 없으시죠. 전투경찰하고 틀린 무술경감님들이에요. 날렵하게 헬멧 하나 쓰고 '악'하고 달려들면 주저앉거나 돌아서서 달려가지도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무서운 공수부대랑 싸우는데 시민들이 겁을 안 먹습니다. 겁을 상실한 거죠. 공수부대는 엄청나게 무섭습니다. 그게 작전이에요. 공포를 심어줘서 해산시키는 것에서 더 나가서 주동자 검거까지 목표로 하니 골목 끝까지 쫓아갑니다.

그런데 골목에 들어간 공수부대원이 도로에서처럼 사람을 패고 있는데 옆에서 공사하던 사람이 곡괭이로 찍고 연탄 버리러 나온 아줌마가 연탄으로 공수부대를 찍습니다. 이 때문에 공수부대도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해요. 공수부대 입장에서는 돌아버릴 일입니다. 겁을 주면 흩어져야 하는데 달려들기 시작하는 거에요. 시민들은 처음에는 말도 못하게 무서웠지만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도망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가 부끄럽고 혐오스러웠을 겁니다. 같이 데모하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보니 '죽고 사는 게 내 소관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도 잘 모르게 싸우게 되는 것이죠. 결국 공수부대는 도청까지 갔다가 퇴각합니다.

시민들이 총을 들었습니다

그때 한가하게 드라마 틀고 엉뚱한 뉴스나 보도하던 MBC에 화난 시민들이 진짜로 MBC에 불을 질러요. 실제로 취재를 제대로 한 기록이 남아있기는 합니다. '민주주의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물건이 부족한데 물가가 폭등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매점매석이 없고 혼란스럽지 않다'는 내용의 기사를 본사에 송고를 제대로 한 기자가 있었습니다. 테이프에 나오는 목소리가 귀에 익은 목소리라 자세히 들어보니 정동영 목소리이더군요.

어쨌든 시민들이 총을 들었습니다. 이건 대단한 겁니다. 도청 소재지를 점령했어요. 500년 동안 그런 일이 많지 않았어요. 시장 아줌마들은 시장에 솥을 걸고 주먹밥을 만듭니다. 김밥도 있었지만 워낙 먹을 사람이 많으니 주먹밥을 만들어요. 주먹밥은 광주에서 나눔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소비도시 광주에서 외부와 차단이 되고 물자가 안 들어오는데 시민들이 굶지를 않았어요. 현대판 오병이어(五餠二魚, 예수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사건)의 기적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뉴욕 핵발전소에 벼락이 떨어져서 뉴욕 전체가 7시간 동안 정전이 된 적이 있어요. 그 때 물건을 약탈하다가 잡혀 간 사람만 4000명이에요. 광주는 일주일 동안 공권력이 마비되고 총기가 풀렸는데 단 한 군데 털린 곳이 없었고 범죄자가 없었습니다.

또 광주는 얼마나 슬펐을까요. 신원이 미확인 된 관이 많았고, 관이 부족해서 관이 없는 시신도 많았습니다. 신원이 확인되면 장례를 치렀어요. 매일 저녁 도청 앞에서 3만 명이 모여 범국민대회를 합니다. 5월 26일 마지막 범국민대회가 열려요. 오늘 밤에 계엄군이 반드시 들어온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어요.

지금도 제가 대학생들 대상으로 강연을 합니다만,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5.18 당시의 이야기가 해방 직후 의병 이야기를 듣는 것과 비슷할 겁니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으니 지금의 대학생들이 5.18을 실감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복잡한 것 다 알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만 깊게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26일 밤 10시에 남아있을까, 집에 갔을까. 나 같으면 어땠을까'

저는 그때 대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서울에 있었지만 도청에 있었다면 남았을까요, 집에 갔을까요? 지식인이라면 내가 집에 가야 하는 이유를 1초에 3000개 이상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지식인은 거의 안 남았어요. 이 사실을 밖에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총을 쏘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다 등등 빠져나갈 수 있는 명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결국 도청에는 교수, 교사, 종교인 등 포함해서 이른바 '사'자 돌림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조금 남긴 했지만 중국집 배달원, 석유·가스 배달원, 웨이터 등등만 주로 남았어요. 총을 내려놓자는 건 비겁한 것일까요? 공수부대가 얼떨결에 물러갔지만 작정하고 들어오는 거에요. 시민군들이 쓰던 총은 M1이나 카빈이에요. 그 총 가지고 계엄군과 싸워서 승산이 없어요.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없는데 꼭 싸워야 할까요.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하며 총을 내려놓자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광주에서 총을 다 내려놓았다면 텅 빈 도청에 전두환 애들이 당당히 들어왔을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5월은 없었을 것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때 당시에는 200여 명이 채 안 되는 사람이 죽은 것인데 우리나라에 200명 죽은 사건은 많아요. 제주에서만 하루 저녁에 200명 죽은 동네가 부지기수입니다. 민간인 학살도 많죠.

▲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광주가 다른 것은 끝까지 맞서 싸웠다는 것이에요. 이기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졌는지도 중요합니다. 중요한 싸움에서 잘 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해요. 여기서 그날 밤 다 집에 갔지만 1%가 남았어요. 300명이 도청에 남았습니다.

당시에 미국 항공모함이 들어왔죠. 그전에 미국이 인권외교하고 한국 민주주의 이야기 하니 시민들은 미국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지역 봉기가 물 건너간 상황에서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하지는 않을 거야', '항공모함이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라고 희망을 가졌지만, 사실은 전방에서 부대를 빼서 광주를 진압하고 있는 때에 북한에서 혹시 딴 생각할까봐 항공모함이 들어온 것 아닙니까. 이로 인해 한국은 반미의 무풍지대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격렬한 반미운동이 일어나는 곳으로 변하게 됩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마지막 날 저녁 도청 앞에 있다가 집에 간 사람들이 집에서 듣는 소리입니다. 집에 갔던 사람들은 새벽 3시, 4시경에도 잠을 못 이뤘어요. 오히려 도청에 있던 사람들은 피로와 중압감에 못 이겨 졸았지만 집에 간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집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 심정이 오죽했을까요. 누구는 부모님 생각이 나서, 어떤 사람들은 이기고 싶어서, 또 누구는 이 싸움은 진 싸움이니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며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 왔지만 방송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총소리가 1시간도 채 나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제압당했어요. 총성이 4~50분 났었다고 하는데 수색하면서 쏜 총소리를 포함해서 그렇지 실제 교전은 10분도 채 안 됐어요. 집에서 총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총소리가 진압의 시작입니다. 총소리가 금방 멈추니 그 총소리를 듣던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1980년 5월 27일 새벽은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이었습니다. 그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왔습니다.

광주의 자식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도청에서 싸우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 등에 계엄군이 '총기저항', '악질 극렬 폭도'라고 써놨어요. 이 사람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80년 5월 이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슬픔을 간직한 사람이 광주의 자식이에요. 광주는 처절하게 졌습니다. 마지막 도청에서 총 맞아 돌아가신 분들은 쓰레기차에 실려 망월동으로 갑니다. 꽃상여 타고 한 분 한 분 간 것이 아니라 쓰레기차에 쓰레기처럼 실려 간 거에요. 역사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80년 5월 27일 광주가 진압이 되고 5월 30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서강대 김의기가 투신을 합니다.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수천 동포의 학살자가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는 이 상황에서 동포여,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질문을 던지고 투신을 합니다. 81년 5월 27일 서울대에서 5.18을 추모하는 데모를 하는데 경찰이 캠퍼스에 들어와서 진압하니까 김태훈 학생이 도서관 5층에서 보고 있다가 '전두환을 처단하라' 외치고 투신했습니다. 바로 절명을 안 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으니 학생들이 그리로 몰려들어요. 그러니까 경찰이 거길 향해 최루탄을 하염없이 쏴서 시신에 눈처럼 최루탄이 하얗게 덮였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알게 되었어요.

광주의 자식들은 겁을 상실했습니다. 전두환한테 대들게 돼요. 박정희한테는 다들 덤비지 못했는데 전두환한테 고문당하고 탄압당하면서도 싸울 수 있었던 힘은 광주의 힘입니다. 광주가 가진 전염성이 사스나 메르스보다 훨씬 강해요. 운동 자체가 질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발전했습니다.

그전에는 운동에서 죽고 사는 문제가 좀 먼 문제였어요. 70년대에는 열사들이 많지 않았어요. 80년대에는 저 같은 사람이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열사가 많아요. 그렇게 수두룩 빽빽 합니다. 또 80년 광주를 거치면서 대학생들이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집니다.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미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하는 근원적인 차원의 충격을 준 거에요. 그 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서울 미문화원 점거, 김세진·이재호의 분신까지 미국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목숨 걸고 싸웁니다.

전두환 살인마! 노태우 살인마! 한열아 가자! 광주로 가자!

저는 80년 5월과 87년 6월이 한 달 차이인 것 같아요. 그냥 한숨에 달려왔어요. 6월 항쟁. 이것도 할 이야기가 많지만 한열이가 숨을 거두고 나서 한열이 어머니가 서럽게 우는데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됐습니다. 압수할 것이 뭐였냐면 이한열의 사체에요. 이 때문에 경찰이 영장 발부해서 집행한다고 들어 올까봐 청년학생 1000명이 우리 손으로 한열이 장례식 치러 준다며 날밤을 샜어요. 7월 9일 한열이 장례식 때 한열이 어머님이 외칩니다.

'전두환 살인마! 노태우 살인마! 한열아 가자! 광주로 가자!'

▲ 1987년 6월 항쟁 당시 최루탄에 희생된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이부영

문익환 목사님도 오셨어요. 여러분, 장례식 가서 졸아본 적 있어요? 그날 저를 포함한 1000명의 학생들이 장례식장에서 자고 있었어요. 몇 날 며칠을 밤을 새고 드디어 장례식이 치러진다는 안도감과 땡볕에서 장례식을 하는데 왜 이렇게 연설이 많아요?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목사님이 나오셔서 목소리를 빽 지르는 거에요. 놀라서 깼죠.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광주 이천여 열사여!...이한열 열사여!'

돌아가신 열사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부르기 시작하는데 1분도 안 돼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울기 시작했어요. 꾸벅꾸벅 졸던 놈들도. 이날 사람들이 제일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87년 대선 이후 학생들이 민주화는 되었는데 다음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통일을 외칩니다. 4.19 때와 같아요. 다시 남북 통일문제가 대두됩니다. 특히 88년도에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에 과연 북한이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가 관심이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보진영 내에서도 남북공동주체로 가자는 주장도 나왔어요. 88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김중기, 유재석 후보가 남북학생회담을 제기해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조성만 열사가 명동성당에서 할복 투신을 합니다. 조성만 열사는 그 전의 열사들과는 달리 통일 문제를 정면에 내걸고 돌아가셨죠. 그리고 임수경의 방북이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분위기 좋았어요. '어느 동맹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해요. 깜짝 놀랄 이야기였죠.

원래 우파는 민족을 이야기하고 좌파는 계급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경쟁도 하고 견제도 하고 자극도 하고 대립도 하면서 역사가 발전하는 건데, 우리나라는 어때요? 우파가 민족을 이야기를 안 하고 동맹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그 발언을 듣던 우파들은 경악을 했고 우리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취임사에서 나오니까 충격이 컸죠. 정부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이인모 비전향 장기수를 북송해서 남북관계가 잘 풀릴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북핵 문제가 터지고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역사가 꼬인 것이죠. 그러다가 97년 정권교체가 되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집니다.

'0'에서의 출발, 역사는 진보합니다

제가 길게 우리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통일문제를 같이 담아보려고 사례를 풍부하게 들었지만 딱히 정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사례 하나하나에서 여러분이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 분단이 될 때는 외세에 의해서 되었죠. 그러나 분단을 이 땅에 자기 것으로 만들고 고착화시켰던 것은 독재세력이고 공안세력이에요. 그 핵심이 지금 이어져서 공안세력이 되었고 지금 이 한국 사회에 지배층이 되었습니다. 이 공안세력을 해체하지 않는 한 우리는 통일문제에서 진전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조봉암, 인혁당처럼 통일을 이야기하면 잡혀 죽었습니다. 선배들의 죽음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80년대 분신투쟁 하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가 진보하는가를 묻습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국전쟁 때 대구 옆에 경산이라고 있습니다. 여기가 최대 민간인 학살지에요. 지금도 3500~4000구 유해가 묻힌 곳입니다. 여기에 싹 묻었잖아요. 참 기막힌 얘기에요. 저게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지난번 대선 때 51대 49로 졌는데 우리가 0대 0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50대 50 출발한 것이 아니에요. '0'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역사가 변하지 않나요? 한국 전쟁 때 다 죽었는데 만 7년 만에 터진 게 4.19에요. 대한민국 정말 위대합니다.

▲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평화통일시민행동

이렇게 죽으니까 제가 현대사 공부 처음 시작했을 때 자료가 없어서 어르신들 찾아다니면서 옛날이야기 해달라고 했어요. 어른들이 말씀할 엄두를 못 냈어요. 어른들 말씀이 '다 죽었어, 다 죽고 쭉정이만 남았어'라고 얘기합니다. '미안하다 나 같은 게 살아서 5일장 장터에서 국밥을 다 먹는다', 고은 시인도 이러게 이야기 하잖아요. 거기서 국밥 한 그릇 드시다가 울컥하시는 거죠.

영국 기자가 한국 상황을 보면서 그랬어요. 한국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필 것을 기대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고. 그렇게 야유를 했어요. 그러한 나라가 4.19혁명을 거치고 5.18항쟁을 이루고 6월 항쟁을 지나 지금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굴곡은 있게 마련입니다. 통일도 여러 굴곡을 거쳐 왔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왔고 또 여기 젊은 분들이 모여서 강좌도 듣고 수요촛불도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까 저도 힘이 납니다. 노력합시다. 감사합니다.

* 오는 20일(토) 오후 3시,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냉전을 추억으로 만드려면-냉전의 시대, 남북관계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주제로 김연철 인제대학교 교수의 번째 강연이 열릴 예정입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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