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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지옥' 한국도 꺾지 못한 해고자 아빠의 '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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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지옥' 한국도 꺾지 못한 해고자 아빠의 '꿈의 노래'

[프레시안 books] 이창근 <이창근의 해고 일기>

지난해 12월 12일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였던 고 최종범 열사가 남기고 간 딸의 두 돌을 축하해주는 자리가 서울의 한 식당에서 조촐하게 마련되었다. 공교롭게도 아이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그 자리에서 나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 2명이 다음 날 새벽에 쌍용차 평택 공장 내에 위치한 굴뚝에 오를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 달여 전인 11월 13일 대법원은 쌍용차의 정리해고가 무효라고 판단한 원심 판결을 깨고 서울고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냄으로써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에 대한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2009년 8월 6일부터 6년에 걸쳐 공장 앞에서, 거리에서, 대한문에서, 철탑에서 풍찬노숙을 감내하며 싸워온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동료들 곁으로 돌아가 다시 자본과 정면 대결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으리라.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에서 노동자들을 대리했던 나로서는 참으로 미안하고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던 터였다. 전화라도 해서 만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패소한 대리인이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었겠는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예고한 바대로 다음 날인 12월 13일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공장 안 굴뚝에 올랐다.

그 둘 중 한 명이 바로 <이창근의 해고 일기>(오월의봄, 2015년 2월 펴냄)의 저자 이창근이다. 굴뚝 농성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난 올해 2월 하순경 프레시안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굴뚝에 올라간 해고 노동자 이창근 씨가 해고 기간 동안 썼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했는데 서평을 써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미안함이 컸던 터라 두말하지 않고 수락했다. 정작 글을 쓰려고 하니 여러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이 평택 공장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여 옥쇄 파업을 할 당시, 나는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관계로 노동 법률가들과 함께 평택 공장을 방문했고 이때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와도 인연을 맺었다. 인연이 남달랐던지 나는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과 관련한 기자회견과 집회에서 두 번이나 경찰에 체포·연행되어 구금되었고 결국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게 되는 특별한 경험도 갖게 되었다. 그만큼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과 그로 인해 쫓겨난 노동자와 가족들 26명의 죽음,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 거리에 나선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한 기업의 노사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노동과 그를 둘러싼 정치적 현실을 드러낸 사회적 재난이자 아픔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현실을 가식 없이 드러낸 이창근의 글

ⓒ오월의봄
나는 저자 이창근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했다. 그가 깡촌 출신이었는지, 그의 아들 이름이 '주강'인지, 아들을 얼마나 어여삐 여기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주로 농성장이나 거리, 아니면 사무실에서 공적인 관계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으로 언론 브리핑을 도맡아 하는 해고 노동자이고, 다른 사업장의 정리해고·비정규직 투쟁에도 기획 단계부터 함께 참여하며, <한겨레> 등 언론 매체에 쌍용차 문제를 비롯한 노동 문제에 대해 주기적으로 기고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마주친 그의 글은 읽을 때마다 내게 상당한 공감과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서평을 쓰기 위해 <이창근의 해고 일기>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첫째, 그의 글은 간결하며, 자신과 동료들의 경험과 처한 현실을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더더기가 없다. 다음을 보라.

"2009년 4월 8일 기가 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숫자인 2646명을 정리해고 숫자로 발표한다. 조합원이 5300여명이었으나 둘 중 하나는 나가란 얘기였다." (21쪽)

"그 종이 한 장의 힘은 대단했다. 조합원을 산 자와 죽은 자로 정확히 갈랐다. 웃는 자와 우는 자, 안도의 한숨과 깊은 한숨이 교차했다. 말로만 듣던 정리해고 통지서는 삶의 공간까지 파고들었다. 같은 동 아파트에서도 산 자와 죽은 자가 구분되었다. 왕래는 뜸해졌고, 끼리끼리 다시 헤쳐모여를 시작했다." (26쪽)

"2009년 7월 중순을 넘겨서는 많은 조합원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공장을 떠났다. 공권력의 겁박보다 회사가 우리를 짐승처럼 대하는 태도에 더는 견딜힘이 없었던 것 같다. 필요할 땐 가족이라 살랑거리던 회사가 정리해고 상황에서는 차가운 자본의 모습으로 돌변하니 더는 미련을 둘 수 없었던 것이다." (30쪽)

둘째, 그의 글이 담고 있는 현실은 글보다 더 극적이다. 그래서 아프다. 마치 살을 에는 듯이 말이다. 다음을 보라.

"물이 없어 화장실은 똥오줌으로 가득했고,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찌르고 정신까지 혼미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돼지우리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배고픔의 고통보다 진압의 두려움보다 더한 절망감을 느꼈다. 인격을 살해당하는 느낌이었다." (33쪽)

"(민주노총 탈퇴가) 형식적으로는 조합원 투표를 통해 이뤄졌지만, 공장 안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관리자들은 분 단위로 쪼아댔고 현장은 그야말로 눈치 보는 공장으로 변해갔다. 하루아침에 동료 3000명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공장 안 노동자들이었다. 눈치는 비굴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자기 논리를 제공했다. 악착같이 공장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난 파업과 해고자를 보면서 알고 있었다. (…)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가진 자들에게 더 많은 이윤을 제공하기 위해 노조는 무력화돼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49쪽)

"급기야 2001년 2월 26일 쌍용차 무급자 임무창 씨가 숨졌다. 불과 10개월 전인 2010년 4월엔 그의 아내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남겨진 아이는 둘, 통장 잔고는 4만 원, 카드빚은 150만 원. 쌍용차 무급자의 참혹한 현실이다." (76쪽)

해고가 살인이자 일상인 시대, 손 흔들며 안부나 묻는 정치는 허구다

셋째, 그의 글에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고, 하나하나의 글이 언론 매체에 기고한 독립된 글들임에도 서로 모순되지 않고 일관적이다. 그만큼 그의 생각은 누구보다 분명한 지향을 갖고 있다. (관련 기사 : 웃으면서 싸울 거야, '분홍분홍'하게!)

그는 쌍용차 투쟁의 본질은 죽음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정리해고 문제를 정확히 겨냥해야 한다고 말한다.

"쌍용차 정리해고의 본질이 죽음이 아님에도 죽음이 쌍용차 투쟁과 사태의 본질이 돼버린 상황이다. 죽음을 걷어내려는 노력은 이어지는 죽음을 막는 것과 함께 냉정하게 쌍용차 문제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악마 같은 정리해고를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쌍용차 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되길 바란다면 쌍용차 노동자의 죽음 문제를 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정권과 자본이 저지른 일련의 행위를 낱낱이 밝혀내고 진정으로 정리해고의 폐해를 막고자 하는 이성이 있다면 슬프지만 죽음 문제는 잠시 뒤로 미뤄야 한다. (…) 쌍용차 문제는 사람이 죽어가기 때문에 함께하고 연대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이 사회에 만연한 정리해고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나는, 당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법과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연대의 손길을 이어가는 것을 뭐라 할 순 없지만 그 연대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40쪽)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해선 정리해고 제도 자체에 대해 밀고 들어가는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사태의 전말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분별한 정리해고가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노동 문제의 폭력성과 파괴성을 극복할 수 없다. 자본이 노동자에게 가하는 발가벗은 실체를 우리는 쌍용차 투쟁에서 경험했다." (41쪽)

그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현실에 대해 "해고가 살인임과 동시에 일상인 시대다. 이직과 전직이 밥 먹듯 이뤄지는 뼛속 깊은 신자유주의 안개속이다. 개인의 노력이 성공을 보장한다는 거짓 부채질이 이곳저곳에서 대답 없이 출몰한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가당치 않다는 윽박지름이 견고한 콘크리트로 자리 잡고 있다. 자본의 이윤율이 가파르게 치솟고 그 이익의 최종 수령자가 자본으로 향한다. 빈한 자와 부한 자의 간극이 벌어지고, 벌어진 간극의 낭떠러지로 노동자는 대책 없이 추락했다. 노동자는 더욱 궁지로 몰리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은 자본의 배당금 액수만큼 증가했다. 해고가 어느 순간 산업 질서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 안의 열패감은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미사여구에 강제적 날인을 했다. 비정규직 1000만의 시대, 이대로 가다간 자본의 무한 팽창이라는 풍선은 임계점을 맞을 수밖에 없다"(125쪽)고 말한다. 얼마나 정확한 묘사인가?

청소년들이 몰두하고 있는 '스펙'에 대해 "이제는 무엇을 중심을 둘 것인지를 대놓고 물어야 한다. 높은 스펙이 나를 위한 스펙이 아닌 자본의 일회용 스펙으로 전락하고 있다. 경제성장률이 개인의 삶을 성장시키기는커녕 더욱 곤궁한 삶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의 노력이 자본의 벽 앞에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는가"(125쪽)라고 지적함으로써 '스펙'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명하게 잘 드러낸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통합 행보를 한답시고 사전 협의도 없이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다가 노동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전태일재단을 방문하고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재벌과 자본 편에 선 정책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집권 여당의 노동 정책 방향을 노동자 쪽으로 트는 것이다. 현실에서 핍박받는 노동자들을 백안시하고 유령화하면서 무슨 전태일재단 방문이며 전태일 동상 헌화란 말인가"(244쪽)라고 개탄하고, "아픈 현실의 문으로 들어가 과거를 보지 않고 몰래 담장을 넘어 과거에만 손을 내미는 행위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라기보다 현실을 기망하는 모습"(244쪽)이라며 행위의 기만성을 지적했다.

또한, 일부 대선 후보들의 대한문 분향소 방문이 있고 난 후, 그는 "정치가 삶과 동떨어진 채 관념으로 치달을수록 노동자의 삶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이것은 어떤 정부에서건 마찬가지였다. 이윤의 폭력적 수탈 도구로 전락한 해고의 일상화와 폭발 직전의 비정규직 양산은 향후 장바구니 경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불안정성 위험 수위를 점차 높이고 있다.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는 안타까운 죽음 앞에 정치는 조문이 아닌 자본 폭력의 광풍을 막는 방풍림을 시급히 조성해야 한다. 만져볼 수도, 구경할 수도 없는 유령 같은 158억 원이라는 손배·가압류 금액이 한진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았는가. 대법원 판결을 지키라는 요구를 철탑까지 올라서 외쳐야 하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손 흔들며 안부나 묻는 정치가 무슨 소용인가.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법 개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결사의 자세로 싸워야 하지 않는가"(279쪽)라고 함으로써 조문이나 다니고 안부나 묻는 정치의 허구를 질타하고 있다.

ⓒ이창근


"흑인을 상대로 사냥 연습을 한 백인 모습 떠올리게 하는 노동자 사냥"

넷째, 그는 해고 노동자로서 투쟁 과정에서 마주쳐야 했던 불의한 공권력의 편파성과 잔인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정면으로 고발하고 있다. 다음을 보라.

"특히 노동 현장에선 공권력과 사권력인 용역의 차이가 사라진 지 오래다. 사용자 쪽의 시설 보호 요청엔 득달같이 달려가도, 폭력에 일상으로 노출된 노동자에겐 외려 닦달하기 일쑤이니 말이다. 공권력의 공정치 못한 법 집행이 현장에서부터 기형적으로 뒤틀려버린 것이다. 이렇듯 노동 현장에 경쟁하듯 편파와 위법한 공권력 남용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뭔가. 그 이면에 '성공한 작전'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공권력으로 쌍용차 파업은 진압됐고, 죽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린 노동자들은 그나마 목숨은 건졌다. 죽지는 않은 것이다. 그 이후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진압의 '기준'이 생긴 건 아닐까. 인권을 짓밟고 조롱하고 희롱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란 '인식'이 경찰 저변에 깔리는 계기는 아니었는가?" (117쪽)

"현장과 거리에서 유사한 공권력의 성공한 작전들을 더는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사람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노조와 노동자 사냥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 옛날 아메리카에서 흑인을 상대로 사냥 연습을 했던 백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118쪽)

"공권력은 무력을 사용할 때 반드시 비례의 원칙과 필요 최소한의 사용 원칙이 있어야 하나 이들에겐 금시초문이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았고 잔인함은 극에 달했다. 사측과 용역 편만을 들어 갈등을 야기하고 더 증폭시켰다. 파업 이후 구속과 처벌을 놓고 보더라도 경찰의 편파성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노동자는 96명이 구속되고 300명 가까이 검찰과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처벌된 용역깡패는 단 한 건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사측에겐 솜사탕을 선물했고 노동자들에겐 쇠몽둥이 처벌을 했다. 공권력의 추락이 이보다 더할 수 있는가?" (276쪽)

다섯째, 그는 자신의 경험과 불의한 현실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노동자의 역할, 사회의 주역으로서 역할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 인문학을 만나야 한다'는 소제목 아래에 "투쟁하는 노동자는 자본의 치부와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학자이며, 니체의 말처럼 철학은 망치로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철학자다. 이 학자와 철학자가 만약 인문학을 만난다면 훨씬 풍부한 인간으로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 직시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늘 가진다. 공부와 투쟁을 병행하는 노동자, 이것만이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운동, 나아가 사회운동에서 노동자들의 자기 역할인 것이다. 매번 안쓰럽고 연대 대상이 아닌 사회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해고 노동자들의 절박한 자기 역할이다"(114쪽)라고 적었다.

그는 자신이 관여했던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 희망버스가 뭐냐고. 답한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와 김진숙 지도위원의 무사 생환을 기원하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의 집합체라고. (…) 누군가 기획하고 누군가 뒷돈을 대고 또 어떤 이가 선동하지 않았냐고 끊임없이 묻고 묻는다. 왜 이런 질문이 이어지는 것일까? 남을 위한 조건 없는 행동에 대한 경험 부재. 경험만이 대답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고 말함으로써, 희망버스를 수많은 사람의 마음의 집합체로 정의했다. 나아가 "쌍용차 희망텐트촌은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실험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삶과 투쟁의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시각이어야 한다.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 회사의 지불 능력에 따라 생활의 윤택함이 달라지고 노동자들의 처지가 여전히 결정되는 구조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벼랑 끝에서 삶을 즐기는 위험천만함과 무엇이 다른가. 토대를 바꾸고 기반 공사를 다시 해야 한다. 그것이 해고 기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사회적 숙제는 아닐는지"(113쪽)라며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숙제를 제안하고 있다.


정치권과 법원이 외면한 '무간지옥' 6년…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그는 지난해 11월 13일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 후 "대법원은 법률심, 즉 법률 적용의 타당성 여부를 다투는 곳이다. 그러나 사실심인 서울고법에서 인정한 사실을 뒤집는 월권을 행사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정리해고' 사건에서만큼은 자본에는 신세계가 선물로 주어졌고 노동자에겐 무간지옥이 안겨졌다. (…) 대법원이 다양성을 포기하고 정치 일색으로 '깔맞춤'하는 오늘의 현실이다. 대법원이 쌍용차 해고자들의 고름 같았던 시간의 종결자 구실을 포기하고 완충지대 없는 허허벌판으로 떠밀었다"(407쪽)고 함으로써 사법부로부터 받은 배신감과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친 마음에 포기하고 싶은 오늘이지만, 자판이 흐리게 보이고 엄마를 붙들고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오늘이지만, 비탄의 시간 속에 무릎 꺾이고 심장이 타들어가 주저앉고 싶은 오늘이지만, 그런 개 같은 날이 오늘이지만, 이대로 이 모진 시간 이 사람들 기억에서 삭아 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목구멍이 막히는 오늘이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자리에 서 있지 못하는 한,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408쪽)라고 함으로써 주저앉아 울고 있기를 거부했다.

도리어 "우리는 다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법대에 앉아 오늘도 권력과 자본의 태평성대만을 하릴없이 노래하는 저 앵무새를 죽이지 않는다면 눈물 떨궈 희망의 씨를 뿌리는 선량한 앵무새는 결코 살 수 없다. 앵무새를 죽여야 앵무새가 사는 역설과 비탄의 시간 속에 우리가 서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416쪽)라는 질문을 던지고서 한 달 뒤 자신이 먼저 김정욱 쌍용차지부 사무국장과 함께 70미터 굴뚝 위에 올랐다.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는 동료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정치권과 법원이 끝내 외면한 '정리해고'라는 무간지옥의 6년을 끝내기 위해 그는 오늘로서 굴뚝에 오른 지 90일째를 맞고 있다.

그가 해고 기간 동안 써내려간 <이창근의 해고 일기>는 단순한 글이 아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한 노동자의 의지가 돋보이는 글이다. 그는 노동자들의 고단한 현실과 투쟁을 '희망'으로 승화시켜내려 한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꿈을 노래한다. "해고 노동자들에게 접을 수 없는 꿈이 있다. 노동자로 당당히 살아가고픈 꿈, 노동 과정에서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구조와 틀을 바꾸는 꿈, 어떤 이들의 꿈이다."(123쪽) 그리고 그는 '운동'이란 앙상하게 메마른 '관계와 입장'이 아니라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풍부한 인간관계의 복원을 위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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