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한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이런 내용이 소개된 적이 있다. 미국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5퍼센트 정도인데 수감자의 수는 전 세계 수감자의 15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정의로운 이미지를 쌓기 위해 자기 지역에서 강력한 사법권 행사를 종용하고, 감옥이 민영화되다 보니 죄수가 늘어나는 것이 '형무소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며, 9.11테러 이후 시민의 민주적 권리가 제한되어 가는 데 따른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방송을 보면서 불현듯 1990년대 초 뉴욕의 한 지인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분은 1950년대에 해군 장교로 복무하다 들른 미국에 반해 아예 그곳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분에 따르면 1950년대의 뉴욕은 천국이었다.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를 연상시키는 멋지고 친절한 남성이 넘쳐나 여성도 혼자서 밤거리를 안심하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1990년대의 뉴욕은 남성도 혼자서 밤거리를 다니다가는 언제 강도에게 당할지 모르는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1950년대는 이른바 '수정자본주의'의 시대이고 1990년대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이다. 두 시기에 모두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의 큰형님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는데, 미국 사회의 모습이 이토록 달라진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자본주의 요소를 억제했기에 가능했던 자본주의 황금시대
1950년대 미국의 번영은 1930년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이 몰고 온 군수물자 수요 덕분에 대공황을 극복한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이후 30년 동안 불황 없는 장기 호황을 누렸다.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등 '백색 가전' 제품이 부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집에도 놓이고 서민도 차를 몰고 다니며 대형 할인 매장에서 쇼핑을 즐기는 대중 소비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로 불리는 이 호황기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상당 부분 억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29년 대공황은 시장에 대한 맹신이 가져온 대참사였다.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면서 최적의 경제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 이론은 이 균형이 극단적으로 파괴되어 나타난 대공황에 대응하지 못했다. 이때 영국 경제학자 케인즈는 정부가 재량껏 정책을 펼쳐 유효수요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론을 펼쳤다. 이는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기존의 경제학 이론을 수정한 것이다. 그래서 케인즈 학파가 지향하는 경제 체제는 '수정자본주의'라고 불렸다.
1930년대 루스벨트의 경제 정책은 이러한 수정주의 이론을 채용했다. 대기업의 이윤 추구를 억제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실업자와 노인에 대한 복지 정책을 강화했다. 부자들에게서는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여 이를 공공 근로와 복지 정책의 예산으로 사용했다. 그 덕분에 실업률이 줄어들고 노동자를 포함한 서민들도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받게 되었다.
이와 달리 무한한 이윤 추구를 제한당하고 많은 세금을 물어야 했던 대기업과 부자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수정주의 정책을 '사회주의'로 몰아붙이고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수정자본주의는 그러한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년 기록적인 산업 생산성 증가를 자랑하며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경제를 국민에게 선사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무역 질서도 세계은행(WB),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통제 아래 비교적 안정을 찾아갔다. 1944년 미국의 브레턴우즈에 모인 44개 연합국은 금 1온스당 35달러의 교환 비율을 정해 놓고 각국의 통화 가치를 달러에 대한 고정 환율로 묶었다. 따라서 각국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환율에 따라 안정적인 무역 거래에 임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분단과 전쟁으로 너덜너덜해진 경제를 추스르고 '쌀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이 같은 장기 호황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0년대 들어서였다. 자본주의가 시장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허용하는 것은 일시적이거나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시대정신이었다. 한국은 이전에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겪어 보지 못했지만, 이 시기에 경제 건설을 시작하는 한 그러한 시대정신을 벗어나 제멋대로 경제를 운용할 수는 없었다.
5.16군사정부가 시작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은 그러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전적 자본주의에서 정부의 '계획'에 따라 목표를 세우고 시장을 통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부가 인위적으로 경제를 조절하는 '계획'이야말로 '시장'과 대립하는 사회주의 경제의 근본 특성이었다. 그런데 5.16군사정부는 이처럼 '사회주의적'인 계획 경제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박정희를 비롯한 5.16쿠데타 주도 세력이 '반공'을 국시로 내걸 만큼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5.16군사정부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보편적이던 시대에 경제 개발을 시작했다. 이처럼 시장에 개입하는 국가가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냐, 히틀러의 독일 같은 전체주의 국가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4.19혁명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권이 5.16쿠데타에 꺾이지 않고 계속 집권했더라도 계획이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에 맡기는 경제 정책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은 5.16쿠데타 이전에 이미 민주당 정부가 세워 놓고 추진할 준비를 하던 정책이었다.
공공성·노동자·복지를 전면 공격한 신자유주의
그렇다면 197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1990년대의 미국은 1950년대와 확 달라져 버린 것일까? 1971년 8월 1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은 전후 세계의 경제 질서를 바꾸는 선언을 했다. 그동안 다른 나라들이 금을 가져오면 1온스에 35달러씩 쳐서 바꿔 주곤 하던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은 전 세계 금의 78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누가 달러를 들고 와도 바꿔줄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에 이르러 미국의 금 보유량은 바닥을 드러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부은 데다 1971년 한 해에만 27억 달러의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할 만큼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각국은 앞다투어 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가서 금으로 바꿔 줄 것을 요구했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닉슨이 "바꿔 줄 금이 없다!"라며 손사래를 친 것이다.
세계 경제에는 비상이 걸렸다. 세계의 금융 당국은 고정 환율제를 전면 폐지하고 환율의 변동을 시장에 맡기는 변동 환율제를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이처럼 달러의 금 태환과 고정 환율제가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세계 경제는 환율 변동에 따라 엄청난 환차익과 환차손이 발생하고, 이 같은 외환 시장의 변동성을 이용한 온갖 투기성 펀드가 난무하는 금융자본의 도박판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처럼 어두운 구름이 감돌던 세계 경제에 결정타를 먹인 사건이 1973년 10월 6일 일어난 제4차 중동전쟁이었다. 그때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 세계를 향해 석유 생산을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유가가 네 배나 치솟았다. 석유에 의존하던 산업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고 공산품 값이 줄줄이 올랐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스태그네이션)가 동반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덮쳤다.
1970년대는 이처럼 40년 만에 찾아온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다기한 방안들이 제출되고 서로 경쟁하던 시기였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수정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을 몰고 온 주범은 시장에 지나치게 개입해 통화량을 늘리고 재정 적자를 늘린 정부라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시장의 조절 기능을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시장의 자율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이론을 고전적인 자유주의 경제 이론과 구별하여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수정자본주의가 한 시대를 풍미한 뒤에 이를 비판하며 새롭게 제기된 자유주의라는 뜻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의 부활인 동시에 그동안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추진해 온 기간산업의 공공성 확대, 노동자에 대한 배려, 복지 정책 등이 전면 후퇴하는 것을 의미했다. 국가의 개입이 줄어들어 공기업이 민영화되고 세금이 줄어들면 사회 안정을 위해 시도했던 노동 정책과 실업자, 청년, 노인에 대한 복지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를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한 이가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복지 정책을 확대하고 고등교육 정책에 힘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이 같은 정책을 통해 적자 재정을 흑자로 돌려놓아 대권 도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레이건은 전혀 다른 정책을 실시했다. 재정을 축소하고 소득세를 대폭 줄이고 대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를 풀었다. 그에 따라 복지 정책은 줄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세금이 줄어들고 정부의 규제가 풀리자 대기업들은 마음 놓고 이윤 추구에 나섰다. 노조의 요구에 대해 전보다 덜 신경을 써도 되었다. 바로 이런 흐름 속에 1950년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1990년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국은 '자본주의 황금시대'의 끝물에야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을, 그나마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역시 바깥 세계에서 맹위를 한바탕 떨치고 난 다음인 1998년 한국에 본격 상륙했다. 그리고 10년 만인 2008년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금융 위기가 세계 경제의 중심지인 뉴욕을 강타했다.
문재인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몸은 누구와 묶여 있는가?
2010년대는 1930년대와 1970년대가 그랬던 것처럼 세계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을 놓고 다기한 대안이 제출되고 경쟁하는 시기이다. 낙관적으로만 보자면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해 복지를 확대하고 노동자와 서민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경제 정책이 우위를 점하리라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전 세계의 많은 경제학자와 정치인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본의 이윤율이 저하된 만큼 극소수만 그 혜택을 누리려는 과두(寡頭) 체제로 나아가는 경향이 더 많이 감지된다.
박근혜 정부도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고 복지, 경제 민주화 등을 약속하며 출범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그 모든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대기업과 부자들의 이익에 충실한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측면만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이 땅에 늦게 들어온 신자유주의를 조금은 더 만끽해야겠다는 것일까?
이 같은 정권의 이율배반적인 행태에 대해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로 선출된 문재인은 '전면전'을 경고하고 나섰다. 그가 만약 진짜 전면전을 벌인다면 승산이 있을까? '민주주의와 서민 경제를 계속 파탄 낸다면'이라는 단서는 올바른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그는 신자유주의 이후에 대한 비전 아래 지금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걸까?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의 말이 진심일까 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입으로는 민주와 복지를 얘기했지만 몸은 기득권 계층과 하나로 묶여 있어 원초적인 생존 본능만을 발휘하고 있다. 과연 문재인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몸은 누구와 묶여 있는가?
2008년 금융 위기를 소재로 한 미국 영화 <마진 콜>에서 파국을 감지한 투자회사 직원이 이런 말을 한다. 경영진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뻔하다고, 늘 그래왔듯이 아랫사람들을 희생시키더라도 자기들은 절대 손해 보지 않는 방식으로 대처할 것이라고. 박근혜 정부의 행보가 그 말 속의 '경영진'과 흡사하다면, 문재인은 과연 어떨까? 그가 꺼낸 '전면전'은 위기 속에서 경영진을 협박해 자신의 안위를 저울질하려는 협상 카드일까, 아니면 직원들과 한배를 타고 움직이기 위해 결연하게 던지는 출사표일까?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역사에 비추어 오늘을 살피는 기획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의 의미를 새겨 보았으나 새해부터는 현대 한국 사회의 현안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되새겨 볼 예정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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