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북스는 미국의 군사주의가 세계의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책을 통해 알아보는 '전쟁국가 미국'을 연재합니다. 주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미국 등 외국인 저자의 원서를 통해 미국이 벌인 전쟁과 그 폐해에 대해 역사적인 성찰을 해보자는 것이 연재의 이유입니다. 이번 호에는 연재를 시작하며 미국 군사주의의 대강의 윤곽을 살펴보는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1.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미국은 세계 최강의 패권 국가로 군림해 왔다. 냉전 시기(1945∼1989년) 소련이 미국과 양강 구도를 이루었다지만,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미국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결국 소련은 미국과 극한적인 군비 경쟁을 벌인 끝에 스스로 무너졌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중국이 미국과 함께 G2 반열에 올랐으나 군사력 측면에서는 미국의 적수가 못 된다. 여전히 미국은 세계 최강의 패권 국가다. 지난 70년간 미국은 세계를 지배해 온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라는 게 있다. 쉽게 말해 미국은 세계를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이상향으로 이끌 사명을 가진 유일한 나라라는 얘기다. 이른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없어서는 안 될 국가(Indispensable Nation)'라고 스스로 지칭하면서 자신들이 세계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탈냉전 이후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오직 자유민주주의뿐이라며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의 모습은 어떠한가. 전쟁이 판을 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는 30년 이상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으며, 수천만 명의 난민들이 생존을 위해 천지 사방을 헤매고 있다. '이슬람국가(IS)'라는 시대착오적인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세력이 국가를 참칭하고 있으며, 미국은 15년째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향방을 놓고 미국과 러시아는 사실상 군사적 대치 상태에 돌입했으며, 동아시아에서도 미국, 일본과 중국 간의 군사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인구의 1퍼센트가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그리스와 스페인 등에서는 가혹한 긴축정책에 맞서 '돈보다 사람이 먼저'를 외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부상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을 강타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과연 '자본주의의 미래는 있는가'라는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약속한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평화는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과 가난, 폭력과 갈등이 세계를 불행과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 70년간 미국은 세계를 이끌어왔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의 불행과 혼돈에 대해 우리는 미국에게 1차적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세계의 패권 국가로서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은 왜 실현되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미국의 군사주의에 있다.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미국의, 정확하게는 미국 대기업을 비롯한 파워엘리트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해온 때문이다. 핵무기를 비롯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은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같은 고상한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 지배 집단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사용돼왔기 때문이다.
2.
미국은 전쟁을 통해 태어나고 성장해온 나라다. 전쟁을 통해 원주민을 학살하고 몰아냈으며, 전쟁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세기 중반 전쟁을 통해 멕시코 영토였던 북미 대륙 서부를 차지했으며,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 등을 식민지로 획득했다. 1차 대전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강대국들이 자살극을 벌이는 동안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됐고 2차 대전의 승리로 세계 최강의 패권국이 됐다.
<강대국의 흥망>을 쓴 미국의 역사가 폴 케네디는 "(17세기) 최초의 영국 정착민이 버지니아에 도착해 서부로 나아갈 때부터 미국은 제국이었다. 정복하는 국가였다"고 말한다. 미 제국의 본질을 가장 먼저, 깊이 있게 통찰했던 수정주의 역사가 윌리엄 애플만 윌리엄스는 "미국은 영토와 시장을 끊임없이 갈망해 왔으며, 자유와 번영이라는 고상한 말들로 이러한 갈망을 정당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문명 충돌론'의 제창자인 보수주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서양 문명에서 군사력의 효용성을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설파한다.
"서방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이념이나 가치, 종교의 우월함 때문이 아니다. 조직적 폭력의 활용에서 우월했기 때문이다. 서방은 종종 이 사실을 간과한다. 비서방인들은 결코 잊지 않는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서방이 500년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군사력의 우세 때문이라는 얘기다. 미국도 서방의 이 전통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미국은 그 자신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라는 점에서 유럽의 식민주의를 부정해 왔다. 또한 미국 예외주의의 전통에 따라 미국의 팽창은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고상한 사명을 위한 것이라는 수사를 통해 세계를 기만하고 자기 자신을 기만해 왔을 뿐이다. 미국은 외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주민을 통제해 시장과 원자재를 확보하는 기존의 식민주의 대신 미국 기업에게 완전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의 경제적 팽창을 꾀해 왔다. 1899년 선포된 이른바 '문호 개방(Open Door)'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간접 지배 방식의 경제적 팽창을 신식민주의라 부른다.
3.
2차 대전 직후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 군사 대국으로 떠오른다. 세계 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한 미국은 세계 GDP의 절반, 금 보유량의 3분의 2, 투자 자본의 4분의 3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기의 '절대 반지'라 할 핵무기를 가진 유일한 국가였다. 2차 대전 기간인 1943년부터 미국 경제계가 주도해 정부와 함께 추진한 '전쟁과 평화에 관한 연구'에서 전후 미국의 국가 목표가 정해졌다. 1차 대전 이후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권으로 갈라져버린 세계 경제를 미국 주도의 단일한 자본주의 경제 질서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야심찬 미국의 계획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우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이 참여를 거부했다. 이로써 세계는 이른바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갈렸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됐다. 세계 최대 인구의 중국은 미국 경제계가 가장 눈독을 들였던 해외 시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지원했던 장제스의 국민당은 결국 공산당에 패배하고 말았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에서는 신생 국가 중국의 농민군에게 치욕의 후퇴를 맛보면서 결국 승리하지 못했다. 베트남전쟁에서는 패배를 당했다. 1945∼1975년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실상은 미국식 경제 제도를 강요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은 후퇴하고 말았다.
베트남전쟁 패배로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절대적 우위가 무너졌다. 미국 무역수지의 악화와 함께 1971년 닉슨의 금 태환 정지 선언이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핵무기를 비롯한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으로도 제3세계에 미국의 의지를 강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단지 군사력의 우위만으로는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베트남전쟁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
전쟁의 본질은 '무력을 통해 나의 의지를 상대편에 강요하는 것'이다. 군사력의 우위가 정치적 승리로 이어졌을 때 전쟁의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아시아 등 제3세계에 대한 행한 군사 개입은 거의 대부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만일 미국이 요구하는 자본주의 제도의 도입이 해당 국가 국민들의 삶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이들 국가들은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군사력을 앞세운 미국의 강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미국의 군사 개입이 제3세계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경제 팽창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4.
베트남전쟁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은 중단되지 않았다. 오히려 1980년대 레이건 정부 때부터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은 강화됐으며,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중동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미국 또한 15년째, 역사상 최장의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미국 내의 정치투쟁에서 군사주의를 옹호하는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은 베트남 국민의 투쟁만으로 이긴 것이 아니었다. 우선 젊은이를 비롯한 상당수의 미국 국민들이 전쟁에 반대했다. 지배 엘리트 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평화적 다자주의를 지향하는 금융계 등 동부의 제도권(Establishment)은 전쟁의 조속한 종식을 원한 반면 군산복합체를 비롯한 일방적 군사주의 세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했다. 전자는 미국 경제 악화에 따른 달러화의 가치 하락을 가장 우려한 반면, 후자는 미국의 후퇴와 베트남 철수가 미국 군사력의 신뢰도 약화를 가져와 미국의 세계 지배에 치명적 결정타가 될 것을 우려했다. 제3세계 국가들이 미국의 군사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전쟁의 지속은 군산복합체에 커다란 이윤을 안겨주는 대박 사업이기도 했다.
전자는 동부의 전통적 석유 및 금융 재벌 록펠러 가문의 주도 아래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ttee)를 출범시켰고, 후자는 서부 및 남부 신흥 부호들의 지원을 업고 2차 대전 직후 냉전의 산파 역할을 했던 '현존위험위원회(CPD, Committee on Present Danger)'를 복원했다. 삼각위원회는 새로운 경제 강자로 떠오른 유럽, 일본과 공동으로 세계 경제를 관리해 나가자는 입장인 반면, 현존위험위원회는 미국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의 패권을 유지하자는 입장이었다. 1976년 삼각위원회가 지미 카터를 당선시킴으로써 우위를 점하는 듯했으나 1980년 대선에서 현존위험위원회가 지원하는 로널드 레이건이 카터를 꺾음으로써 결국은 일방적 군사주의 세력이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1969년 백악관에 입성한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 안보보좌관과 함께 공산권과의 데탕트, 즉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했다. 베트남에서 '영예로운 철수'를 준비하는 한편 중국과의 역사적 화해를 성사시켰고, 소련과는 군비제한협상(SALT)에 나섰다. 그러나 1974년 8월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중도 하야하고, 1975년 11월 키신저가 안보보좌관에서 물러나면서 닉슨-키신저 콤비의 데탕트 정책은 좌절된다. 당시 포드 대통령 밑에서 각각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았던 럼스펠드와 체니가 바로 키신저의 안보보좌관 퇴임을 주도한 이들이다. 키신저의 퇴임은 네오콘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럼스펠드와 체니는 네오콘의 대부로서 아들 부시 대통령(2001∼2009년) 밑에서 이라크 침공 등 일방적 군사주의 정책을 강행한다.
키신저의 몰락으로 소련과의 데탕트는 무산된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칭하면서 '별들의 전쟁(Star Wars)'으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을 추진하는 등 극단적인 군비경쟁으로 결국은 소련을 붕괴시킨다. 그 과정에서 소련의 몰락을 재촉하기 위해 미국이 동원한 것이 바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다. 아프간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아프간전쟁은 1979년 말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미 1978년, 카터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에 의해 시작됐다. 소련과는 앙숙인 폴란드의 귀족 가문 출신인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멸망을 위해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세력을 동원한다는 계획을 비밀리에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마침내 소련군이 아프간을 침공했을 때 브레진스키는 카터 대통령에게 "소련에게 그들의 '베트남전쟁'을 선사했다"고 보고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엄청난 피와 희생을 치렀던 것처럼 소련도 아프간에서 마찬가지 곤경에 처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브레진스키가 시작한 아프간전쟁은 레이건 정부 들어 더욱 큰 규모로 확대된다. 10년 동안 30억 달러의 전쟁 비용이 투입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사상 최대의 비밀공작이었다. 베트남전쟁에 50만 명의 지상군을 투입하고도 패배한 미국은 미군 대신 이슬람 전사들을 내세워 소련을 상대로 대리전을 치렀다. 소련이 아프간전쟁을 '유령과의 전쟁(Ghost War)'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결국 아프간전쟁은 소련 붕괴를 위해 미국이 이슬람 전사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치른 전쟁이었다. 미국 혼자만이 아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거의 같은 금액의 전쟁 비용을 댔고, 파키스탄이 이슬람 전사들과의 연락 및 훈련을 맡았다. 이렇게 해서 아프간전쟁에서 7만∼12만 명의 이슬람 전사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이 1990년대 이후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을 시작했다. 당초에는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에 주둔한 이교도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1년 9.11테러도 이들의 소행이었다. 테러범 19명 중 15명이 사우디 출신이었다. 결국 9.11테러는 미국 자신이 키워낸 이슬람 전사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아프간전쟁이 진행될 당시 파키스탄의 민간인 출신 총리 베나지르 부토는 미국에 대해 "당신들은 지금 당신들을 살해할 암살범들을 키우고 있다"고 경고했는데, 이 경고가 딱 들어맞은 것이었다. 결국 미국은 소련이라는 오랜 숙적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이슬람 무장 세력이라는 새로운 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5.
1991년 걸프전쟁은 미국 군사력의 효용성에 대한 군사주의 세력의 자신감을 회복시켜준 중대한 계기였다.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을 단기간에 물리친 뒤 한 미군 장성은 "우리가 이 전쟁을 이기는 데 15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1975년 베트남전 패배 이후 15년 만에 미국 지상군에 의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얘기다. 이후 미국은 대외 문제를 외교력보다는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제3세계에 대한 미국 지상군의 파병이 끝 모를 수렁으로 이어진다는 이른바 '베트남 신드롬'을 극복했다고 이들은 판단한 것이다.
사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미국의 속내를 오판한 후세인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1968년부터 미국 CIA의 정보원(asset)이었고, 1980∼1988년의 이란-이라크전쟁 당시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던 후세인은 막대한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한 자신의 쿠웨이트 침공을 미국이 묵인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미국은 1979년 전통적 맹방이었던 이란이 이슬람혁명에 의해 이슬람 신정국가로 거듭나면서 반미로 돌아서자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라크만 일방적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이란도 은밀히 지원했다. 중동의 패권 국가가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쪽 모두 소모적인 전쟁을 지속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해법을 고집함으로써 미국 군사력의 위용을 세계에 과시하려 했다.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미국은 후세인 정권 전복에 나선다. 유엔은 물론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전통적 우방국들도 반대한 미국 단독의 전쟁이었다. 세속주의, 사회주의 성향의 후세인 정권은 9.11테러와 관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슬람 무장 세력과는 적대 관계라는 사실도 무시했다. 네오콘을 비롯한 군사주의 세력의 목표는 이라크의 막대한 석유 자원을 장악하는 한편 이라크를 시작으로 중동 전역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이슬람국가(IS) 등장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이 지난 15년간 벌인 '테러와의 전쟁'은 오히려 이슬람 테러 세력을 엄청난 규모로 키워주었다. 게다가 이라크전쟁에 약 3조 달러, 아프간전쟁에 1조 달러의 전비를 쏟아 부음으로써 미국의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로 미국의 경제력은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의 결과는 베트남전쟁의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것이었다.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만으로는 제3세계를 미국의 정치적 의지에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이 이슬람 무장 세력의 사제 폭탄에 꼼짝달싹 못했다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또한 후세인 제거에는 성공했으나 이라크에 안정된 친미 국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오히려 이라크에 이슬람의 소수파 종파인 시아파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지역 내 위상을 강화시켜주는 결과가 됐다. 미국의 무분별한 군사력 동원이 오히려 미국의 숙적 이란을 도와준 것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의 결과, 미국의 군사력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는 데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증명됐고, 2008년 금융 위기로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력이 바닥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은 바뀌지 않았다. '군사력에 의한 대외 문제 해결'이라는 군사주의 노선이 미국 제도권 정치 내의 초당적 합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노엄 촘스키 같은 비판적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CIA 고문 출신인 찰머스 존슨, 육군 대령 출신의 군사역사가 앤드류 바세비치 등 보수적 지식인들마저 미국의 군사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미국의 장래에 해가 된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제도권 정치인들은 여전히 '안보 우선'을 외치고 있다.
오히려 2011년 리비아 카다피 정권 제거,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아사드 정권 축출을 위한 시리아 내전에서 이슬람 무장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중동 지역의 혼란과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이 포기되지 않는 한 중동을 비롯한 세계의 무력 갈등과 혼란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일부 평자들이 미국을 '혼돈의 제국'으로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6.
역사적으로 제국은 군사력을 동원해 영토를 확장하고 시장과 원자재를 획득해 경제 팽창을 이루어 왔다. 그 과정에서 지배계급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도 제국의 팽창에 따른 과실을 누렸다. 대략 2차 대전 때까지 미국의 행보가 그랬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특히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의 군사주의는 '전쟁을 위한 전쟁', '극소수 파워엘리트를 위한 전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일반 국민은 전쟁의 피해자로 전락했다. 미국이 벌인 군사주의적 모험이 일반 국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반면 군산복합체와 석유 기업, 금융계 등 파워엘리트의 배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침공 이후 수의 계약으로 재건 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한 핼리버튼과 KBR, 민간 용병 조직인 블랙워터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에게 전쟁은 그 자체가 커다란 이윤을 남기는 대박 사업이다. 미국 국가안보국의 무차별 도·감청 실태를 고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일했던 부즈 알랜 해밀턴이라는 회사는 중앙정보국 예산의 약 70퍼센트에 해당하는 용역을 맡고 있다.
반면 미국인들의 삶을 위한 사회복지 예산 등은 전쟁 예산에 밀려 축소 일로에 있다. 2005년 카트리나 태풍 피해를 겪은 루이지애나주의 배수펌프가 100년 이상 낡은 것이었다는 사실은 미국의 군사주의가 일반 국민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가를 보여준다.
끝없는 전쟁을 통해 미국 내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과 함께 민주주의도 퇴보하고 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국가 비상사태 하에 있으며 '안보'를 이유로 일반 국민들에 대한 감시와 사찰도 강화되고 있다.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은 이슬람 테러 분자로 의심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멘계 미국인 이슬람 성직자에 대한 드론 암살을 명령하기도 했다. 이 명령으로 그와 그의 10대 아들이 미사일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미국 정부가 미국 시민을 사법 절차 없이 살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지금도 오바마 대통령은 매주 화요일 테러 용의자 명단을 직접 챙기면서 일일이 공격 대상자를 선정해 암살을 명령한다. 드론에 의한 테러 용의자 암살은 오바마 대통령이 남긴 미국 대외 정책의 최대의 부정적 유산이라는 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다음 해인 2004년, 세계의 양심으로 불리는 노엄 촘스키는 <헤게모니냐, 생존이냐>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책을 냈다. 이제 인류는 미국의 헤게모니 지속이냐, 인류의 생존이냐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섰다는 것이다. 미국의 헤게모니 지속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촘스키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폭주를 저지할 제2의 슈퍼 파워는 세계 여론이라고 말한다. 미국 국민을 비롯한 세계 시민들이 미국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의해 일제로부터 해방됐고, 미국 덕분에 북한의 남침을 막았으며, 미국의 도움으로 오늘날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다수 한국인들이 미국에 비판적 인식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미국 주도의 IMF가 우리 경제에 얼마나 치명적인 처방을 내렸으며, 남북 대화가 무르익던 1992년 가을 미국은 왜 중단됐던 팀 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해 협상 진전을 가로막았으며, 2002년 10월 근거도 불분명한 북한의 우라늄 농축을 이유로 제네바 합의를 파탄 낸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곰곰 따져본다면 미국은 언제나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중국의 경제적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대중 군사 포위망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되는지를 이제는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때이다. 지난 70년간 미국의 군사적 행적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우리의 미래 행보를 정하는 데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다.
다음 호(2월 27일)에는 20세기 전반 미국 자본주의의 대외 팽창을 위한 첨병 역할을 하다가 반전(反戰)으로 돌아선 스메들리 버틀러(1881∼1940년) 장군의 책 <전쟁은 사기다>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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