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찾은 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숙소 부근의 서점에 들렀더니 여러 가지 홍보지가 붙어 있는 유리문 가운데 윗부분 눈에 잘 띄는 곳에 'Nous Sommes Charlie'라고 쓰인 전단이 있었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영어로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두세 번 반복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날 밤 사전을 찾아보니 '우리는 샤를리다'라는 뜻으로 'Je Suis Charlie(나는 샤를리다)'를 변형한 문장이었다.
다음 날 아침 서점 앞을 지나다 보니 유리문에서 그 전단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니까 문 아래쪽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소심하게 옮겨 붙어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혹시 나를 위험한 인물로 의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파리는 긴장되어 있었고, 내 휴대전화로는 매일같이 '프랑스 대테러 경보 단계 최상급 유지 중, 신변 안전에 각별한 주의 요망'이라는 외교부 문자가 날아왔으며, 우아함의 상징인 샹젤리제에서까지도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경찰들이 순찰을 돌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꼭 가 봐야지 하고 벼르던 센 강 남쪽 소르본 대학가 부근의 카페 르 프로코프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변모한 이곳은 17세기 말 파리에 처음 생긴 카페로 볼테르, 로베스피에르 등 18세기 파리의 유명 인사들이 애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요일 오후답게 손님이 가득해 입구 오른쪽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40분 넘게 기다린 뒤에야 식탁으로 안내될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볼테르의 두상을 비롯해 카페의 역사를 알려주는 각종 사진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2층 공간을 구경했다. 18세기에 계몽 사상가들이 커피를 마시며 절대왕정에 대한 비판을 주고받았을 방마다 중산층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프랑스 요리를 즐기고 있었다.
유럽 시민혁명을 북돋운 음료, 커피
도쿄대 우스이 류이치로 교수가 쓴 <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나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스티븐 워드 교수가 쓴 <커피이스트 매니피스토>를 보면 커피는 서유럽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음료라고 한다. 커피의 기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에티오피아의 양치기 소년 칼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염소들이 들판에 있는 어떤 나무의 빨간 열매를 먹고 나면 흥분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커피였다. 이슬람 신비주의 교파인 수피즘 교단은 잠을 쫓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커피를 철야 기도하는 신도들에게 마시게 했고, 효과가 증명된 커피는 이후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가 밤새도록 수다를 떨며 사회를 비판하는 혁명가들을 낳게 된 셈이다.
유럽에서 처음에는 이교도의 음료라는 이유로 억압받던 커피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예술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는 교황 클레멘스 8세(1535∼1605)가 커피에 세례를 내림으로써 이후 유럽 곳곳에 커피 판매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커피하우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카페, 독일의 콘디토라이는 수많은 문화 예술인이 모여 정치, 경제, 사회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토론과 창조의 공간이었다. 낡은 것을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혁명은 카페를 따라다녔다. 시민 계급이 카페에 모여 섭취하는 커피는 그들의 사상적 각성을 북돋는 에너지원이었다. 커피 덕분에 머리가 맑아지고 잠이 달아난 시민들은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며 그들의 눈에 새롭게 비친 세계와 그 속에 놓인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고민하고 논쟁했다. 그런 가운데 시민 계급의 사상인 계몽주의가 무르익었다.
커피가 시민 계급의 각성제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런던에서였다. 커피는 사람을 깨어 있게 하고 두뇌 활동을 촉진하는 기능성 음료로 사랑받게 되었다. 그러자 한때 런던에서는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의 청원'이라는 팸플릿이 나돌기도 했다. "남자들을 사막처럼 메마르고 쇠약하게 만드는 음료의 과도한 사용으로 그녀들의 섹스에 발생하는 거대한 불편을 공공에 호소"하려는 것이 이 팸플릿의 취지였다. 남자들이 커피하우스에 죽치고 앉아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셔 대다가 정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성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커피는 영국 남성의 생물학적 정력은 떨어뜨렸는지 모르지만 사회적 정력은 괴물처럼 키워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의 촉매제 역할을 한 뒤 파리에 상륙했다. 1686년 시칠리아 출신 프로코프가 자기 이름을 딴 '카페 르 프로코프'를 연 것이다. 이 카페 안에는 볼테르가 커피를 마시며 원고를 쓰던 방이 있었다. 그는 하루에 40잔(50잔설, 60잔설도 있다)의 커피를 마시고 절대왕정에 독설을 퍼부었으며, 변호사 로베스피에르는 인권의 가치를 논하며 열변을 토했다. 미국의 독립운동가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하러 파리에 갔다가 계몽 사상가들과 교유한 곳도 카페 프로코프였다.
런던의 커피하우스가 퇴조한 18세기에는 프랑스 파리에 6700군데의 카페가 들어섰다. 이곳에 모여들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던 프랑스혁명의 나팔수들은 1789년 7월 14일 카페 드 푸아를 나서 바스티유 감옥으로 진군했다. 근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프랑스대혁명은 그렇게 골목의 카페로부터 나와 파리의 대로를 장악했던 것이다.
19세기 들어 프랑스혁명을 전복하고 유럽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내리자 독일에서 커피와 설탕이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참다못한 독일인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반(反) 나폴레옹 봉기를 일으킨다.
아시아·아메리카·아프리카에 재앙을 가져온 독극물, 커피
이슬람 세계에서 시작된 커피 문화는 이처럼 유럽에 상륙해 시민혁명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 시민의 폭발적인 커피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유럽의 무역선들은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샅샅이 뒤지며 커피 산지를 찾거나 만들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사냥해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과 아라비아의 커피 농장에 노예로 팔았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인도네시아의 자와 섬에 거대한 커피 농장을 만들고 다른 농작물의 씨를 말려 버렸다.
유럽 시민 사회의 성장이 노예무역의 급성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은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다. 식민지의 노예 노동을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값싼 제품들이 서유럽을 이전 세계의 어느 제국 못지않은 풍요로운 문명으로 이끌었고, 바로 그러한 문명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싹은 트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대륙에 대한 수탈과 착취로부터 성장한 유럽 자본주의는 전함과 무역선을 보내 자기 모습대로 세계를 재창조해 나갔다.
이처럼 시민 혁명의 나라들은 자국의 커피 수요를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에 극단적인 모노컬처(monoculture) 경제를 강요하고 산업 구조와 생태계를 파괴해 버렸다. '세계 2위의 무역 상품'인 커피는 전 지구적인 예속 관계를 재생산하며 검게 흐르고 있다. 천부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부르짖으며 인간 해방을 추구한 계몽사상이었지만, 그들의 입을 즐겁게 해준 커피는 다른 대륙에서 무수한 인간의 자유를 압살한 독극물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은 프랑스 내부의 자유 평등 박애는 부르짖었을망정 프랑스의 억압을 받고 있던 다른 대륙, 다른 민족의 자유 평등 박애까지는 시야에 넣지 못했던 것일까? 혁명의 주도 세력 가운데 일부는 그처럼 선진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나, 혁명의 산물인 현대 프랑스의 행보를 보면 그렇지 못했던 게 분명해 보인다. 프랑스에 커피를 제공한 이슬람 세계의 일부 극단주의 세력이 오늘날 프랑스를 떨게 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프랑스대혁명의 한계에도 기인할 것이다.
프랑스가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
관용의 수도 파리가 예기치 않게 테러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태는 1950년대 알제리 전쟁으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시대착오적으로 알제리 식민지 영유를 고집하던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독립 봉기가 일어나자 수십만 명의 프랑스 젊은이들을 파견해 끔찍한 살육전을 펼쳤다. 이 사건을 다룬 프랑스 영화 <친밀한 적>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활약했던 사병들이 알제리에 투입되어 해방군과 싸우는 모습이 보인다. 프랑스의 자유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던 진보의 투사가 바로 다음 순간 타민족의 자유를 탄압하는 반동적인 침략군으로 변모하는 역설이라니!
프랑스가 테러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내가 샤를리다!"라고 용감하게 외치는 데만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프랑스대혁명이 못다 이룬 지점에서 그것을 완수하는 데 진정한 길이 있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적 자유를 제외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이 완성되었다고 볼 근거는 찾기 어렵다. 인간 해방이라는 대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1871년 파리코뮌의 패배와 더불어 유실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역사에 비추어 오늘을 살피는 기획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의 의미를 새겨 보았으나 새해부터는 현대 한국 사회의 현안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되새겨 볼 예정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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