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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안 들면 '공공의 적' 되는 세상에 묻자,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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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안 들면 '공공의 적' 되는 세상에 묻자, "도대체 왜?"

[프레시안 books] 전쟁없는세상 엮음 <저항하는 평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여러 곳에서 밝혔지만 내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2년, 가톨릭일꾼공동체를 만든 도로시데이와 피터모린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오후,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방공 훈련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산책을 하는 가톨릭일꾼공동체 회원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무척 신선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사는 이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뒤, 오태양 씨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기자회견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게 되었다. 오태양 씨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선언이 있기 전, 성우 양지운 씨를 통해 '여호와의 증인'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이슈가 되긴 했지만, 불교 신자의 첫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선언으로 평화운동에 새로운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여성인 내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을 동두천이라는 기지촌에서 보낸 영향이 크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얼뜨고 여린 기질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이 <저항하는 평화>(오월의봄, 2015년 1월 펴냄)의 추천사에서 말했던 "오늘 한국 땅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행하는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무엇"인 "섬세함", "잘 부러지기도 하는 강인한 것과는 오히려 거리가 먼,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그래서 나의 언어 능력으로는 기껏 인간의 어떤 정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유약해 보일 정도로 섬세한 어떤 '결'이라고나 할까. 가령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까지 마치고 각자 신발을 신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거리에 나섰을 때, 찬바람이 목덜미를 휘감고 각자의 계급적 처지와 홀로 맞닥뜨리게 될 때, 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게 하는, 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것 (…) 한마디 덧붙인다면, 이념으로 억압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갖게 할 수는 없는 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저항하는 평화>를 읽으면서, 혹은 그 이전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선언을 한 청년들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것이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또한 고민 끝에 군 입대를 선택한 청년들 역시 그 섬세함과 '결' 때문에 더 힘든 군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을 지금도 맞닥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아무리 자주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월의봄
내가 자란 동두천의 특수한 환경은 어릴 때부터 폭력이나 차별에 예민하게 만들었다. 폭력은 아무리 자주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미군이 여자를, 혹은 미군이 힘없는 한국 사람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어른한테 대들 수는 없었지만 또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달랐다. 흑인 혼혈이나 백인 혼혈 친구들이 차별을 받거나, 반장이라고 해서 학급 친구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걸 그냥 넘기지 못했다. 기껏해야 '하지 마'라고 말하거나 그 '권력'에 승복하지 않는 소극적인 대처였지만 내게는 나름대로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특히 제복이나 엄격한 규칙, 거친 말투에 거부감이 컸다. 그러니 당연히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큰 부적응 행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엄마에게서 들은 바로는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엉뚱하고 모자라는 짓을 많이 해 엄마를 곤란하게 하는 아이였다. 1학년 때는 수업 시간마다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선생님을 쳐다보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선생님한테 화장실에 간다는 말을 못해 교실에서 오줌을 싼 적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기억나는 것은 3학년 때부터다. 여름방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창문만 바라보며 딴청을 하는 나를 교탁 앞으로 불러냈다.

"너 왜 자꾸 창문만 봐?"
"저, 우주소년 아톰을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그때 진짜로 숨 막히는 교실에서 나를 구해줄 아톰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엄마가 학교로 불려 오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6학년 때는 소아마비에 걸린 중학생 오빠를 제치고 갈 수가 없어서 친구와 함께 지각을 했다.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마흔이 돼서 다시 만난 친구가 그때 내가 했던 말을 해주었다.

"내가 지각했다고 짜증을 내니까 네가 말했어. 나는 이렇게 건강한 두 발로 걷는데 저 오빠는 저렇게 다리가 아프니 내가 앞장서서 가버리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어머니는 내가 또래 아이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걸 걱정하셨지만 동네 친구들은 얼뜨고 굼뜬 나를 "깍두기"로라도 끼워주었다. 아버지는 남들과 다른 나를 그냥 '독특한' 아이로 인정해주셨다. 그러나 동네 골목보다 더 큰 세계인 학교에서는 남과 다른, 늦된 아이를 다 이해해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교련 시간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는 구급법 등 간호 교육뿐 아니라 제식훈련도 받았다. 키대로 서서 로봇처럼 줄을 맞춰 걷는 제식훈련 때마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어야 하는지 되묻다가 자주 멍해졌고, 그러다 교련 선생님한테 걸려 송충이들이 우글거리는 나무 아래서 엎드려뻗쳐를 하기 일쑤였다. 30초 안에 붕대를 감아야 하는 구급법 시험 때는 번번이 낙오자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출발선과 도착선이 딱 정해져 있고 일등, 이등, 꼴등을 가리는 백 미터 달리기가 너무 싫었다. 특히 선착순 달리기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탈락에 대한 긴장감, 어쩌다 겨우 탈락을 면해도 다른 친구가 낙오자가 되는 걸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선착순 달리기를 할 때 내가 선택한 방법은 차라리 걷는 거였다. 나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지만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어딘가 모자라는 아이였을 게 틀림없다.


군대 문제에 대한 우리 안의 이중 잣대

그래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알게 된 뒤 질문을 던져보았다. 내가 남자였다면 군대에 가서 견뎌낼 수 있었을까? 평화적 신념과 상관없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나는 좋게 생각해야 고문관이 되었을 거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는 군대에 안 가려고 꼼수를 부리는 사람들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소한 병역을 당당하게 거부하려면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 명분이 명확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배우나 연예인들의 병역기피에 대한 과도한 분노나 비판을 거북해 하면서도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당당한 거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저항하는 평화>를 읽으며 나 역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경식 선생과 이용석 씨의 대담과 정희진 선생, 샤샤, 이길준 씨의 대담은 내 안의 이중성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저항하는 평화>는 이제까지 출판되었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책과 다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청년, 징병제, 종교, 젠더, 국민국가, 교육, 비폭력 운동, 트라우마를 가지고 대담을 하며, 서로 돌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서로 차이를 좁히고 서로 인식을 확장시켜간다. <저항하는 평화>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주제로 한 책 중에서 내게 가장 많은 고민과 문제의식을 갖게 해준 책이다.

지난 1월 31일, 제주 강정마을에서 다시 한 번 행정대집행이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SNS로 전운이 감도는 강정마을의 풍경과 소식이 전해졌다. 당장 강정마을로 달려갈 수 없다는 죄책감과 안타까움에 다른 일을 하면서도 자꾸만 스마트폰으로 손이 갔다. 사진으로 보이는 해군과 용역들의 당당한 진압 모습, 2011년과 2012년 가을에 강정마을에서 벌어졌던 폭력 진압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겨우 수십 명밖에 안 되는 주민들을 진압하겠다고 수백 명의 병력과 용역을 동원해 전투를 하듯 몰려오는 모습에서 대추리의 '여명의 황새울 작전'도 되살아났다. 그날 밤, 강우일 주교님의 중재로 망루에서 버티던 강정마을 회장님과 활동가들이 내려오기는 했다지만, 대추리와 강정마을로 이어지는 10년간, 우리는 전시가 아닌 전시를 살고 있다.

군대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적군과 싸우는 집단이다. 그렇다면 강정에 작전명령을 받고 동원된 해군들은 강정마을 주민들을 주적으로 보고 투입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해하는 주민들을 몰아내기 위해 투입된 것일까?

<저항하는 평화>를 읽고 난 뒤, 8년 동안 계속된 해군기지 반대 운동이 어쩌면 애초부터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싸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군기지 반대 싸움은 단지 한 정권에 맞선 싸움이 아니었다.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 아래서 출발한 계획일지 모르나 해군을 포함한 군대의 몸집 키우기, 기득권 넓히기에 더 큰 목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군사 전문가 김종대 씨와 평화운동가 임재성 씨의 대담은 군대에 대해 내가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좁은 나라에서 군만을 위한 입법, 사법, 행정이 따로 있다는 것 자체가 헌법과 불일치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나니 내가 낸 세금이 더 아까워졌다. 군대를 당장 없앨 수 없는 현실에서, 국가 법 제도를 정상으로 되돌려 군대가 행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게 하는 운동이나 세금 거부 운동을 하는 것도 평화운동의 한 부분이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간의 선의를 믿는다. 인간은 타인을 향해 함부로 총부리를 겨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 이제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은 폭력과 탐욕에 무릎 꿇고 노예가 되거나 스스로 폭력과 탐욕이 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몇몇 인간들 때문에 인간 전체를 불신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개인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지만 아직 곳곳에서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공동체들이 이 사회를 바꿔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피해자, 약자의 심정으로 세상을 본다. 구순구개열 때문에 군대에 가지 못해 친구들 앞에서 늘 떳떳하지 못했던 청년의 입장에서, 보육 시설에서 자라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의 아들'이라는 놀림을 당해야 하는 청년의 입장에서, 가족 부양을 미루고 군대에 가며 꺼이꺼이 울던 가난한 청년의 입장에서, 장애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성격장애를 안은 채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비극적인 청년의 입장에서 군대를, 국가를, 세상을 본다. 그러면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가 보인다. 그러다 보면 분노와 무력감도 따라오지만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다. 서경식 선생의 말처럼 이 사회를, 서로 모르는 사람, 타자들이 평화롭게 가기 위해 서로 합의하며 폭력을 억제하고, 소통과 연대를 확장해 나가는 곳으로 바꿔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평화에게 기회를"(2008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기념 '병역거부권을 위한 평화 놀이' 행사, 2008년 5월 17일 서울 인사동 북인사마당). ⓒ연합뉴스


<저항하는 평화>가 불러온 '왜'라는 질문

어렸을 때 인천에 있는 할머니 댁에 오면 같이 어울리는 한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다. 4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언니가 내게 비밀 이야기를 해준다며 우리만의 아지트로 데려갔다.

"어젯밤에 우리 삼촌 집에 왔었어. 그래서 밤에 조기구이랑 맛있는 밥 먹었어. 지금도 트림을 하면 조기 냄새가 올라와서 엄청 좋아."

가난했던 언니가 오랜만에 조기구이를 먹었다는 소식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언니의 삼촌이 한밤중에 온 게 왜 비밀이 되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우리 삼촌은 원래 군인이었어. 근데 군대에서 도망쳐 나와서 숨어 다녀."

군대에서 도망쳤다는 말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왜?"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묻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비밀이 나를 설레게 했다. 언니는 날마다 삼촌이 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었다. 하루는 만화 가게에 가서 삼촌이 볼 만화를 같이 고르고, 삼촌이 좋아한다는 아폴로 꼬치어묵을 사러 신포동까지 가기도 했다. 며칠 뒤, 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우리 삼촌 이제 갔어."
"어디로?"
"몰라, 그냥 숨어 다니는 거지. 우리 아버지가 부자면 돈이라도 많이 줄 텐데 (…). 우리 삼촌 불쌍해. 우리 삼촌 원래 엄청 착해. 우리 엄마가 그랬어.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사람이라구. 그래서 군대에서 도망친 거라고. 우리 삼촌은 나무로 조각도 잘하고 노래도 잘한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부터 그 삼촌을 주인공으로 상상 놀이를 했다. 갑자기 군대를 탈영한 이유가 적군을 향해 총을 쏘지 못해 도망쳤다고 상상하고는 그 삼촌이 전국을 떠도는 것을 상상했다. 내 상상 속에서 언니네 삼촌은 남몰래 선행을 하는 천사가 되고, 기찻길과 시장 골목에서 추격을 당하는 도망자가 되기도 하고, 떠돌이 음악가가 되기도 했다. 자라면서 그 상상 놀이는 다른 상상 놀이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2003∼2004년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폭력을 소재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그 삼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에 샤샤와 정희진 선생의 대담을 읽다가 문득 그 삼촌이 다시 떠올랐다. 그 삼촌은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왜 군대를 나왔는지 말하지 않은 채 평생을 쫓기며 살았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할 때다. 더 늦기 전에. 평화를 위한 저항과 탈주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우리의 삶을 바꾸는 첫걸음이다. 혹은 저항과 탈주는 평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저항과 평화는 약자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저항은 멈출 수 없으며 끈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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