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등불'을 인용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일본 식민통치에 신음하던 조선 민족에게 보낸 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이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는 시의 구절을 인용하며 연설을 시작한 그는 쌍용자동차의 베스트셀러인 '코란도'를 언급하며 발언을 마쳤다.
"쌍용차 직원들의 근면과 헌신에 비춰볼 때 타고르의 예언이 쌍용차에서 실현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코란도(KORANDO)'의 이름에 담겨 있는 비전, '한국인은 할 수 있다(KOREAN CAN DO)'는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신차 '티볼리' 출시를 맞아 한국을 찾은 쌍용차의 모기업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의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이 13일 신차 발표회에서 한 연설이다.
'동방의 등불'부터 시작해 '코란도'까지, 한국과 한국 노동자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은 그는 마힌드라그룹에 대한 '먹튀 자본' 논란 속에 한껏 자세를 낮춘 모습이었다.
"왜 한국에서 사업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한국은 '희망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티볼리' 화려한 출발 뒤, 26켤레 낡은 신발들
그가 언급한 '희망의 등불'을 위한 축가가 울려퍼질 때, 신차 행사장 밖은 정반대의 풍경이었다. 낡은 신발 26켤레가 행사장 밖 보안 요원들의 '감시' 속에 가지런히 놓였다. 2009년 정리해고 이후, 주인을 잃어버린 신발들이다. (☞관련 기사 : 티볼리 발표장 밖 26켤레 신발…"사라진 주인을 아시나요?")
해고자들은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발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인도의 속담을 언급했다. 그리고 마힌드라 회장을 향해 그 주인없는 신발들을 봐 달라고 했다.
'희망의 등불'은 공장 밖 해고자들에겐 켜지지 않았다. 마힌드라 회장은 자신의 첫 번째 임무가 "4800명의 쌍용차 임직원의 미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안에 해고 노동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세련되고 화려했던 신차 행사장에서, 그 누구도 2009년 정리해고된, 지금은 70미터 굴뚝 위에 있는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취재진의 질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힌드라 회장은 신차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던 해고자 복직 문제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자 "해고자 복직보다 수익 창출이 우선"이라며 "티볼리가 선전하고 쌍용차가 흑자로 돌아서면 순차적으로 인력을 충원할 것이고 그 인력은 2009년 해고자들 중에 뽑게 될 것"이라고 했다.
'흑자 전환 뒤 복직'이란 말은, 결국 판매량이 늘지 않으면 해고자 복직도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2009년 정리해고 이후 26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 중 14명이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내가 아파트에서 투신한 후, 남편도 통장 잔고 4만 원과 카드빚 150만 원, 두 아이를 남긴 채 뒤를 따랐다.
지금도 평택공장 안 70미터 굴뚝 위에선 두 명의 해고자가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춰 달라"며 32일째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들에게 마힌드라 회장이 지켜준다는 '내일'은, '오늘'이 아닌 이상 끝도 없는 기다림일 뿐이다. 회사의 약속을 믿고 77일의 파업을 접었고, 정치권의 국정조사 약속을 또 한 번 믿고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약속 자체에 대한 전사회적 망각 뿐이었다.
2009년 2646명에 대한 정리해고 당시, 3만5000여 대로 떨어졌던 쌍용차의 총 판매량은 2014년 약 14만대까지 늘었다. 수천여 명의 노동자를 잘라낸 끝에 회사는 빠르게 정상화됐지만, 해고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갈 시간은 유독 더디게 흘러간다.
해고자 문제로 '무료 광고 효과' 누린 쌍용차…또 약속 어기나
쌍용차는 4년 만에 새로 선보이는 신차 '티볼리'의 성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쌍용차의 '티볼리' 뿐만 아니라 르노삼성의 'SM5노바' 현대차의 신형 '아반떼', 기아차의 신형 '스포티지'와 'K5', 한국GM의 신형 '스파크'와 '임팔라' 등 2015년 초입부터 자동차 업계의 신차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다.
이들 중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티볼리였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과 국내에 보기드문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란 신차 자체의 강점도 있지만, 쌍용차 해고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의 호소가 '티볼리'가 입길에 오른 주역이었다.
가수 이효리 씨를 비롯해 많은 시민들이 "티볼리가 잘 팔려 해고자들이 꼭 복직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했고, 이효리 씨는 무료 광고 모델을 할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쌍용차는 이 씨가 공식적으로 제안을 해오지 않았고 광고 촬영도 이미 마쳤다며 사실상 그 제안을 거부했다.
신차 출시도 전에 이들의 호소로 '무료 광고 효과'를 톡톡히 누린 쌍용차가, 이젠 "티볼리가 잘 돼야 해고자들을 복직시킬 수 있다"고 한다.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기원하는 소비자들에게, '해고자 복직을 원한다면 당신이 티볼리를 구입하세요'라고 웃으며 협박하는 격이다.
마힌드라 회장은 지난 2013년 11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법적인 결과에만 의지하지 않고 신뢰 형성이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내년 말까지 해고자 복직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었다.
그의 이 말은 해고자들에게 신차 티볼리가 출시될 즈음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의 근거가 됐다. 신차 생산으로 인한 인력 충원이 있을 것이란 기대도 컸다. 하지만 그가 약속한 시기가 지나자, 다시 회사는 "티볼리가 잘 돼야 복직시킬 수 있다"며 기약없는 기다림을 강요한다.
마힌드라 회장은 티볼리 출시를 '생존의 기회(Chance of Survival)'라고 표현했다. 티볼리에 거는 기대감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티볼리가 쌍용차 부활의 신호탄이 되길 원한다면, '내일'이 아닌 '지금' 해고자 복직에 대해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26켤레의 주인없는 신발을 움켜쥔 해고자들을 끌어 안았을 때, 마힌드라 회장이 언급한 '코란도의 신화'도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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