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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예수 요청 빼닮은 죽은 자의 부탁, 외면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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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예수 요청 빼닮은 죽은 자의 부탁, 외면할 건가

[프레시안 books] 김진호 외 <사회적 영성>

용산, 평택, 강정, 밀양, 그리고 팽목항까지. 이제는 단순 지명을 넘어선 이 단어들이 상징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과 스러져 간 사람들을 떠올릴 때면 만성적인 우울감이 내 몸을 짓누른다. 사람들이 자꾸만 죽어 나가는 틈에서 나는 꽤나 살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생업의 스트레스를 토로하고, 또 한편으론 따뜻한 음식을 입에 넣으며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일상을 유지하면서. 문득 나라는 인간에 대해 되묻기를 반복한다.

'편든다는 취지로 벼랑 끝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희망버스를 타고, 응원한다며 푼돈 좀 보탰다한들 그저 업무일 뿐이거나, 혹은 마음의 짐을 덜고 일상을 살아내기 위한 그저 자위적 행위가 아닌가.' '피부 너머 그들에게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려도 나는 여전히 나고, 그들은 그들인가.' 마음 속 물음은 이내 소리 없는 말이 되어 다시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을 천천히 기어 다니며 몸을 훑는다. '그런데 엄동설한에 그보다 혹독한 추위를 향해 굴뚝 위로 오르는 이의 몸은…?'

어쩌면 어느 누가 더 높은 굴뚝으로 오른다 해도 소용없을지 모르는 세상.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말, 나에게는 가당치도 않다.
사회적 영성의 회복, 가능한 삶을 향한 시작

ⓒ현암사
그대로 해만 바뀌었다. 새해 계획을 묻는 질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뭐가 다르다고 어제 묻지 않던 계획을 새해라고 묻느냐'고 반문했다. 퉁명스러웠다. 그렇게 맞이한 새해, 올해 첫 책으로 <사회적 영성>(현암사, 2014년 11월 펴냄)을 펼치며 자못 반가움을 느낀다. 까칠함이 누그러들고 다시 찾아오는 물음, '어쩌면 내 몸을 훑던 소리 없는 물음, 다른 이들의 것과 더불어 겹치고 모이면 고통 너머의 사회적 기억이 될 수도 있을까.'

신학자, 목사, 문화학자, 시인, 사회학자 등 비평가 14인의 글모음. 책은 이웃과 나 자신을 향해 점점 더 포위망을 좁히며 총구를 들이대는, 딱 침몰하기 직전인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뚜렷하게 짚는다. 가슴이 아려오고, 더 절망스러워지기까지 한다. 그 절망에 대응할 방법을 몰라 당황하는 우리에게 이 책은 그런데, 체제가 망각시키려는 진실을 떠올려준다. 지금의 사회 질서에서 곧 위험이라 여겨지는, 그러나 우리에게는 죽음의 사회에서의 동아줄과 같은 '가능한 삶'에 대하여 말이다. 그 삶은 바로 사회적 영성을 회복하는 데서 출발한단다. 그 출발은 우리가 주문처럼 외우던 '기억'을 정말로 어떻게 해야 망각과 싸워 이길 수 있겠냐는 물음의 답을 찾는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이 사건을 통해 불현듯 깨달은,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에만 가능해지는 말이 된다. 주문처럼 외울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번 세월호 사건의 특이함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기억의 자각이 다른 재난 때와는 달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삶을 잃어버렸는지를 기억하는 방식을 택했다. (엄기호 <고통, 말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기>)

그동안 배타적 생존을 향한, '나의 ∼'로 시작하여 여전히 '나의 ∼'로 끝나는 개인적 영성에 찌들어 산 우리에게는 그 실마리 부여잡는 일조차 사실 쉽지 않다. 몇 번 실패를 거쳐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가능할까. 사고 후의 골든타임처럼 아슬아슬하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 그래도 시작해야 한다. 찬찬히 생각해보자. 떠올려보자. (세월호 사고를 참사로 이끈) 언론과 정부가 이제 그만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국가의 순탄한 작동에 기여하라고 선동할 때 마음이 동하지 않던 이유, 한국 사회가 만성적 우울감에 빠져드는 이유. 뒤늦은 자각이지만 나와 수많은 너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였다. 그들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었으니, 죽은 채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던 것이다. 적자생존의 늪에서 강제 동면시켜 놓았던 사회적 영성, '나'들 사이를 잇는 고리는 이 자각으로부터 긴 잠을 서서히 깨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적 명령이라 할 수 있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반윤리에 정면으로 맞서 '남을 돌보려는 마음'이 바로 사회적 영성의 바탕이다. 이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아파하는 실천적 노력을 통해 '타자되기'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이를 테면 '나는 너다, 함께 살자'는 구호가 함축하고 있는 '서로 돌보는 삶'에 다름 아니다. (황진미 <세월호 국면에서 나타난 사회적 영성>)

영성, 교회를 벗어나 본래의 자리로

따지고 보면 영성(靈性)이라는 말은 다분히 종교적인, 특히 그 말을 유통하고 거의 주인처럼 사용해온 교회의 냄새를 풍기는 언어다. 그 맥락에서 영성을 풀어 써보면 하늘의 성품, 즉 교회의 하늘인 하나님의 성품, 그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으로 세상에서 나와 타자화되어 죽임 당한 예수의 성품을 의미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말했고, '그렇담 누가 내 이웃이냐' 묻는 어느 율법 교사의 질문에는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 되어 주라 답했던 예수의 성품 말이다. (그의 죽음이 정치적 사건이었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값이었든) 결국 죽음으로 몰린 예수의 성품 말이다. 그러니 영적인 삶을 살라 가르치고, 영성 수련을 위해 때마다 기도회와 수양회를 열었던 교회는 마땅히 우리 사회의 강도 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었어야 했고, 그러다가 스스로 강도 만난 자 되어 마침내는 죽음도 불사했어야 했다. "사회적 영성이란 사랑, 치유, 희생, 구원 등 도구적 이성의 사용을 뛰어넘는 종교적인 덕성이 교회 밖으로 널리 퍼져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라는 황진미 씨의 말은 그대로 현실이었어야 했다. 헌데 그렇지 못했다. 강도 만난 이웃을 의도적으로 착각하는 모양새로 기세등등하게 살아 있는 제도 속 교회는 본디 사회적인 영성을 사적 이익의 영역으로 축소·왜곡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는 지금, 구조를 기다리는 강도 만난 자들 옆에 강도와, 강도와 손잡은 교회가 우글거리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앞날개의 본문 발췌 글이 밝히듯 기독교 영성을 교회적 영성에서 (사회적) 영성이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이기도 하다.

신학적으로 '영성'은 타자화된 자, '속하지 못한 자'에게 품는 배려의 감정이고, 그런 이들과 친밀함과 지지 감정을 나누며, 그러한 공감의 감정에 기반을 둔 모든 실천들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한데 이 영성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의 형상 해체를 시사하는 신학적 기호다. 즉 영성은 신학적 개념인 동시에 탈신학, 반신학의 개념이다. 교회를 넘어서서 기독교를 넘어서서 타자 되기의 감성, 그러한 사회적 실천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영성'을 이야기하는 신학, 아니 반/탈신학은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해 있다. 영성의 의미를 독점해온 교회로부터 영성을 수거하는 것이 그 하나고, 이 영성을 세상에 돌려주는 것, 특히 세상 속에서 타자 되기를 향한 감정과 그에 기반을 둔 실천에 이 이름을 부여해주는 것이 다른 하나다. (김진호 <격노 사회와 '사회적 영성'>)

왜곡된 채로 상투어가 된 언어를 복원하는 일은 얼마나 힘겨운가. 하물며 그 시작이라니. 그런데 혹여 그 상투화에 자신조차 기여할까 두려운 마음을 무릅쓰고 이 힘겨운 작업에 동참한 한 영성 신학자의 상상력이, 각개전투로 기억 투쟁을 벌이다 어느덧 절망감으로 빠져드는 우리에게 폭탄 맞은 듯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필자가 다시 묻는 사회적 영성은 예수 죽음 이후 그의 시체가 사라진 빈 무덤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빈 무덤 사건 이후 그 사건과 삶이 닿아 있던 자들의 진리 선포 방식을 더듬는 일로, 고통의 사건을 기억하는 가장 나약하지만 강력한 방법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반복되는 역사, 우리가 돌이켜 배워야 하는 진실은 역시 과거에 있다. 그러고 보니 본디 기억이라는 가장 연약해 보이는 고전적인 방식이 제일 끈질긴 것이다. 결국 그런 기억들의 모임은 사회적 영성이 되어 영원히 지속 가능한 사건으로 우리 안에서 영생함이 불변의 진리였다.


예수가 기억된 방식, 지배 이데올로기의 제도에 포섭되지 않는 법

필자가 영성의 질문을 시작하는 빈 무덤 사건은 이렇다. 예수의 빈 무덤은 동료였던 제자들에게는 당황스러움이자, 어쩌면 그의 죽음 앞에서 자신들에게 돌아올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망쳤던 그들에게 공포이기도 했다. 제자들은 무력했고, 망각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무덤에서 사라진 예수는 당대 가장 흔한 이름을 가진 막달라 마리아라는 비천한 신분의 여성에게 가장 먼저 자신의 부활을 보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소문내라고 청했다. 뒤이어 제자들 앞에도 나타난 예수는 동일하게, 소문을 퍼뜨리라고 말한다. 제자들은 예수 부활이라는 기막힌 사건을 각자 받아들인 후에 흩어져서, 예수와 동거하며 배운 도와 그의 부활까지 퍼뜨리기 시작했다. (관련 기사 : 예수 '텅 빈 무덤'에 담긴 핏빛 그리스도교의 비밀)

부활의 사실 여부를 떠나 중요한 것은 그의 사후 2000년 역사 속에서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이 실존한다는 것이다. 세계사적 사건에도 기록되지 않은 어느 힘없는 나라 빈민촌에서 난 목수 청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사람들 속에서 구전되며 기억되어 수세기를 살고 있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다. 그러니 앞서 필자가 더듬은 예수가 기억된 방식은 현재 한국 사회, 비천한 자들이 이름도 없이 매분 매시 스러져 가는 고통과 죽음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기억 방식과 다름 아니다. 비천한 자들은 죽음을 공유하는 산 자의 무리 안에서 부활했고, 그 무리가 가지각색 방식의 게릴라전으로 펼치는 기억 투쟁, 곧 사회적 영성은 아슬아슬할망정 혁명적이다. "사회적 영성의 역할은 기억이 포섭되기 이전에, 균일화하기 이전에 표현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제도에 포섭되지 않고, 정치인들과 선동가들의 상투적인 수사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으며, 가장 혁명적이고 무한 부활이 가능하다. 그래서였나보다. 청와대를 향한 죽음 기억자들의 행진이 짓밟힌 이유, 지배 이데올로기 집단이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사회적 영성. 여전히 희망이 있다.

생각해보면 국가 주도의 기억으로 끝나는 문제 해결은 곧 개인들의 망각을 부르는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져, 지배자에게 용이한 대로 국가적 기억을 다시 훼손할 틈새를 노린다. 책의 저자들 대부분이 이 모순적인 필연을 전제하는 것 같다. 이미 공식적으로는 정리된 문제로 치부되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국가적 학살만 놓고 보아도, 떠밀려서 기억의 주체가 된 가해자 국가는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간 사이에 언론과 손잡고 다시 그 기억을 조작할 틈을 호시탐탐 노린다. 게다가 그날의 살인마는 법의 심판을 받은(?) 후 해마다 권력자들의 새해 인사까지 받으며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한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은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역시 사회적 영성과 반하는 제도적 영성, 잊으라(가만히 있으라)는 말이다.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수많은 나와 너의 기억이다.

필자는 간구한다. 부활한 예수의 청과 똑 닮은 "기억해달라"는 죽은 자들의 부탁을 성취하려면, 마침내 죽음 사회와 단절을 고할 수 있도록 하려면, 그 기억 부탁을 가슴으로 받아서 흩어진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말이다.

"기억해달라", "잊지 말아 달라" 이 소박하지만 간절한 부탁을 오늘 세월호의 현장에서 우리는 다시 듣고 있다. 이 부탁이 향하고 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보길 바란다. 끈질기게 모여들 사람들을. 교회, 교리, 이념, 정치, 법, 제도, 체제가 아니라 사람들을. 망각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로서로 기억을 지탱해주는 사람들을. 기억에서 의미를 찾고 변화를 만들려는 사람들을. 그리하여 언젠가, 머지않은 내일, 우리는 세월호가 잃어버린 생명들을 끔찍한 참사의 희생자들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하는 세상을 열어준 영웅들로 기억하기를 바란다. (조민아 <무덤에서 사라지다, 그리고 함께 돌아오다>)

작년 크리스마스 서울 명동 거리에 퍼진 낙서처럼 '나라 꼴이 엉망이다.' 그리고 교회 꼴은 더 말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 나와 너는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도 없어서 그저 함께 고통스럽다. 그런데 함께 고통스러운 게 맞단다. 함께 아프고 함께 기쁜 것이 곧 사회적 영성으로 들어가는 공감이라는 문이란다. 그러니 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고통 공유자들의 속으로 자꾸만 들어가자. 세월호 이후에야 뒤늦게 시작한 나와 너의 벽을 희미하게 만들기를 계속하자. 그게 나와 너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국가로부터 소외된 민중들의 방식이자, 가능한 삶의 방식일 것이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과거로 회귀할지언정 이루었던 진보의 바탕이 바로 그런 애환이자 삶이 아니었나. 나는 네 속에 너는 내 속에 그렇게 우리로 거하면서, 슬프다가도 어느새 웃고 떠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또다시 절망할지언정, 계속 사회적 영성으로 들어가자. 두 번 다시 배타적 개인이라는 감옥 속으로 사라져버리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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