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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보, 스타만 있고 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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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보, 스타만 있고 팀은 없다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33> 민주 진보 진영 스타들이여, 박박 기어라

몇 년 전 한 스포츠 칼럼에서 본 얘기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구단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스타플레이어라도 패배에 익숙한 팀 소속이면 스카우트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지는 게 습관이 된 팀은 승리에 대한 집념이 약할 것이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팀 승리보다는 개인 성적이나 신경 쓰는 이기적인 선수가 되기 쉽다는 판단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한국 프로야구 하위권을 맴돌던 한화 이글스 출신 류현진 선수를 거액에 스카우트한 것을 보면 그 칼럼이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내가 작년 하반기에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시사와 연관된 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그 말을 떠올린 것도 일리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진보'라고 불리는 진영의 일부 '스타플레이어'들이 그 말에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진보라는 개념이 하도 고무줄이다 보니 그냥 반정부 세력을 뭉뚱그리는 '민주 진보 진영'이라고 하자. 이 진영은 최근 10년 가까이 패배를 밥 먹듯이 해 왔는데도 대중의 인기를 얻는 '스타플레이어'는 여당 쪽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데 그들이 야구 선수이고 내가 우승(정권 창출)을 목표로 하는 구단주라면, 그들 가운데 스카우트하고 싶은 선수는 하나도 없다. 좋아하는 선수가 없는 게 아니라 목표를 충족시켜 줄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

야구를 그리 즐기지 않는데다 지역 연고를 중시하는 프로야구의 성격상 야구 불모지 강원도 출신인 나는 딱히 응원하는 팀도 없었다. 그런데 새해 들어 한화 이글스가 강원도도 연고지로 삼고 춘천에서 몇 차례 경기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꼴찌 전문 팀에 조금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하위권 팀을 끌어올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김성근 감독도 시야에 들어왔다. 예전에 그가 현역에 있을 때는 그를 좋게 말하는 기사를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여론이 완전히 돌아서서 그를 높이 평가하는 기사로 스포츠 면이 도배되더니, 그가 한화 감독을 맡자 이 꼴찌 팀에 관한 기사가 거의 한국 시리즈 급으로 취급되는 게 아닌가? 영화 <명량> 열풍이 보여 준 것처럼 바야흐로 사람들이 영웅을 찾고 영웅을 만들어 내는 시대인가 보다.

김성근 감독에게 특별한 호오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적 관심에 따라 한화 관련 기사들을 보다 보니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김태균, 정근우 같은 대단한 스타플레이어들이 2진급 선수들과 똑같이 땅을 박박 기고 '펑고'(수비 연습을 위해 배트로 공을 쳐주는 것) 훈련을 하고 숨이 멎을 정도로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속내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들도 팀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숨을 헐떡이며 인터뷰를 하곤 했다. 그러자 정말 새해에는 한화가 달라질 것 같다는 예측 기사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 훈련장에 함께 선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과 선수. ⓒ한화 이글스 홈페이지


지는 게 습관이 된 팀, 개인 성적만 신경 쓰는 스타는 곤란하다

언제인가 프레시안에도 썼는데, 현대 한국 사회가 진보해 온 역정을 보면 '스타플레이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이름 없는 '팀'인 국민이 늘 기적 같은 성과를 이룩하곤 했다. (해당 기사 바로 가기) 지금은 정반대다. 생각나는 대로 이름만 열거해도 정치권의 박원순, 문재인, 안철수, 정동영, 심상정, 노회찬, 언제라도 정치권과 연결될 수 있는 문화계의 유시민, 조국, 진중권 등등 그야말로 화려한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하다. 그들 각자에게는 웬만한 연예인 뺨치는 팬들이 있지만 팀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토로한 이야기지만 이런 스타플레이어들을 보유하고도 민주 진보 진영이 집권할 날은 요원해 보인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진단이 이미 제출되어 있지만 거기다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팀은 꼴찌를 헤매도 스타플레이어들은 먹고살 수 있는, 그것도 아주 잘 먹고살 수 있는 구조가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주나 진보의 논리가 상품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수나 진보나 이미 다 합의가 되어 있는 것처럼 기정사실화된 한국 자본주의의 규범적 틀 안에서 그러한 논리의 다양한 변주들이 아주 잘 연주되고 있고,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아주 잘 유도하고 있다.

예컨대 연말 정국을 들썩이게 했던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한다. 1987년의 산물인 헌재가 1987년의 정신을 위배했다고. 박근혜 정권이 국민들 사이에 합의된 민주주의의 틀을 깨고 유신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남북한의 체제 대결이 판가름 난 지가 언제고 한국인의 시민 의식이 얼마나 성숙했는데 그까짓 '일탈' 세력 하나 포용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공안 정국을 유도하느냐고 준엄한 성토가 이어진다. 이번 결정에 이르게 된 통합진보당 사태와 이석기의 '일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시대가 달라진 것을 모르고 1980년대식 투쟁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고 매몰차게 비난을 퍼붓는다.

한마디로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낸 1987년 체제의 규범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되는데 양극단의 반민주적 무리들이 자꾸만 반칙을 하니 문제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국민이 한 팀이 되어 성취해낸 6월항쟁의 성과에 조금이라도 금이 갈까 봐 보수적으로 한계를 설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드센 우익 세력에게 작은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이런저런 '극단'을 배제하며 자기 검열을 해 온 것이 민주 진보 진영의 지난 30년이었다. 그러다 보니 1987년 이전에 비해서는 넓어진 정치적, 문화적 공간에서 달변과 세련된 논리로 무장한 스타플레이어는 양산되어 왔으나, 정작 그 팀은 차 떼고 포 뗀 채 맨몸으로 전장에 내몰린 형국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 민주 진보 진영을 돌아보라. '민중'이라는 말만 써도 북한과 연관시켜 국민 자격을 박탈해 버릴 기세의 공안 세력 앞에서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무기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안으로는 4.19혁명과 6월항쟁, 밖으로는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을 비롯한 숱한 승리의 기억이 있고 그때마다 쌓여 온 무기들이 있건만, 그것들을 섣불리 낡은 시대의 것으로 규정하고 무기고에 쳐 넣은 채 봉인해 버린 것은 아닐까? 역사 속에서 이미 검증된 방법과 경험은 무시하고 자꾸만 새로운 것 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레닌이나 마오쩌둥이 아니라 그 어떤 천재가 살아 돌아와도 승리와는 인연을 맺지 못할 것이다.

민주 진보 진영 스타들이여, 민중 속으로 들어가 박박 기어라

그러면 민주 진보 진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쓸데없이 말만 많고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스타플레이어들을 모조리 팔아 치우고 다시 시작해야 할까? 프로야구에서는 트레이드를 하면 현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이 키워낸 스타플레이어들이 반대 진영으로 넘어갈 때 민중에게 떡고물이라도 생기는 경우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쌓아온 이름값만큼이나 엄청난 피해를 민중에게 안기곤 했다.

민주 진보 진영에는 앞서 언급한 스타들이 필요하다. 개인의 면면을 볼 때 나는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이 나름대로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들이 지난해 한화 이글스의 김태균, 정근우 같은 존재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는다. 결론은 그들도 지난겨울의 김태균과 정근우처럼 '박박 기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는 먹고살아가기도 어렵고 희망도 보이지 않는 팀의 구성원들과 함께 땅바닥을 기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야 한다. 그렇게 함께 고생을 해 봐야 비로소 개인 성적이 아닌 팀의 우승을 위한 방법도 생각이 나고 비전도 떠오르지 않겠는가?

통합진보당 해산의 파장으로 더욱 입지가 좁아진 진보 진영 일각에서 새로운 정당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연말연시의 포털 윗머리를 장식했다. 거기에도 정동영이라는 스타플레이어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의 명성과 관록이야 익히 들은 바 있지만 어쨌든 그도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좀 박박 기다 나왔으면 좋겠다. 그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건 수사(修辭)가 아니다. 정말로 중국 문화대혁명 때의 시진핑처럼 황토 굴 같은 곳에 가서 '인민'과 함께 뒹굴라는 이야기다. 보통 '하방'이라 불리곤 하는 문화대혁명 때의 상산하향은 강요된 것이 문제였지 자발적으로 하겠다면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는가?

4.19혁명과 6월항쟁을 이뤄낸 것은 국민이었지만 그 과실은 일부 정치인과 기득권층에 돌아갔다는 분석이 많다. 국민의 성과를 보존하려면 강력한 지도자와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지도자, 정치 세력은 지금과 같은 스타플레이어 체제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팀으로 '박박' 기다 보면 지금의 스타플레이어 중에서, 또는 밑바닥에서 올라온 전혀 새로운 인물들 중에서 팀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올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작년이 갑오년이고 올해가 을미년, 내년이 병신년이다. 120년 전 그때 민중들 사이에서 불리던 노래가 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올 을미년에는 국민들이 나서서 현재 이름값 좀 하는 지도자, 지식인들을 끌어내려 호되게 담금질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나는 올 한 해 한화 이글스가 김태균, 정근우를 '박박' 기게 해서 얼마나 성과를 내는지 지켜볼 예정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보고 싶은 것은 민주 진보 진영의 내로라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이 '팀' 속으로 들어가 함께 '박박' 기면서 팀과 함께 거듭나는 모습이다.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역사에 비추어 오늘을 살피는 기획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의 의미를 새겨 보았으나 새해부터는 현대 한국 사회의 현안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되새겨 볼 예정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16> 부활하는 일제 망령…해법은 동학농민군 계승

<17> 박근혜·남재준, '푸에블로호 교훈' 잊었나

<18> 일본인들이여, 러일전쟁의 진실을 기억하라

<19> 166년 전 문서, 현대 한국의 비밀을 말하다

<20> 이것은 3.1운동이 갈구한 나라가 아니다

<21> 여성의 날,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생각한다

<22> FTA 경제 영토 3위? 기황후가 기가 막혀

<23> 추신수 둘러싼 '가증스런 피라미드'에 대한 단상

<24> 대한민국이 한 4.3 사과, 미국은 왜 안 하나

<25> 중국·베트남에 건넬 건 '한류'만이 아니다

<26> 영웅 없는 한국 현대사, 그럼에도 위대한 이유

<27> 표류하는 세월호 진실…'탁 치니 억' 떠오르는 이유

<28> '총기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한 역사학

<29> 제일 먼저 도망친 '거짓말' 대통령이 구국 영웅?

<30> '명량' 이순신 지도력? 여당도 야당도 자격 없다

<31> 미국보다 중국 섬기는 게 낫다? 위험한 착각

<32> 근현대사 축소? 아이들 발목 잡자는 '물귀신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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