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도비 얼마를 안 준다고 협박이 들어오니까…. 감사를 해서 뭐가 잡힌 것도 아니고 명분도 없는데 회장님이 관둘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광부(문화체육관광부)에서 자꾸 그 지랄을 하니까, 청와대 지시 사항이라 그러고…."
지난 3월 말 김 모 강원도 승마협회장에게 강원도 체육회 간부가 한 말이다. <프레시안>은 최근 '비선 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 씨와 승마협회에 관한 취재 도중 이 같은 내용의 녹음 파일을 입수했다.
대화에선 김 회장이 "정권 잡아서 이렇게 하는 건 정말 큰 문제야"라면서 "월급 받는 사람들이니 어쩔 수 없겠지"라고 답답해하는 대목도 있고, 체육회 간부가 "흥분하지 마시고요…. 체육회도 상부에 얘기하는데 저쪽에서 자꾸 이렇게 나오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대체 승마협회 안에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역 체육회 간부와 지역 협회장 대화에서 ‘청와대와 문체부 지시 사항’이란 표현까지 등장하게 된 것일까. 판정 시비가 일었던 지난해 4월 경북 상주 승마대회에서 굉장히 이례적으로 경찰까지 나서 협회를 조사했던 일과 무관할까.
정윤회 '비선 실세' 설 속 떠오른 승마협회…승마협회에선 무슨 일이?
승마협회와 정윤회 씨를 둘러싼 이 법석 한가운데에는 국가대표 승마선수인 정 모(18) 씨와 승마협회 박 모 (64) 전 전무가 있다. 정 씨는 정윤회 씨와 고(故) 최태민 목사의 딸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씨 사이의 외동딸이고, 박 전 전무는 최근 승마협회 관련 보도에서 '정윤회 측근'으로 설명되고 있다.
박 전 전무와 정윤회 씨 일가의 인연은 2000년대 초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서울승마훈련장 원장을 맡고 있던 박 전 전무가 초등학생인 정 씨에게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아들인 김동선 승마선수의 코치였던 서 모 씨를 소개해주며 정 씨 주변을 맴돌 수 있게 됐단 얘기다.
박 전 전무는 한때 협회 예산 8700만 원을 횡령해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년 6개월의 실형을 마치고 2010년 출소한 박 전 전무는 '부정을 저지른 관계자는 10년 간 활동을 금지한다'는 2008년 승마협회 대의원총회 의결에도, 지난해 승마 심사위원으로 무사히 복귀해 승마협회 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승마협회 '쑥대밭' 만든 4월 경기…누가 경찰을 움직였나
그리고 문제의 4월 '상주 대회’가 열린다. 지난해 4월 9일부터 엿새 동안 열린 KRA(한국마사회컵) 전국승마대회는 2014 인천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출전권을 얻기 위해선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만 하는 중요한 경기였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딸 정 씨는 마장마술 종목에 출전해 준우승에 그친다.
이후 곧바로 이 경기에 대한 심판 판정 특혜 의혹이 일었다. 심판위원장이자 경북승마협회인 고위 간부가 정 씨의 라이벌이자 당시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김 모 선수를 위해 종목 채점과 마방 배정에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었다.
놀라운 점은 시비가 협회 차원의 이의 제기나 체육회 차원의 조사가 아닌 경찰 조사로 신속하게 연결됐다는 점이다. 상주경찰서는 경기 이튿날 해당 심판위원장을 불러 조사를 벌였고 이후엔 심판진을 두 차례나 대대적으로 조사해 체육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를 두고 한 체육계 인사는 "김연아 선수가 판정 시비를 제기하면 빙상연맹이 나서지 인터폴이 나서지는 않지 않느냐"면서 "경찰을 움직이게 하려면 문체부로는 안 된다. 그 보다 큰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경찰 조사 이후 해당 심판위원장은 직에서 사퇴한다.
승마협회에 대한 정윤회 씨의 영향력을 지난 4월 일찍이 문제 삼은 새정치민주연합 안민석 의원 측은 "경찰은 민원이 들어와 진행한 내사일 뿐이고 말하며 관련 자료를 내놓고 있지 않다"며 "그러나 내사 자료도 규정상 2년은 남아 있어야 한다. 청문회나 국정조사를 통해 경찰조사의 경위를 반드시 밝혀야 하는 이유"라고 주장했다.
"청문회 통해 승마협회 좌지우지한 '검은 손' 밝혀내야"
승마협회를 둘러싼 국가기관 차원의 조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같은 해 5월 박 전 전무는 문체부 진 모 체육과장의 요청으로 이른바 '살생부(사진 참조)'를 작성했다. 진 전 과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수첩을 펼치며 '나쁜 사람'이라고 지목해 경질된 노 모 전 체육국장과 함께 지난해 9월 경질된 공무원이다.
현재까지는 진 전 과장이 박 전 전무를 찾아가 '승마협회의 문제점을 설명해 달라'고 했고, 박 전 전무가 협회 내 인사 몇 명의 이름과 직책을 자필로 작성해 전해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 안 의원 측은 박 전 전무가 지난 4월 "의원실을 찾아와 살생부를 작성해 문체부에 전달했다고 시인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문체부 차원의 승마협회 조사 뒤에는 청와대의 지시가 있었다고도 보도된 바 있다. 지난 2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문체부 관계자는 "승마협회에 문제가 많으니 조사하라는 (청와대) 지시가 내려왔다"며 "문체부에서는 '청와대가 이런 것까지 시키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사를 진행한 진 전 과장은 박 전 전무의 말만을 듣지 않았다. 박 전 전무의 반대 세력 이야기도 두루 청취한 후 양쪽에 다 문제가 있으니 "모두 정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 그리고 이후 진 전 과장과 노 전 국장은 각각 한국예술종합학교 총무과장과 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장으로 좌천됐다. (☞ 관련 기사 : "박근혜, 정윤회 편 안든 문체부 직원 경질")
이 같은 좌천이 박근혜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폭로도 나와 논란이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과 문체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박 대통령은 유 전 장관을 8월 말 청와대 집무실로 불러 진 전 과장과 노 전 국장의 이름을 콕 집어 거론한 후 "나쁜 사람이더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5일 "문체부 국·과장 경질은 체육계 비리 적폐 해소 과정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으나, 대통령이 나서 한 부처의 국·과장급 공무원에 대한 인사를 직접 지시하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이전까지는 "국·과장 인사는 장관의 고유 권한"이라고 했던 문체부 해명과도 배치된다.
정윤회는 승마협회를, 박근혜는 문체부를…정윤회 딸은 국가대표를
이렇게 경찰, 문체부, 그리고 심지어 청와대까지 나선 승마협회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결과는 그럼 무엇이었을까. 지난해 12월 문체부는 승마협회를 비롯한 체육단체에 대한 121일 간의 특별감사를 마무리했고 올해 1월 김종 문체부 차관은 10개 체육단체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를 보면, 문체부는 337건의 비리 정황을 포착하고 대한배구협회, 대한야구협회 등 10개 단체를 수사 의뢰했다. 승마협회에 대해선 수사 의뢰나 고발 조치를 하지 않았으나 17개 시도승마협회가 혈연, 지연, 사제 관계로 얽혀 몇 지역 협회장의 장기 재임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문제 삼아진 지역 협회장들은 박 전 전무가 살생부에 적은 이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강원도 체육회 간부가 '청와대 지시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전한 강원도협회장은 물론, 올해 1~3월 돌연 자진 사퇴를 선택한 전남승마협회장과 전북승마협회장도 포함돼 있다.
이렇게 '反 박 전 전무' 세력이 승마협회장 직에서 줄줄 사퇴하거나 사퇴 압력을 받는 사이 정 씨의 딸은 국가대표로 선정되는 등 승승장구를 이어간다. 안 의원 측은 정 씨가 지난 6월 마장마술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위를 거두며 선수권을 따낸 것과 관련해 "실수가 잦았는데도 고득점을 받았고 타 선수의 이의 제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정 씨는 얼마 전 2015년도 이화여대 체육특기전형 신입생으로 합격했다. 인천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점을 인정받으면서다. 이와 관련, 새정치연합 유기홍 의원은 "정윤회 씨 딸이 말 타는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단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정 씨의 딸이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정윤회 씨는 승마협회를, 박 대통령은 문체부 인사를 좌지우지했단 논란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모양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