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뒤틀린 한일 관계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지속된다.
서중석 : 1963년 민정 이양을 할 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3.16 군정 연장 성명을 일본 측에서 지지하고 나왔다고 하지 않았나. 일본 측의 이 사람들은 전두환 신군부 집권에도, 광주항쟁 진압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한일 관계에서 잘못된 유착은 1979년으로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놀랍게도 10.26이 난 직후인 1979년 10월 28일, 나중에 전두환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되는 '3허'(허삼수, 허화평, 허문도) 중 한 명인 허문도 당시 주일 한국 대사관 수석 공보관이 주한 일본 대사 스노베 료조를 만났는데, 여기서 허문도는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가 열린다"고 이야기했다. 12.12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이걸 모른 걸로 돼 있는데, 신군부는 스노베 료조에게 쿠데타에 대해 사전 통보하고 일본의 협력을 구했다. 그러니까 전두환 신군부가 정말 믿었던 것도 일본이었던 것이다. 믿을 수 있는 건 일본 극우 세력만이라고 보고 이렇게 협력을 구한 것이다.
또 일본 측에서 1979년 12월부터 1980년 5월 10일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신군부에 정보를 준 걸로 돼 있다. 대부분은 '북한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남침하려 한다'고 하면서 정보 출처로 주일 중국 대사관 같은 걸 대고, 그러면서 '일본의 정보 기관인 내각조사실 같은 권위 있는 쪽으로 전달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마치 사실처럼 꾸몄다. 전부 허위 조작한 것인데도 그랬다.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는 데 이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했다.
제일 중요한 정보는 1980년 5월 10일 일본 내각조사실 한반도 담당 반장 에비스 겐이치의 정보였다. 여기서 정보를 줬다는 것이다. 한국 상황에 대해 결정적 시기라고 판단한 북한이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남침하기로 결정했고, 당시 유고슬라비아를 방문 중이던 김일성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남침 계획을 의논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전두환은 5월 12일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정국 안정을 위한 강도 높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존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한테 특수 부대 이동의 정당성과 계엄 확대, 철저한 통제 조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내가 알기로는 5월 14일을 전후해 학생들이 대거 나온 것도 이 남침설과 관련 있다. 이 무렵 학생 운동 지도자들이 있는 곳에 남침설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거 큰일 났다'고 다 피신했는데, 그다음 날 봤더니 그게 거짓말인 걸 알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 하나 때문만은 아니고 다른 요인도 있었는데, 하여튼 그런저런 이유로 문제가 발생하면서 학생들이 대거 교문을 박차고 나온다.
그런데 이건 신군부가 기다렸던 것이다. 이 무렵 군이 이동하지 않나. 이것(군대의 사전 이동)은 또 미국이 양해해준 것이다. 미국이 (일본 측이 신군부에 건넨) 이런 정보를 믿고 양보해줬겠나? 그건 말도 안 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서로 속자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 아니겠나. 어쨌건 5.17쿠데타는 이제 피할 수 없는 게 됐다. 5.17쿠데타 계획은 이미 다 세워놓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신군부가 실권을 다 장악하는 5.17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에비스 겐이치 정보에 대해, 일본 첩보 당국이 중국에 흘린 정보가 중국으로부터 역정보로 일본에 되돌아와 신빙성 있는 중국 정보로 포장돼 한국 측에 전달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본에서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일본은 광주항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5월 20일 마에다 도시카즈를 특명 전권 대사로 한국에 파견했다. 마에다 도시카즈는 최규하 대통령은 만나지도 않고 광주 무력 진압 다음 날인 5월 28일 전두환과 회담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측의 신군부 지원 문제는 2000년 박선원 연세대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제기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당시 박 연구교수는 스노베 료조를 비롯한 관련 인물들의 증언과 녹취록을 함께 공개했다. 이 내용이 공개되자 스노베 료조는 10.26 직후 허문도를 여러 차례 만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로 일관했다. '편집자')
거짓 정보를 거듭 전한 일본, 5.17쿠데타에 이를 활용한 신군부
프레시안 : 전두환 신군부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도 일본 측은 힘을 실어준다.
서중석 : 1980년 5월 이후에도 세지마 류조를 비롯한 일본의 막후 실력자들이 비공식 특사로 방문해 전두환 신군부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지마 류조와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게 되는 고토 노보루, 이 두 사람이 1980년 6월과 8월에 방한했다. 두 번째 방한했을 때 고토 노보루가 전두환한테 올림픽이나 박람회를 개최할 것을 조언했다. 이건 세지마 류조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서울올림픽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올림픽을 열려고 나고야 시에서 이미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 일본의 배후의 강자들이 올림픽 개최를 추진하라고 전두환 정권에 이야기한 것이다.
또 고토 노보루가 나고야 쪽한테 '한국의 올림픽 개최 입후보에 반대하면 안 된다'고 상당히 권고한 것으로 나와 있다. (고토 노보루는 이때 나고야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나고야가 아닌 서울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편집자')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일본 극우들이 자기 나라 올림픽을 사실상 포기하라고까지 한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납득이 안 가는데, 그만큼 일본 극우들이 무서운 존재 아닌가. 만주 인맥을 중심으로 한 이런 사람들이 참 무서운 사람들 아닌가. 이 사람들이 구상한 것이 궁극에 가서는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통합이고, 그것에 한국의 군부 정권처럼 유용한 정권은 있을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올림픽까지 포기하도록 그렇게 자기 나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 아니겠는가. 참 무서운 일이다.
전두환 정권이 초기에, 박정희 정권 말기의 경제난에다가 농업 문제도 겹치고 해서 아주 심한 고통을 받지 않나. 물가도 한없이 올라간다. (1980년 한국 경제 성장률은 -5.2퍼센트였다. 마이너스 성장은 1952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편집자') 이때 구세주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전두환 정권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게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이 40억 달러를 융자해준 것이었다. 그 이전에 일본에서 받아온 돈을 생각하면 40억 달러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한 것 아니겠나. 전두환 신군부만이 일본의 이익을 잘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유명한 막후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다. 세지마 류조는 일제 군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장기간 소련에 억류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의 회고록이 1995년에 발간되면서 여러 가지가 밝혀졌다. 그중 하나는 40억 달러를 제공할 때도 세지마 류조가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로부터 경제 협력에 관한 양국 협상 내용을 들은 세지마 류조는 한국에 와서 권익현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엔 차관 18억5000만 달러, 수출입은행 융자 21억 5000만 달러, 합치면 40억 달러인데 이것을 7년 기간에 금리 6퍼센트로 해서 한국에 제공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이것이 전두환 정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한국 경제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세지마 류조는 일본군 대본영과 관동군에서 참모로 활동했다. 1945년 패전 후 소련군의 포로가 돼 11년간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1956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일본 정계의 흑막으로서 한일 관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2년에 이뤄진 40억 달러 융자 협상과 관련, 세지마 류조는 협상 후 자국 총리의 서한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했고 그것이 이듬해인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전격 방한으로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편집자')
전두환 정권의 올림픽 유치에 힘을 실어준 일본 극우
프레시안 :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85년 8월 15일, 패전 후 처음으로 현직 총리로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한 인물이다.
서중석 :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어떤 사람이냐. 방위청 장관도 지낸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총리에서 물러난 후 도쿄 재판에 대해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단적으로 이야기했다. "A급 전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범죄인이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이렇게 말했다. 이건 고다마 요시오나 기시 노부스케만 포함하는 게 아니라 도조 히데키(1941년 미국을 공격할 당시 일본 총리)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린 일본 전범을 제대로 처단하지 않는 걸 문제 삼는데, 이 사람은 이런 발언을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이 문제 발언을 한 때는 2005년 6월 26일이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도쿄 재판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고 자국 전범들을 비호하는 발언이 거듭 나왔다.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은 일본 국내에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발언 전날에는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도쿄 재판 당시 A급 전범을 비롯한 피고 전원이 무죄라고 주장한 인도인 판사의 비석 제막식이 열렸다. 비석 건립을 지원한 측은 "역사에 대한 자학적 풍조 등의 근원은 도쿄 재판에 있으므로 그 문제성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발언 이틀 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지하는 자민당 국회의원 모임이 발족했다. '편집자')
이 사람은 1982년에 총리가 되는데,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 교과서의 외국 관련 서술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게 바로 그해다. 일본 문부성이 3.1운동을 폭동 같은 것으로 기술하라고 검정 지시를 내리고, 중국 침략에 대해서도 침략이 아니라 진출로 표시하라고 했다. 그런 표현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 싶은데,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교과서 파동이 일어나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게 된다. 항의가 거세니까 문부성은 유명한 근린 조항(역사 서술에서 주변 아시아 국가를 배려한다는 내용)을 검정 기준에 추가했다. 그렇지만 이게 최근에 와서는 완전히 폐기됐다고 보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 들어서는 한국이나 중국을 고려해가면서 교과서를 기술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987년 독립기념관이 개관한다. 그런데 독립기념관 건립은 교과서 파동으로 강렬한 반일 운동이 일어나니까 전두환 신군부가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한 조치와 관련이 있었다. 사실 독립기념관은 진작 만들어졌어야 하는 건데, 이때 공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준공을 앞두고 1986년에 큰불이 났다. 그래서 개관이 늦어졌다. 독립기념관은 지금 대단히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일협정과 뒤틀린 한일 관계의 교훈 되새길 때
프레시안 : 일본의 막후 실력자들과 연관된 문제는 노태우 정권 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중석 : 노태우 정권이 출범할 때도 일본 측과 긴밀한 관련을 맺었다. 세지마 류조 회고록을 보면 노 대통령 당선 후 단독으로 만나, 대통령 선거는 문제가 많으니 헌법을 개정해 내각 책임제를 추진할 것을 조언했다고 한다. 이 사람 회고에는 흥미로운 내용도 있다. 노 대통령이 일본의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일본어로 부르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노 대통령도 친일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우선 노 대통령이 1990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천황이 "통석(痛惜)의 염"이라는 말로 한일 간의 어려운 문제에 대답했는데, 이게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통석의 염"이라는 게 대등한 국가끼리 쓸 수 있는 말이냐, 그게 무슨 과거사 반성이냐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한자에서 통석의 어원을 볼 때 그렇다는 지적을 당시 많이 받았다. 논쟁이 많이 됐다. (통석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말로, 당시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낯선 단어였다. 그 의미를 두고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사죄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이 발언을 의미 깊게 평가한다고 밝혔다. '편집자')
노 대통령이 재임 당시 일본 연극인과 한 인터뷰 내용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한 마찰, 한국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잡지 <문예춘추>(1993년 3월호)에 게재됐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두 나라가 대립할 때에는 더 큰 나라가 여유를 보임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 약한 사람일수록 큰소리를 치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비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립이 생겨 커질 때는 더 큰 나라, 더 여유가 있는 나라가 양보하는 것이 서로 요령 있게 문제를 푸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그런 여유를 보인다면 한국민은 감격을 잘하는 만큼 대단히 감사하며 진정한 우정으로 응할 것이다. (…) 일본과의 사이에는 과거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으나, 동시에 나는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특히 일본인이 갖고 있는 미덕인 '의리와 인정'은 나에게 큰 좌우명이 돼왔다." 이러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것이 한국인들을 분노케 했다. 어떻게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일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에 들어서는 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부터라고 지적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에 취임하는데, 1961년부터 1993년까지 얼마나 긴 세월인가. 그 긴 세월 동안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정말 불행했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도 그 불행은 계속되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이 저런 극단적인 짓을 함으로써 그 불행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은 한일 회담, 한일협정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 잘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오늘날 어떻게 귀담아들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상당히 등한시하는 점이 많이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