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에 북한 대표가 판문점에서 "서울 불바다"발언을 한 이후 6월에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하기로 했다. 이미 주한미군에 1000명 정도의 전쟁기획 장교가 증파되어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김영삼 대통령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연합사령관 게리 럭 대장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북한을 폭격하기로 한 결정을 통보받았으나 그 결정 내용에 대해 한국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당시 연합사 작전참모 프랭크스 소장은 클린턴 행정부의 전쟁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게리 럭의 지시를 받아 전쟁을 기획하면서 한국군 장교들에게 "만일 반대하는 장교가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서슬이 퍼런 전쟁 분위기에 당시 한미연합사부사령관인 장성(육사 18기) 대장도 속수무책이었다.
이 당시 한국군의 걱정은 영변을 포격을 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을 할 것이며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가장 위협적인 것은 북한의 장사정포인데, 갱도 안에 있는 장사정포를 무력화하려면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북한 장사정포 중 170미리 포는 거리가 걸어서 우리 포가 미치지 못하고 갱도 진지나 산의 뒤쪽에 있는 포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그러니 일일이 특수부대가 가서 제압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개전 초 2~3일 이내에 우리 군사력의 37%가 손실되고 서울에서 100만 명 이상 사망한다는 것이 우리 측 결론이었다.
그런데 게리 럭이나 프랭크스는 이런 한국군의 걱정을 무시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랜턴 장비를 부착한 미 7공군사령부의 F-16을 동원해서 북한 장사정포를 제압하는 방안이다. 당시 7공군에서는 27대의 F-16이 배치되어 있었다. 장성 부사령관과 당시 3군사령관인 윤용남(육사 19기) 대장이 이 방안을 "관철하라"고 당시 연합사 지상구성군 선임 장교로 가 있던 정경영(육사 33기)에게 지시했다.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것을 미국에 설득하지 못하면 서울 시민은 집단학살 된다.
작전회의에서 정 중령은 미 공군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걸 열다섯 번 주장했다. 그러나 무시당했다. 미국은 오로지 영변 핵 시설만 폭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연합사에서는 7공군사령부와 타격 표적(pre-ITO)을 협의하기 위해 전투협조반(BCE)을 운영했고 그 반장이 커밍스 대령으로 정 중령의 직속상관이었다. 북한의 표적으로 결정하기 전에 7공군이 연합사와 협의하는 절차가 당시 미 7공군사령부 부사령관(준장)이 위원장으로 있는 연합표적처리위원회(CTB : Combat Targetting Board)다. 이 회의에서 또 정 중령이 "연합사령부의 중요 임무는 수도권 방어"라는 점을 환기시키며 "7공군이 그 방어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자 커밍스 대령이 중 중령의 목을 잡고 "조용히 해"라고 소리쳤다. 정 중령이 "한 말씀만 더"라고 사정하며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이 주장을 들은 7공군은 경악했다. 저공비행으로 방공망이 조밀한 북한 장사정포를 타격할 경우 그 생존확률은 50%에 불과하다는 것. 이 때문에 7공군이 "절대로 못한다"며 아우성치기 시작했고 커밍스 대령은 다시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날 저녁 "7공군사령부가 난리 났다"는 보고를 받은 프랭크스 장군이 자정쯤에 용산 연합사령관 공관(힐탑)으로 들어갔다가 새벽 4시경에 나왔다. 그 직후 커밍스 대령이 연합사 벙커로 들어오면서 다짜고짜 의자를 발로 찼다. 그리고 정 중령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정 중령 임마(son of bitch)! 너의 명령이 받아들여졌다(your order accepted)"며 그 뒤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놈은 반드시 한국군으로 돌려보내겠다, 연합사에서 꺼지라"고 했다.
서울 인근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이에 대해 우리 의견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통사정하는 한국군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호통 치는 미군 고위 장교. 모두가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점에 한국 정부는 미국의 일방적인 행동을 제지할 능력과 의지가 상실되고 오직 미군 고위 장성들 간의 합리적 결정을 구하며 사정하는 존재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