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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축소? 아이들 발목 잡자는 '물귀신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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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근현대사 축소? 아이들 발목 잡자는 '물귀신 작전'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32> 근현대사 교육 축소 주장, 위험하기 짝이 없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대한민국사>를 썼을 때 뒤통수를 가볍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니 이 나라의 역사는 대한민국사라고 하는 게 맞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대한민국사'에 해당하는 말을 '한국 현대사'라고 불렀다. 이 말은 고대사와 중세사를 모두 '한국사'로 볼 때 성립한다. 그런데 '한국'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로 본다면 그 나라에는 고대와 중세가 없다. 고조선, 부여, 삼국 등 여러 나라의 역사인 고대사와 고려, 조선의 역사인 중세사는 '한국사'라기보다는 '한국의 전사(前史)'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고중세사를 포함하는 '한국사'라고 할 때 그것은 한국과 한국인을 형성하고 성장시켜 온 모든 것에 관련된 역사라는 뜻이 될 것이다. '중국사'가 흔히 '25사(史)'라고 불리는 방대한 왕조들과 그 이전의 역사를 다 포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지 명, 청이 아니고 한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지 고려, 조선이 아니다. 그 이전의 역사는 모두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 기억되고 발굴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중세는 현대의 '선사시대'일 뿐이다.

최근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근현대사의 비중을 30퍼센트까지 줄일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는 가운데 한 교육부 관계자가 "반만년 역사 가운데 150년에 불과한 근현대사 비중이 교과서 절반이나 되는 것은 너무 과하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자기가 무슨 1500년 동안 살다가 산신령이 되었다는 단군왕검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나 1000년쯤 전의 고려시대나 같은 비중으로 다가오는지 모르나, 하루하루가 절실한 한국인 모두 대한민국이 어떤 세계에서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게 지난 반만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 양반 식으로 따지자면, 지구는 은하계의 미미한 일부일 뿐인데 왜 지구의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교육을 한단 말인가? 지구보다 안드로메다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가르치거나 최소한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누가 아직도 우리 역사를 반만년 역사라고 하는가? 한국사 교과서는 이미 7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구석기시대부터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 양반이 말하는 '과하지 않은 한국사 서술'에서 '반만년 역사'가 차지할 공간은 한 페이지를 넘을 수 있겠는가?

그가 했다는 말을 하나 더 인용해 보자. "이념 논쟁이 치열한 근현대사는 후대에 평가해 가르치는 것이 맞는다는 역사학계와 교육 현장의 요구가 많다."

정말로 이렇게 말했다면 그는 교육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우선 '이념 논쟁'이란 말이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교육 현장에서 이념은 이미 오른쪽으로 확 기운 지 오래기 때문이다. '논쟁'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논쟁의 성격이 무엇이든 그것이 치열하게 벌어진다는 것은 교육의 견지에서 바람직하고 북돋울 일이지 왜 부정적으로 볼 일인가?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확실히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조건 아닌가? 아이들이 논쟁 한복판에 뛰어들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교정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왜 걷어차려 하는가?

혹시 아직 어린 청소년들은 논쟁을 통해 올바른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어른들에 의해 이미 내려진 '안전한' 결론만을 주입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럴 리는 없다. 그가 박사라면, 또는 석사라면, 아니 학사라 하더라도, 교육학개론에 거듭 나오는 '창의적 교육'이란 말의 함의를 모를 리 없다. 그냥 솔직히 말하라. 현재 근현대사의 논쟁 구도는 너무도 단순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아이들이라면 어떤 결론으로 기울지 뻔하기 때문 아닌가? 그리고 그 결론이 당신의, 또는 당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자들의 이해관계와 배치되기 때문 아닌가?

후대에 평가해 가르치자는 말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근현대사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요소들이 형성되고 전개되어온 역사를 말한다. 그것을 지금 분석하고 평가하지 않고 어떻게 현재 이후의 삶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후대에 지금의 역사를 평가할 사람들은 바로 지금 이 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알아야 할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자신들로부터 절실한 앎의 기회를 앗아간 당신에 대해 수십 년 후 어떤 평가를 내릴 거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그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그들의 호된 평가를 안 들어도 되리라는 점일 뿐이리라. 사실 그걸 노리고 현재의 곤란을 일단 넘어가고 보자는 속셈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 광화문 교보문고 교과서 코너에 꽂혀 있는 한국사 교과서들. ⓒ연합뉴스


근현대사 교육 축소 주장의 위험한 속내

근현대사가 후대에 가서야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고중세사는 이미 객관적 평가의 거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흔히들 하는 말을 빌려 근현대사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역사'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잣대를 가지고 근현대의 여러 사건, 여러 인물을 포폄할 수 있다. 그런데 100여 년 전만 해도 세상은 거꾸로 서 있었다. 민주주의가 절대 가치이기는커녕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거나 위험천만한 것으로 치부되던 가치였다. 시장경제는 조선 왕조가 도학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그리도 억누르고자 애쓰던 대상이었다. 이렇게 물구나무선 시대, 그것도 줄잡아 2000년 넘게 물구나무서 있던 시대의 역사이건만, '미래의 주인공'인 아이들에게 쉽게 가르쳐도 될 만큼 이미 평가가 완료되어 있다고? 도대체 누군가? 1500년 넘게 산 단군 할아버지처럼 그리도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청소년 대상으로 역사책을 만들곤 하는 필자의 가장 큰 고민은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의 그 '미래'를 내가 알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할 거라는 사실이다. 이건 사실 모든 부모와 스승의 고민이다. 어른들은 자기가 살아온 과거와 현재의 몇 가지 경향만 보고 아이들의 장래를 판단하려 한다. 이런 직종이 좋다고 해서 아이를 그쪽으로 밀어 넣으면 아이가 다 클 무렵엔 저런 직종이 뜬다. 부모가 된 그 아이는 자기 자식을 그 방향으로 밀고, 자식이 클 무렵엔 또 다른 유형의 삶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렇게 실용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 모든 교육자의 비극은 그가 피교육자의 미래를 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옛날에는 달랐다. 교육의 목표가 되는 이상사회가 먼 과거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과거를 산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그 과거를 가르치면 되었다.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대동(大同)을 보라. 천하가 공(公)이라 외롭고 병든 자들이 모두 보살핌을 받는 유토피아가 아득한 과거에 있었으니, 조선시대까지는 그런 과거를 조금이라도 본받는 것이 현재와 미래를 사는 자의 의무였다. 그러니 조금 더 과거에 가까이 있는 스승은 그 그림자도 밟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근현대가 고중세와 다른 점 가운데 결정적인 것 한 가지는 바로 '대동'과 같은 이상사회를 과거로부터 끄집어내어 미래로 가져다 놓았다는 점이다. 그 미래가 공산주의든 개선된 자본주의든 사람들은 미래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살아 왔다. 그런 점에서 미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는 아이들은 모든 어른의 스승이다. 당신이 무언가 켕겨서 근현대사를 들여다보기 두렵다면 차라리 아이들에게 보고 판단해 달라고 하는 게 낫다. 미래에서 온 아이들은 별에서 왔다는 그 무슨 캐릭터보다 훨씬 더 영민해서 적당한 자료만 제공해 주면 역사의 진로에 대해 기막힌 비전을 보여 줄 것이다. 오늘의 교육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배운 어른들이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바로 그러한 비전의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고중세의 역사도 물론 중요하고 잘 가르쳐야 한다. 근현대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그 요람이 되는 고중세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현대사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들어가는 고중세의 역사란 박물학에 불과하다. 근현대사 교육을 축소하고 고중세사를 더 많이 가르치려는 교육계 일각의 움직임이 과거의 전도된 사고방식에 안주한 채 미래로 나아가려는 아이들의 발목을 잡는 '물귀신 작전'으로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노파심이 아닐 것이다.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16> 부활하는 일제 망령…해법은 동학농민군 계승

<17> 박근혜·남재준, '푸에블로호 교훈' 잊었나

<18> 일본인들이여, 러일전쟁의 진실을 기억하라

<19> 166년 전 문서, 현대 한국의 비밀을 말하다

<20> 이것은 3.1운동이 갈구한 나라가 아니다

<21> 여성의 날,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생각한다

<22> FTA 경제 영토 3위? 기황후가 기가 막혀

<23> 추신수 둘러싼 '가증스런 피라미드'에 대한 단상

<24> 대한민국이 한 4.3 사과, 미국은 왜 안 하나

<25> 중국·베트남에 건넬 건 '한류'만이 아니다

<26> 영웅 없는 한국 현대사, 그럼에도 위대한 이유

<27> 표류하는 세월호 진실…'탁 치니 억' 떠오르는 이유

<28> '총기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한 역사학

<29> 제일 먼저 도망친 '거짓말' 대통령이 구국 영웅?

<30> '명량' 이순신 지도력? 여당도 야당도 자격 없다

<31> 미국보다 중국 섬기는 게 낫다? 위험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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