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김형덕',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유로운 세계 일주를 꿈꿨다. 그러나 사상교육과 세뇌교육이 일상적인 북한은 꿈을 이루기에 가혹했다.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뿐 아니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느 나라 어떤 체제에서도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다.
김형덕 씨는 이 '마땅한 권리'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야 했다. 하지만 목숨 걸고 찾아온 동족의 나라는 그에게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그가 앞서 경험한 국가체제의 또 다른 얼굴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처음에는 기분도 나쁘고 혼란스러웠다. 북한에서 당 간부를 하다가 온 사람은 정착지원금이 일반 탈북자보다 10배는 많았다. 북한 이데올로기 기준으로 보면, 나는 북한 지배계급의 억압 대상이었다. 할아버지가 6.25 전쟁 때 국군에 봉사했었기 때문에 사실 난 치안대 가족이다. 그래서 북한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았다. 치안대는 북한에서 제일 싫어하는 적대계급이다. 그런데 남한 입장에서 주적이던 사람은 대접받고, 나 같은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다니 기분이 묘했다. 남북한 통합 과정에서도 이런 것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북한 인민들도 '통일을 왜 해?'라며 남한 체제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 간부가 다시 당 간부가 되는 세상, 그게 싫어서 북한을 빠져나온 것 아닌가. 북한에서 호의호식하며, 당 간부로 살았던 사람이 많다. 이들에게 남한은 정착금도 많이 주고, 출세까지 시켜 주더라. 이 사실에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가늠할 수 없는 갈등과 후회, 괴로움 속에서 그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 했고, 그 대가로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이 같은 혼돈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갔다. 2001년 국회에서 정책비서관으로서 탈북자를 위해 만들었던 정책 보고서가 2004년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로 법제화됐고, 지금은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에서 남북한 관계 발전과 평화통일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또 북한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리 분간 없이 '빨갱이' 이념 몰이를 반복하는 남한 체제의 고질병을 비판하며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북한이 '자본주의 황색바람'에 꼼짝 못한다면, 남한은 '종북'에 꼼짝 못한다. 하지만 '빨갱이' 따위는 없다. 이는 미개한 나라의 산물이다.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 1993년 스무 살에 탈북 했다. 탈북하기 전에 북한에서의 삶이 궁금하다.
난 북한체제와 그 기준에 맞게 입신(立身)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북한은 대학 졸업과 군대 제대 후 입당하는 것이 출세의 기본 조건이다. 하지만 출신성분을 이유로, 군 입대를 거절당했다. 결국 간 곳이 '속도전 청년돌격대'(速度戰 靑年突擊隊)다. 기분이 나빴다. 당시만 해도 북한은 장애가 있는 사람 빼고는 다 군대에 갔다. 군대에 못 가는 사람은 하자(瑕疵)가 있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위축된다. 그런데 돌격대에 가면 대학도 보내주고 입당도 시켜준다고 해서 갔다. 돌격대는 군사화된 조직으로 군대처럼 생활하면서 사회봉사, 도로와 항만, 경기장 등을 건설한다. 그런데 3년이 되던 해인 1993년 7월 1일 체포되어 1년형 확정 후 7월 2일 평안남도 증산군 사회안전성 산하 제11호 노동교양소(남한의 삼청교육대 격)에 투옥되었다가 1993년 8월 20일 탈옥했다. 북한 사회 특성상, 절도가 만연했다.
노동교양소에서 생각해보니, 나오면 또 돌격대로 갈 게 뻔하고 비전도 안 보였다. 그래서 탈옥해 남한으로 가자고 결심했다. 사실 돌격대 생활 2년 동안에도 내적으로 갈등하면서 아버지와도 자주 이야기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일관되게 '떠나라'고 했다. 하지만 부모형제를 떠나는 건 쉽지 않을뿐더러,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면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장남이라 성공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었다. 결국 스무 살이 되던 해 떠났다. 나중에 들었지만, 내가 떠난 뒤 아버지가 제일 기뻐했다고 한다.
- '북한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서 탈북을 결심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북한에서는 '우리 사회주의가 제일 좋다'는 사상교육을 세뇌 받았을 텐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서 제도권 교육과 다른 교육을 받았다. 보통 북한 사람들은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교육을 받는데, 나는 아버지에게 북한 체제는 소멸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과는 정 반대였는데, 이는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집안 내력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 계열에 조선민주당 출신이다. 해방 초기, 북한 노동당은 어떻게든 똑똑한 사람을 영입하려고 했다. 할아버지에게도 입당을 권유했지만, 기독교 신자로 이념이 맞지 않다며 여섯 번이나 거절했다. 결국 평생을 탄광에서 보냈다. 그렇다 보니, 우리 집안은 항상 체제에 저항적이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훈련받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주석이 집 밖에서는 '태양'이지만, 집안에서는 한줌도 안 되는 '강아지 새끼'였다.
아버지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 3년 동안 러시아에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니키타 후르시초프(1894~1971)의 등장으로, 스탈린 격하운동(탈(脫)스탈린 운동)이 진행됐다. 아버지가 그런걸 보고 왔으니, 김일성 주석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을 벗어나 있던 사람은 생각이 바뀌게 마련이다. 속된 말로 김일성 주석이 '허접'하게 보였던 거다. 소련은 공산당 서기장이 바뀌는 사회주의인데, 북한은 사회주의지만 집집마다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있는 왕조 국가니 말이다. 난 그런 극단적인 교육을 받았고 북한이 나쁘다는 걸 알았지만,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산 것이다.
특히 열네 살 이후로는 아버지가 나를 어른 대접해줬고, 당신과 같은 반열의 대화 상대로 대우했다. 나도 거기에 우쭐했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내가 아버지의 약점을 하나 잡았으니 여차하면 아버지를 고발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했다(웃음). 그러면 아버지는 "너 나를 고발하면 감옥에 가서 평생 고아 신세로 인간답게 못 산다"고 했다(웃음). 그런데 그 말이 맞다. 위아래 누나들은 장남인 내가 혹시 밖에서 실수라도 할 가봐 늘 걱정했다.
- 북한은 개인이 노력해서 꿈을 이루기가 거의 불가능한 사회다. 자유를 찾아 나섰을 때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이었나.
어렸을 때부터 자유를 꿈꿨다. 세계일주도 하며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북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남한에 있는 지금, 이 꿈을 실현한 것 같다. 미국을 벌써 한 바퀴 횡단했고, 중국은 두 바퀴를 돌았다. 이제 유럽과 아프리카만 가면 된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게 했다. 1960년대 '문학 자유화' 시절에는 일반 서점에서 다양한 자본주의 서적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4년 김정일 위원장이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고, 문화 분야에서 종파주의를 청산한 이후에는 책을 살 수가 없었다. 북한체제가 경직되기 전, 아버지는 스웨덴 책을 비롯해 <루팡과 홈스>, <마젤란>, <부활> 등 여러 책을 사뒀고, 집 창고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유럽 서적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즘과 자유·허무주의가 내재돼 있지만, 북한은 혁명관(革命觀)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실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미 내 속에 꽉 차 있었다. 그게 어느 순간 폭발해 다 버리고 북한을 떠나온 것이다.
- 1993년이면 탈북자가 거의 없던 초기였고, 또 탈북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편견과 차별도 많았을 것 같다. 탈북자 정착 지원 시스템도 없던 시기라, 지금보다 적응이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나?
아예 정착 지원 시스템이란 게 없었다. 당시 경찰들도 탈북자 법률 지원법을 몰라, 탈북자가 직접 보건복지부 찾아가 법률안을 살핀 후에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옛날에는 탈북자가 오면, 경찰은 감시 대상으로만 봤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난 대학을 가면 자동으로 취업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도 알아서 하는 거라고 하더라(웃음). 대학교를 한 달 정도 다닌 후에 알게 됐다.
사실 처음에는 기분도 나쁘고 혼란스러웠다. 북한에서 당 간부를 하다가 온 사람은 정착지원금이 일반 탈북자보다 10배는 많았다. 북한 이데올로기 기준으로 보면, 나는 북한 지배계급의 억압 대상이었다. 할아버지가 6.25 전쟁 때 국군에 봉사했었기 때문에 사실 난 치안대 가족이다. 그래서 북한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았다. 치안대는 북한에서 제일 싫어하는 적대계급이다. 그런데 남한 입장에서 주적이던 사람은 대접받고, 나 같은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다니 기분이 묘했다. 남북한 통합 과정에서도 이런 것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북한 인민들도 '통일을 왜 해?'라며 남한 체제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 간부가 다시 당 간부가 되는 세상? 그게 싫어서 북한을 빠져나온 것 아닌가. 북한에서 호의호식하며, 당 간부로 살았던 사람이 많다. 이들에게 남한은 정착금도 많이 주고, 출세까지 시켜 주더라. 이 사실에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난 남한에 오면 똑같은 환대를 받을 줄 알았다.
남한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공정의 문제'라고 본다. 일단 선택할 수 있는 출발선에는 같이 섰으나 다른 결과를 얻었다면, 이에 승복해야 한다. 그런데 공정하지 않으면, 승복하기가 어렵다. 그게 선진국이다. 그런데 공정하지가 않았다. 똑같이 왔는데 누구는 1억 원을 주고, 누구는 1000만 원만 줬다. 북한 노동당 간부를 하다 온 사람은 국가 기관에 들어가고, 아닌 사람은 일반 노동자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북한에 있을 때 나를 지배하던 자가 다시 한국에서 나를 지배하는 꼴이 된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본 사람들은 한국을 떠나게 되어있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다. 제공된 가치만큼 돈을 지불한다. 그러나 남북 관계에서는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 통일이 되면 당 간부가 아니라 인민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줘야 한다. 사실 그래도 불공평하다. 이런저런 갈등 끝에 방황하다 결국 이 사회에 적응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당시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 그들(노동당 간부)을 보면 바람에 나는 깃털처럼 어쩔 줄 몰라 보인다.
- 탈북자 최초로 국회의원 보좌관을 했다. 국회 일을 하면서 특별히 관심 있는 정책 분야가 있었나.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공채를 통해 민주당 김성호 의원 정책비서관으로 들어갔다. 북한에서 온 사람 중 최초였다. 남한 사람보다는 내가 북한 사람을 잘 안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북한 문제에는 자신 있었다. 2001년 우리가 만들었던 정책들이 2004년에 법제화돼 '북한 이탈 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반영됐다. 탈북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험이 없어 하루아침에 돈을 다 써버리는데, 이를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취업교육을 강화해 교육받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정착금을 분할 지급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냥 공짜로 주면, 탈북자 대부분이 거지가 된다. 북한 사람들은 원래 경쟁심 자체가 없다. 따라서 동정하듯 계속 지원해 주면, 단기적으로는 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난 북한 사람들이 불쌍한 계층이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 법을 바꾸자고 제안했고, 지금껏 보람으로 생각한다.
- 2005년에는 가족과 금강산을 방문했다. 고향땅을 합법적으로 밟았다는 이유만으로 감회가 남달랐을 텐데, 막상 금강산에서 탈북자 신분을 밝혔더니 '민족 반역자'라는 비난을 들었다고. 또 베이징 북한대사관에 직접 찾아가 북한 영사에게 고향 방문을 요청했다. 그대로 잡혀서 북송(北宋)될 수도 있었는데, 두렵지 않았나?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내가 죄를 짓고 도망 온 것도 아니라, 오히려 떳떳했다. 북한이 날 잡으려고 해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민족 반역자"라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에게 "남쪽도 같은 민족이더라"라고 응수했더니, 아무 말 못하더라. 북한 안전원(경찰) 앞에서 '김정일이야말로 xx다'라는 말도 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내가 한 말을 다른데 가서 이야기할 수 없다. 입에 그런 말을 담는 것 자체가 불경죄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전혀 무섭지 않더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북한에서 우리를 거절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거절한다고 해도, 그건 관철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 계속 요구할 것이다. 북한이 막는다면 아마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남한에서는 최소한 막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게 바로 인권 투쟁이다. 북한 정부가 부모형제를 못 만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드러나는 일 아닌가.
- 현재는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북한 연구를 계속하는 이유는?
북한을 연구한 이유는 단순하다. 탈북자라서가 아니다. 탈북자가 북한을 더 잘 안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탈북자들이 북한을 더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았던 지역, 그 반경이 경험의 전부다. 북한은 이동도 자유롭지 않아서 살던 곳밖에 모른다. 남한에서 대학 때 '로터리클럽' 장학금을 받았는데, 분기마다 한 번씩 북한에 대해 발표해야 했다. 그런데 한두 번 하니까 더 이상 얘기할 게 없었다. 내가 경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북한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북한학을 공부했다.
앞으로도 남북한 관계 발전과 평화통일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싶다. 지금은 언론에 기고도 하고 강연도 다니면서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참여하고 있다. 북한 문제를 자꾸 언론에 노출시켜야 한다. 민간단체가 대북전단(삐라)을 보내는 것도 그렇다. 대부분 북한 체제와 관련한 정치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대북전단을 보낼 거면, 차라리 남한의 생활정보를 담아 보내는 게 더 효과적이다. 사과나 화장품 세일 등 광고를 보내면, 호기심이 더 많이 생긴다. 외부에 대한 니즈(Needs, 욕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고상한척하지만 기본적으로 욕망의 동물이다. 한 번 자극받으면 추가적으로, 상상까지 하게 된다. 누구나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배타적이지만, 한번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호기심이 발동해 중독되기도 한다.
- 경색된 남북 관계에 있어, 정치적 잘못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한을 모두 경험한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북한이 '자본주의 황색바람'에 꼼짝 못한다면, 남한은 '종북'에 꼼짝 못한다. 하지만 '빨갱이' 따위는 없다. 이는 미개한 나라의 산물이다.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강대국의 지배 질서에 편승해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남북한이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남북한 모두 기본도 안 된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려서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 정치의 수준이 올라가야 하는데, 아직도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정치를 하니, 문제다. 그래서 난 정치에 관심이 없다. 그런 저급한 질서와 문화에 끼고 싶지 않다.
북한이 덜 근대적인 사회고, 개선이 필요한 사회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통일로 가려면,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 정죄(定罪)하듯 비판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장점을 보려고 노력해야 관계가 나아진다. 단점만 들추면 서로 원수가 된다. 특히 북한은 장점을 찾으려 해도 찾기 힘든데, 왜 자꾸 단점만 찾나. 북한이 가진 장점을 격려하고 활용해야 남한과의 관계가 가까워진다. 통합(통일)하려면 서로의 장점을 봐야 한다. 지금 결혼생활 15년째인데, 부부 간에도 나쁜 것만 보기 시작하면 같이 못 산다. 우리 민족은 장기적으로는 통합(통일)으로 가야 한다. 그게 길이다.
- 국민TV 미디어협동조합에사 라디오 <김형덕의 묘향산 전망대>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람 통일이 먼저다"라는 주제로 라디오 진행을 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북한 사람과 섞여 살다 보면, 자연스러워진다. 그러나 계층으로 갈리는 건 이해한다. 계층이 달라서 서로 만나지 않는 건 괜찮지만, 북한 사람이라고 기피할 필요는 없지 않나. 북한 사람도 장점이 많다. 삶을 통해서 또 행위를 통해서 자꾸 알리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감이 생긴다. 그렇지 않으면 이민족화(異民族化)된다.
- 박근혜 정부가 '통일 대박론'을 얘기하고 있지만, 남한의 젊은 세대 대부분이 통일에 무관심하다. 사회주의인 북한과 자본주의 남한, 두 체제를 모두 경험한 당사자로 통일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을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2년 차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북한을 붕괴시켜서 갑자기 통일하겠다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이건 무식한 이야기이다. 점진적 통일론이 맞다. 상호이익이 되는 방법을 찾아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현명한 방법이다. 급격한 통일은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크다. 예를 들어, 지금 남한은 독자적으로 구축해 온 노동시장이 있는데 북한이 갑자기 붕괴해 북한 인구 2000만 명 중에 500만 명 이상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365만 명으로 예측, 2012 한국일보) 남한 노동시장에 흡수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남한의 저임금 노동시장은 동남아시아 외국인 노동자가 담당하고 있고, 이미 포화 상태다. 여기에 북한 노동 인구까지 합쳐지면, 인건비 하락으로 자칫 노동시장이 붕괴할 수도 있다. 소수의 경영자는 좋겠지만, 필리핀처럼 극단적 양극화 사회가 될 수도 있다. 경제학적으로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
그럼 통일에 대한 대비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개성공단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개성공단을 북한 곳곳에 점진적으로 확대하면 된다. 북한 노동자 한 사람이 월평균 150달러 정도를 받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되는 것 아닌가. 개성공단 노동자 표정을 살펴보면, 남한에 살고 있는 탈북자보다 얼굴이 더 밝아 보인다. 그들이 행복하면서 남한도 이익을 보면 그게 좋은 것 아닌가. 그들이 갖고 있는 노동생산성과 자원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남한이 갖고 있는 기술력과 자본이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한미 FTA 체결 때 미국은 개성공단 제품을 '메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로 인정하지 않고, 역외가공 상품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아주 전략적이었다. 미국 시장에서 판매되는 물건의 90%는 '메이드인 차이나'(Made in China)다.
대체로 중국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는 미국 기업이 중국 생산직 노동자 한 명에게 지불하는 인건비는 월평균 500달러다. 한국 기업이 개성공단 근로자 한 명에게 지불하는 인건비는 월평균 120달러 수준이다. 북한과 경제협력만 잘하면 국제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제2의 제조업 전성기를 누릴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미국이 기를 쓰고 개성공단 제품을 '메이드 인 코리아'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 국제시장에서 각국 기업 간 상품 생산과 판매 경쟁은 총격전을 펼치는 전쟁보다 치열하다. 정치 지도자들이 속된 말로 '안전빵'인 양 미국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태도를 버리고 전략적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통일을 위한 인적·경제적 교류를 하는 것은 국토의 물리적 통일보다 경제적 이유에서 매우 중요하다. 1997년 김대중 정부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북 교류를 진행한 것은 남북이 의지만 있다면 어떤 나라도 남북 교류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미국과 러시아가 강력히 통제했던 패전 후 동·서 독일의 경우도 교류는 못 막았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겠다는데 어떻게 막겠나.
-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가 3만 명 정도다. 그런데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중 유럽이나 미국 등 제3국으로 다시 탈남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유가 뭔가.
사실 남북한 간에 정서적인 거리가 너무 크다. 40년 정도의 시대 차이가 있다. 북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보면 안 되겠지만, 반드시 시대 차이가 있다는 전제를 생각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 스스로는 본인들이 동등하다고 하는데, 그러려면 동등하게 대학도 들어가고 취업도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 동등하지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임대주택과 정착금을 주는 것이다.
북한은 삼대 세습을 하는 나라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삼대가 국가를 통치하는 나라는 지구 상에 미개한 나라 몇 개밖에 없다. 그런데 북한은 삼대 세습이 가능한 나라다. 그런 곳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남한에서 살면서 남한 사람들과 같은 대접을 받고 싶은데 못 받으니까 대안을 찾아 외부로 나가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심하다. 북한과의 합리적 교류가 해결되지 않고는 탈북자 문제 또한 어렵다. 정부 정책만으로 탈북자를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 북한에서 탈북자들을 회유해 다시 재입북을 유도하거나, 남한에 적응하지 못해 스스로 재입북하는 사례가 종종 뉴스에 나온다. 남한 탈북자 정착 지원 시스템 문제인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인 처방이 있고 근본적인 처방이 있다. 즉각적인 처방은 탈북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통해 남한에 정착시키는 게 맞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대북 정책을 전환해 북한의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이 북한 내에서 먹고살 만해 탈북자가 발생하지 않게 하면 된다. 탈북의 원인이 무엇인가. 탈북자 중 90% 이상이 경제적인 문제지, 북한 정치 체제에 불만을 갖고 탈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남한에 와보니, 북한 체제가 비민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탈북자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는 부족 경제 문제를 도와주면 된다.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특구를 추가로 만들어 북한 사람들이 일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나? 그런데 다들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북한 문제를 잘못 언급하면, 사상범(?)으로 몰리는 세월이니 오죽하겠나.
- 한 인터뷰에서 "경제 수준이 다르면 인권기준도 다르다. 나는 인권의 정치적 이용을 반대한다"고 했다. 현재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많아졌고, 이에 대한 정치권 갈등도 크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 스스로 자기들의 문제를 인식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인들도 보면 가정마다 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집만 봐도 딸들이 아빠한테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 나는 "그래, 아빠가 잘못했어"라며 받아들인다. 기본적으로 경험과 지적 수준은 다르지만, 동등한 인간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강제적으로 '우리가 우월하니까 우리 식대로 하라'는 건 폭력적이다. 예를 들어, 내 기준으로 "골프도 칠 줄 몰라?"라고 말하면 안 된다. 내가 골프를 친다고 다른 사람도 쳐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 인권 문제는 이렇게 조심스러운 것이다. 앞에다 대고 "인권 후진국이다"라고 공격하면, 상대방은 개선하기보다 반박하기에 급급해진다.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교류와 협력만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예를 들어 북한 교화소(남한의 교도소) 시설과 남한 교도소 기관 관계자가 서로 방문하며 대화하면, 아마 확 바뀔 것이다. 남한이 오는 비용 좀 대주면 된다.
2012년 제주 교도소로 강의를 갔었다. 재소자들이 먹는 음식이 얼마나 좋은지 밥도 잘 주고 운동 잘 시키고 깨끗하다. 북한보다 더 좋더라. 내가 거기서 이야기한 게 있다. "여러분은 여기 휴양 오신 거다. 여기 계신 재소자 여러분들이나 지금 강의하는 저나 다 똑같은 인간이고 다 죄인이다. 그러니까 좀 쉬러 왔다고 생각하고 다 털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라." 북한 교화소 관계자들이 남한의 교정 시설을 방문한다면, 우리가 지적하지 않더라도 북한 시설이 비문명적이란 사실에 자책할 것이다. 북한의 교정 시설 근무자들은 다른 외부 세계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인권유린이 인권유린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사람은 바뀐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북한을 골려먹을까', '남한 체제에 이용할까'라는 식으로 안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한의 언론도 문제가 있다. 종편채널이 북한을 알린다는 면에서 순기능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우월주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부작용이 크다. 그런 방법은 북한 문제를 풀어가는 성숙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한 사람들도 한편으로는, 어려서부터 경쟁에 시달려 병들어 있는 것 같다. 모든 걸 경쟁의 관점에서 인식하니까 북한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이는 잘못된 가치관일 수 있다.
-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탈북자 단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흔히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비판도 있는 것으로 안다. 탈북자 사회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궁금하다.
탈북자 커뮤니티는 좁은 사회다. 탈북자들은 마이너, 소수자이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이들이 북한 전체를 반영할 정도로 많지는 않다. 참고로 탈북자 중 특정지역(함경도·량강도) 출신이 전체 탈북자의 80% 이상이고, 그중 여성이 80% 이상이다. 표본에 한계가 있다. 보수 쪽에서 정치적으로 필요한 수요가 있어 그들과 협력하는 탈북자들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탈북자가 보수적이라고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 대학 동아리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고 들었다. 러브스토리가 궁금하다.
캠퍼스 커플이었다. 그때 연애하지 않았으면, 내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를 만나고 삶의 의욕이 생겼다. 이성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남한에 오기까지 네 번 투옥에 세 번 탈옥하며 목숨 걸고 살아왔는데, 남한 사회에서 못 살게 뭐가 있겠나. 한번 살아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일단은 '저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라는 목표가 생겼다. 그렇게 연애하느라, 한 학기 동안 힘들었다. 수업은 반도 안 들어갔다. 여자 친구는 수업이 오전이었고, 나는 오후였다. 여자 친구랑 함께 있으려면, 내가 오후 수업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학기 때 학사 경고까지 받았다. 첫 학기 때 학점이 2점대가 나왔는데 난 그것도 감지덕지했다. 14살에 공부를 그만뒀고, 24살에 대학에 들어왔는데 상대평가로 2점대가 나왔으니 그만하면 잘했다고 만족했다. 그 후, 4학년 1학기와 2학기 때 성적이 3점을 넘었다. 왜냐하면 결혼을 3학년에 했다. 결혼을 하니 성적이 확 올라갔는데, 사람이 심리적으로 안정이 돼 그랬던 것 같다.
아내의 장점 중에 하나는 편견이 없다는 것이다. 장인·장모도 편견이 별로 없다. 전통과 문화가 함께 있다는 게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다. 그 문화에 동화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피곤하다. 문화가 없다는 건 편견이 적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또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장인·장모는 기독교를 믿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아내는 처음에 나에게 종교를 전도하려 했고, 나는 여자 친구로 만나보려고 했다. 동상이몽이었던 셈이다.
한 번은 영화를 보러 가서 망신당한 적이 있다. 북한에서도 중·고등학교 때 상용한자 1500자를 배우는데, 나는 공부를 안 해서 한자를 잘 몰랐다. 연애 초기, <창(娼)>이라는 영화 티켓을 두 장 끊었는데 그런 영화인 줄 몰랐다. 나는 던지는 '창(槍)'인 줄 알았는데 '계집 녀 창(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여자 친구와 영화를 보다가 내가 오히려 창피해서 중간에 나와 버렸다. 그런데 아내는 그걸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내는 내가 과시하려고 그런 줄 알았고, 난 사실 몰라서 그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아내에게도 말했지만, 사실 북한에서 좋아한 여자가 있었다. 북한 체제를 고민하며 남한으로 갈 생각을 하던 때였다. '이 나라를 뒤집어엎고 새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런 허황된 생각을 할 때였는데, 그 사람은 내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민주공화국에서 누구든 김일성같이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와 같은 말을 하면 공포를 느껴 고발하거나 무서워서 달아나야 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 아내도 비슷하다. 한 여자에게 평생 행복함을 느끼며 사는 건 참 쉽지 않은 도전이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나와의 싸움에서 혁신해야 가정도 유지되고 행복도 배가되기 때문이다. 보통 부부가 잘 맞는다는 건 성숙한 부부의 이야기이다. 이성적 호감은 1년이나 2년만 지나면 없어진다. 그런 걸 보면 현재의 아내와 난 잘 맞는 것 같다.
- 남북한 두 체제를 모두 경험한 탈북 청년들이 통일시대를 준비하는데 있어, 어떤 역할이 있을 것 같다. 이들에게 특별히 당부하거나 부탁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요즘 탈북 청년들은 남한 청년들과 구분이 잘 안 된다. 두 체제를 모두 경험한 사람들은 남북한 갈등에 화합을 주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원래 소수자로 살면 사람이 강해진다. 왜냐하면 생존 여건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한 사회는 좋은 사회니까 열심히 살면 된다. 힘들 때일수록 북한을 잊지 않으면 된다. 북한에서도 살았는데 남한에서 왜 못 사나. 남한은 경쟁이 치열하지만, 노력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는 곳이다.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이 하루에 100달러를 번다. 북한에서는 1달러도 못 번다. 그걸 생각하면 두려울 게 하나도 없다.
-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마흔 살이 좀 넘었는데, 여든 살을 기준으로 할 때 절반을 살았다. 영양실조를 한 번 심하게 앓아서 몸이 약하다. 몸의 균형이 한 번 파괴된 사람은 오래 못 산다. 남은 시간 동안 난 자유롭게 살고 싶다. 누구에게 지시 받지 않고, 가정적으로 행복하고, 자녀들과의 관계도 좋기를 바란다. 더불어 내가 이 사회에 살고 있으니,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고, 특히 북한 관계 발전에 기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해 줄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젊은 사람들은 꿈이 자산이다. 나이가 여든 살이어도 '이상'이 있으면 그 사람은 젊은 사람이다. 꿈은 사회 변화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도 변화해야 한다. 변화하는 사회가 희망이 있다. 그런데 변화를 두려워하는 젊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 변화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 국가는 역사적으로 대부분 퇴조(退朝)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수시로 목표를 발견하며, 달려가야 한다. 변화 자체는 희망이지 두려움이 아니다. 다 잃을 각오를 하면 또 얻게 되어 있다. 특히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은 가진 게 아니다. 나는 속옷도 입지 못한 채 북한에서 내려왔다. 그런 나도 지금 살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우려스러운 일이다. 이익만 쫓는 사회에서는 개인은 물론 국가도 비전이 없다. 젊었을 때는 자기 것을 던져서라도 정의로움을 추구해야 된다. 그게 없는 사람들은 인생 또한 초라하게 살게 된다.
- 김형덕에게 자유란?
자유는 자기가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선택에 제한이 있는 사회라면, 그건 좋은 사회가 아니다. 선택을 제한하는데 저항하고, 불합리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젊은 청년일수록 보편적 정의와 공정 사회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던지는 사회가 희망이 있는 사회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이지연 연구원이 했으며, 정리는 조경일 선임연구원과 같이 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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